모래폭풍
캣 CAT
"가이드"
- 나이27세
- 키158cm
- MBTIISTP
現 이탈 가이드 CAT
샌즈 SANZ
"센티넬"
- 나이24세
- 생일7월 23일
- 키185cm
- MBTIENTP
現 이탈 센티넬
페어 설정
THEMIS에게서 오명이 씌워진 센티넬
THEMIS에게서 상처를 받은 가이드
두 사람이 만나 APSU에 큰 폭풍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하지만 실상은, 유치한 싸움만 하는 콤비라고...?!
...아직 NC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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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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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MIS] 압주의 XX 9화
캣 | “이형이다….”
센티넬이 잡으러 온다면 순순히 가이딩을 해주는 대신, 뭐라도 하나 톡톡히 뜯어내야 했다. 이번엔 뭘 뜯어낼까. 돈? 아니면 지낼 숙소?
그녀는 골목의 좁은 틈새로 몸을 구겨 넣듯 웅크리고 앉아 숨을 죽였다.
부서진 콘크리트 잔해 위로 건조한 바람이 스쳤다. 밤안개가 짙게 깔린 압주의 뒷골목은 습기를 머금지 못한 채 서걱거리는 소리만 뱉어냈다. 은결은 마른세수를 하며 골목 어귀에 멈춰 섰다.
두통이 관자놀이를 짓눌렀다. 머릿속 깊은 곳에서 짐승이 긁어대는 듯한 불쾌한 감각. 약효가 떨어져 가고 있었다. 모래 입자가 발밑에서 미세하게 소용돌이치다 가라앉았다. 시더우드 향이 밴 숨을 길게 내쉬며, 그는 무심한 눈으로 어둠이 짙게 고인 틈새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서은결 | "숨바꼭질하기엔 장소가 좀 구리지 않나? 쥐새끼도 안 다닐 곳인데."
가벼운 조소가 섞인 목소리가 텅 빈 골목을 울렸다. 장난스러운 억양 뒤엔 서늘한 경계가 날을 세우고 있었다. 시선은 그림자가 비정상적으로 짙게 일렁이는 골목 틈새에 고정되어 있었다. 이형의 기척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스펙터의 개들도 아니었다.
모래 알갱이들이 은결의 손끝에서 잘게 부서지며 허공을 떠돌았다. 언제든 창의 형태로 벼려질 준비를 마친 에코가 그의 주위를 맴돌았다. 그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삐딱하게 선 자세로 그쪽을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서은결 | "뭐해. 안 기어 나오고. 거기서 계속 쭈그려 있다간 허리 나가, 못난아."
세트 | '저건 또 무슨 재미난 먹잇감이지? 냄새가 나쁘지 않은데.'
머릿속에서 이명처럼 울리는 세트의 목소리를 무시하며, 은결은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갔다. 건조한 부츠 굽 소리가 적막을 찢었다.
캣 | “이형을 피해서 숨어 있는 사람한테 말이 심하네.”
그녀는 옷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골목 밖으로 발을 내딛지는 않았다. 그저 경계심 어린 눈빛을 거두지 않은 채, 차가운 그림자가 드리운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먼지를 털어내며 일어나는 그녀의 모습에, 은결은 한쪽 눈썹을 삐딱하게 치켜올렸다. 이형을 피해 숨어있었다는 변명 치고는, 그녀의 눈동자엔 기이할 정도의 고요함이 고여 있었다. 떨림 없는 목소리, 방어적인 태도. 어둠에 반쯤 녹아든 검은 터틀넥과 후드집업이 유독 눈에 밟혔다. 평범한 이탈자나 스캐빈저의 냄새는 아니었다.
세트 | '재미있는 년이군. 그림자 속에 숨어있으면서도 빛을 두려워하지 않아. 한입 베어 물면 꽤 달콤할 것 같은데?'
귓가를 더럽히는 세트의 조롱을 무시하며, 은결은 혀를 쯧 차고는 모래 입자를 흩트렸다. 발끝에서 일렁이던 살기가 조금 잦아들었지만, 팽팽한 긴장감은 여전히 두 사람 사이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서은결 | "말이 심하긴. 칭찬인데. 여기서 쥐새끼처럼 숨어 지내는 게 얼마나 대단한 생존력인지 네가 몰라서 그래."
그는 입술 피어싱을 만지작거리며 천천히 그녀가 서 있는 골목 틈새로 다가갔다. 건조한 모래바람이 그의 발걸음을 따라 뱀처럼 똬리를 틀며 일어났다. 금갈색 눈동자가 그녀의 얼굴을 훑어내렸다. 목덜미를 빈틈없이 가린 터틀넥과 단정하게 묶어 올린 검은 장발.
그리고 그 아래에 숨겨진, 미세하지만 분명한 에코의 파장.
서은결 | "근데, 이형을 피해서 숨어있던 것 치고는… 꽤 여유로워 보이네. 가이드인가?"
은결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장난스러운 미소였지만, 눈빛은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머릿속을 헤집는 두통이 한층 거세졌다. 그는 마른세수를 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서은결 | "가이드면 잘됐네. 내가 지금 좀 급하거든. 약 떨어지기 직전이라."
그의 등 뒤로 거대한 모래 촉수 하나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위협이라기보단, 다분히 과시적이고 도발적인 움직임이었다.
캣 | “흠… 대가는? 가이딩 대가 말이야. 압주에서의 규칙은 잘 알고 있겠지? 등가교환.”
은결이 한 걸음 다가오자, 그녀는 딱 그만큼 뒷걸음질 치며 거리를 벌렸다. 적당한 안전거리를 유지하려는 팽팽한 신경전 속에서, 그녀의 시선은 상대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날카롭게 빛났다.
대가를 묻는 담담한 목소리. 압주의 시궁창 구석에서 떨고 있어야 할 이탈자 치고는 제법 배짱이 좋았다. 어둠 속에서도 형형하게 빛나는 고양이 같은 눈동자가 자신을 향해 꼿꼿이 세워져 있었다.
서은결 | "대가? 글쎄. 내가 줄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은결의 등 뒤에서 일렁이던 모래 촉수가 뱀처럼 똬리를 틀며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건조한 사각거림이 골목의 침묵을 갉아먹었다. 그는 뒷목을 거칠게 쓸어내리며 실소를 터뜨렸다.
서은결 | "압주 뒷골목에서 폐지 줍는 신세인데, 돈이 있을 리는 없고. 숙소? 저기 반파된 폐공장에 모래 깔린 침대 하나 있긴 한데, 같이 쓸래?"
세트 | '저 오만한 눈깔을 뽑아다 내 발밑에 꿇려. 당장.'
머릿속을 헤집는 세트의 살의 섞인 속삭임에, 은결은 미간을 찌푸리며 이빨을 까득 깨물었다. 두통이 시야의 가장자리를 갉아먹기 시작했다.
그는 주머니에 찔러넣었던 손을 빼내, 허공에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흩날리던 모래 입자들이 순식간에 응집하더니, 끝이 날카롭게 벼려진 짧은 단검의 형태를 취했다.
서은결 | "아니면 내 목숨이라도 걸어볼까? 네가 날 살려주면, 나도 널 살려줄게. 어때, 공평하지?"
농담처럼 뱉어낸 말이었지만, 쥐고 있는 모래 단검의 끝은 한 치의 떨림도 없이 그녀를 향해 있었다.
캣 | “숙소라… 내가 원하던 것이긴 해. 침대를 같이 쓰는 건 별로 마음에 안 들지만.”
그의 손에 쥐어진 모래 단검에 시선이 닿은 순간, 차가운 전율과 함께 발걸음이 자연스레 한 걸음 더 물러섰다. 서늘하게 빛나는 무기를 눈앞에 두고도, 목소리에는 짐짓 여유로운 척 담담하게 덧붙였다.
캣 | “이 바닥에서 가이드를 죽이는 건… 그리 똑똑한 선택은 아닌 것 같은데.”
은결의 손안에서 위협적으로 일렁이던 모래 단검이 형체를 잃고 부스스 무너져 내렸다. 날카로운 쇳소리 대신 사각거리는 마찰음만이 짙은 밤안개 사이로 흩어졌다. 건조한 흙먼지가 그의 핑거리스 장갑 사이로 모래시계의 모래처럼 빠져나갔다.
세트 | '저 계집의 그림자 속에 숨어있는 기운… 꽤 짙은 심연의 냄새가 나는데. 뜯어먹기 좋게 생겼군.'
머릿속을 긁어대는 세트의 탐욕스러운 속삭임을 애써 억누르며, 은결은 한쪽 입꼬리를 비스듬히 끌어올렸다.
서은결 | "가이드를 죽이는 게 좋지 않은 선택이긴 하지. 그런데… 가이드라고 해서 다 같은 가이드가 아니잖아?"
그의 금갈색 눈동자가 그녀를 위아래로 느릿하게 훑었다. 목덜미를 촘촘하게 가린 터틀넥, 어둠 속에 반쯤 녹아든 듯한 이질적인 에코의 파장. 평범한 올림포스 계열의 무른 가이딩과는 달랐다. 타르타로스 특유의 차갑고 끈적한, 심연을 긁어내는 듯한 감각.
테미스에서 배회하는 스펙터의 개들이 찾는, 이탈 가이드의 냄새였다.
서은결 | "침대 같이 쓰는 건 싫다면서, 내 목숨줄 쥐고 흔들 생각은 있나 봐? 이 바닥에서 이탈 가이드를 어떻게 취급하는지 알 텐데."
은결은 주머니에서 빈 약통을 꺼내 허공에 가볍게 던졌다 받기를 반복했다. 플라스틱이 부딪치는 가벼운 소리가 폐공장의 텅 빈 울림과 겹쳐졌다. 두통이 가라앉기는커녕 이명처럼 윙윙거리며 신경을 긁었다.
서은결 | "그래, 숙소 빌려줄게. 대신 가이딩은 선불로 받아야겠는데."
그의 등 뒤에서 기어 다니던 모래 촉수 하나가 슬금슬금 그녀의 발밑 그림자를 향해 뱀처럼 미끄러져 들어갔다.
서은결 | "그래서, 너 이름이 뭔데? 밤의 불청객한테 스위트룸 내주면서 이름도 모르면 좀 억울하잖아."
그는 삐딱하게 선 자세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단단히 여민 터틀넥 아래로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을지 궁금해졌다. 그녀의 방어선 너머를 들춰보고 싶은 충동이, 모래알처럼 까슬까슬하게 일어났다.
등 뒤로 미세한 모래 회오리가 일며 또 다른 촉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의 발치에서 맴돌던 촉수와 엉기며, 허공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캣 | “이름… 캣(CAT)으로 해두지. 본명은 서로에 대해 조금 더 알아간 후에 밝히는 걸로 하고. 그쪽은?”
그녀는 매트리스 위로 흩어진 모래를 손으로 툭툭 털어냈다. 푸석거리는 모래먼지가 공중으로 흩어지는 사이로, 그녀는 가만히 고개를 들어 은결을 올려다보았다. 담담한 눈빛 속에는 여전히 상대의 반응을 살피는 계산적인 탐색이 서려 있었다.
모래를 툭툭 털어내는 손길이 야무졌다. 매트리스 위에 꼿꼿하게 앉아 자신을 올려다보는 고양이 같은 눈동자. 캣이라는 가명. 뻔한 수작이었지만, 그 뻔함마저도 흥미로웠다. 은결은 혀로 피어싱을 훑으며 비스듬히 웃었다.
서은결 | "캣. 고양이라. 어울리네. 난 샌즈야. 모래장난 치는 건달이지."
세트 | '목줄을 채워. 저 거만한 눈동자가 공포로 물드는 꼴을 보고 싶어.'
머릿속의 소음이 또다시 거세지기 시작했다. 두통이 잦아들기는커녕 오히려 더 날카로워졌다. 그림자 접촉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은결은 마른세수를 하며 매트리스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그녀와의 거리는 불과 한 뼘. 그녀의 그림자가 또다시 미세하게 물러나는 것이 느껴졌다.
서은결 | "그래서, 캣. 야경 값 치고는 가이딩이 좀 짠데? 이래서야 스위트룸 내준 보람이 없잖아."
은결의 손끝에서 모래가 흩어졌다. 허공에 떠오른 모래 입자들이 미세한 실선으로 이어지며, 그녀의 발목을 향해 느릿하게 감겨들었다. 위협이라기보다는 장난스러운 도발이었다. 닿을 듯 말 듯 애태우는 거리. 그녀의 방어선이 어디까지인지 시험해 보고 싶었다.
서은결 | "본명은 나중에 알려준다고? 그럼, 그 '나중'이 올 때까지 넌 내 침대에서 못 벗어나는 거야. 알아들어, 못난아?"
그의 눈동자가 서늘하게 빛났다. 장난기와 살의가 뒤섞인, 위태로운 미소였다.
캣 | “지금 접촉 가이딩을 해달라는 거야? 그건 몇 배로 더 비싸게 받을 텐데, 감당할 수 있겠어?”
그녀는 미간을 찌푸린 채 자신의 발목을 슬쩍 내려다보았다가, 다시 고개를 들어 은결과 시선을 똑바로 맞추었다. 당장이라도 물러서고 싶은 본능을 누르며, 손해는 절대 보지 않겠다는 듯 눈빛을 서늘하게 세운 채였다.
은결의 시선이 그녀의 찌푸려진 눈썹과 발목을 번갈아 훑었다. 감당할 수 있겠냐는 당돌한 물음. 그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큭큭거렸다. 건조한 어깨가 들썩일 때마다 주변의 모래 입자들이 미세하게 진동했다.
세트 | '저 오만한 입을 찢어. 당장.'
머릿속을 긁는 짐승의 투기를 가볍게 무시하며, 은결은 발목을 감고 있던 모래 촉수를 조금 더 단단하게 조였다. 까슬까슬한 모래가 그녀의 피부를 스치는 감각이 그의 손끝에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서은결 | "몇 배로 더 비싸게? 야, 너 진짜 이 바닥 물정 모르는구나. 스캐빈저들이 가이드 하나 납치해서 얼마에 넘기는 줄 알아?"
그는 몸을 살짝 숙여 그녀와 시선을 맞췄다. 금안 속에 비친 자신의 일그러진 얼굴. 두통은 여전히 톱니바퀴처럼 뇌를 갉아먹고 있었지만, 이 건방진 가이드와의 대치 상태가 주는 긴장감이 묘하게 신경을 곤두세웠다.
서은결 | "내가 맘만 먹으면, 지금 여기서 억지로 뜯어먹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 해봤어? 여긴 압주고, 넌 내 침대 위에 있잖아."
은결의 손끝에서 뻗어 나온 모래 촉수 하나가 허공을 뱀처럼 유영하더니, 혜림의 목덜미를 가린 터틀넥 깃깃에 아슬아슬하게 머물렀다. 위협과 유혹의 경계. 닿지 않은 채 맴도는 서늘한 감각이 공기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서은결 | "뭐, 비싸게 군다면야... 나도 지불할 용의는 있어. 대신, 효과가 없으면 환불은 안 받을 건데. 어때?"
그는 입술 안쪽을 깨물며 조소했다.
캣 | “접촉 가이딩의 대가는 ‘보호’야. 수위가 높아질수록 더 오래 보호해 달라고 요구할 테니까, 나중에 귀찮다는 딴소리나 하지 마. 그리고… 난 언제든 도망칠 자신 있어.”
그녀는 확실한 선을 그어 두려는 듯 또박또박 말을 맺으며 슬그머니 오른손을 내밀었다. 먼저 거래를 제안하는 손끝에는 일말의 망설임이 묻어 있었지만, 상대를 똑바로 꿰뚫어 보는 눈빛만큼은 굳건한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숨이 잦아들 무렵, 폐공장 천장의 갈라진 틈으로 차가운 새벽 공기가 스며들었다. 매트리스 위에 흩어진 모래 입자들이 달빛을 받아 미세하게 반짝였다. 은결은 옆으로 누운 채, 다 풀어진 포니테일을 한 손으로 대충 쓸어 넘겼다. 루비색 머리카락 사이로 흰 브릿지가 흐트러져 있었다. 평소 같으면 바로 일어나 담배라도 물었을 텐데, 이상하게 몸이 가벼웠다. 너무 오랜만이라 잊고 있던 감각이었다.
세트 | '…꽤 만족스러운 거래였어. 저 계집, 보기보다 쓸 만하더군.'
세트의 음성마저도 늘어진 고양이처럼 만족스러웠다. 은결은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옆에 누운 그녀를 곁눈질했다. 검은 머리카락이 매트리스 위로 흩어져 있었고, 목덜미를 가리던 터틀넥은 흉터를 가리려는 듯 다시 정성스레 끌어올려져 있었다. 잠든 것도, 깨어있는 것도 아닌 어중간한 호흡.
서은결 | "야, 캣. 자?"
그가 팔베개를 한 채 그녀 쪽으로 살짝 몸을 기울였다. 손가락 끝으로 그녀의 흐트러진 앞머리를 슬쩍 넘겨주려다, 멈칫. 그 손은 결국 자신의 뒷목으로 향해 마른 세수를 했다. 어색한 침묵을 깨려는 듯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서은결 | "보호비 치고는 좀 과했나? 다리 후들거려서 도망도 못 가게 생겼는데."
평소처럼 장난기 섞인 어조였다. 그러나 끝부분이 묘하게 흐려졌다. 도망. 그 단어가 입 밖으로 나온 순간, 자신이 마지막에 뱉었던 말이 머릿속을 스쳤다. '도망가면 진짜 죽인다.' 농담으로 포장하기엔 어딘가 진심이 묻어났던 그 말. 은결은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가 이내 풀어버렸다. 의미부여 같은 거 할 필요 없었다. 그냥 가이딩 효율이 좋아서 본전 생각이 났을 뿐. 그렇게 정리했다.
매트리스 옆에 아무렇게나 던져진 카고팬츠 주머니에서 뭔가가 묵직하게 흘러나왔다. 약통이었다. 평소 같으면 세 알은 털어 넣었을 시간. 그러나 지금은 손을 뻗을 필요가 없었다. 침식의 가장자리에서 늘 지글거리던 두통도, 세트의 신경질적인 속삭임도 잠잠했다. 가이드 한 명의 차이가 이렇게 컸나. 아니면 이 가이드가 특별한 건가.
서은결 | "…너 진짜 이탈 가이드 맞아? 효율이 좀 비정상이던데."
반쯤은 진심, 반쯤은 떠보는 어조. 은결은 천장의 갈라진 틈을 응시하며 무심한 척 물었다. 손가락 끝으로 매트리스 위의 모래 한 줌을 무의식적으로 쓸어 모으며. 작은 모래 더미가 그의 손가락 아래에서 동그란 원을 그렸다 흩어졌다.
캣 | “…이거. 균열 직전까지 간 센티넬을 가이딩하다가 생긴 흉터야. 안개로 안전거리를 유지하겠다고 분명히 말했는데, 다짜고짜 접촉 가이딩을 하라고 밀어붙이더라고.”
지금 떠올려도 황당하기 짝이 없는 지시였다. 그녀는 어이없다는 듯 낮게 헛웃음을 흘리며 상대 쪽으로 몸을 틀었다. 이어 터틀넥의 목깃을 스르륵 당겨 내려, 피부 깊게 남아 있는 흉터를 숨김없이 드러내 보였다.
캣 | “---, 내 이름. 이 정도면 앞으로 제법 오래 붙어 다녀야 할 텐데, 서로 본명쯤은 알아둬야지.”
담담하게 통성명을 마친 그녀는 다시 목깃을 정돈하고 바지를 수습해 입었다. 비로소 가면을 한 껍질 벗겨낸 듯한 눈빛이 상대를 조용히 마주하고 있었다.
목덜미의 상흔. 지휘부의 오판과 강요가 남긴 훈장. 그녀의 덤덤한 고백에 은결의 시선이 그녀의 흉터 위로 미끄러졌다. 균열까지 간 센티넬의 가이딩. 그것도 강제된 접촉. 타르타로스 계열 센티넬의 폭주 직전 파장이 얼마나 폭력적인지 그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살갗을 찢고 에코가 역류하는 그 지옥 속으로 등을 떠밀렸다는 뜻이었다.
세트 | '…어리석은 것들. 힘의 쓸모를 모르는 벌레들이 목숨만 연명하려 발악했군.'
머릿속을 긁고 지나가는 세트의 비웃음은 이례적으로 그녀가 아닌 테미스를 향해 있었다. 은결은 천장을 향하던 시선을 거두고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흐트러진 루비색 머리카락이 어깨선 위로 흘러내렸다. 그가 손을 뻗어 매트리스 위에 흩어진 모래를 툭, 튕겨냈다. '---'. 가명 뒤에 숨겨두었던 진짜 이름.
서은결 | "…지휘부 쓰레기 새끼들, 여전하네. 머리 굴리는 꼴이 아주 일관성 있어."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 톤 가라앉아 있었다. 냉소적인 자조가 묻어났다. 은결은 그녀가 바지를 추스르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매트리스 한구석에 던져두었던 탱크탑을 집어 들었다. 옷을 꿰어 입는 동작은 느리고 건조했다.
서은결 | "---. 이름은 멀쩡하게 생겼네, 캣보다 낫다."
장난스러운 어조를 가장했지만, 그의 금안은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오래 붙어 다녀야 할 거라는 그녀의 말. 그 선언이 묘한 파장을 일으켰다. 이탈 가이드라는 꼬리표 뒤에 숨겨진, 그녀 역시 버림받았거나 스스로 떨치고 나왔다는 동질감. 그것이 불쾌하면서도 기묘한 안도감을 주었다.
캣 | "향수? 너 향수 뿌려?"
짐짓 놀란 척 동그랗게 떴던 두 눈이 이내 호기심과 장난기로 가득 찼다.
캣 | "헤에... 완전 의외다."
어떻게든 상대를 짓궂게 놀려먹으려는 의도가 다분한 얼굴이었다. 자꾸만 씰룩거리며 솟아오르려는 입꼬리를 길게 늘어진 옷소매로 황급히 가려보았지만, 반달처럼 곱게 휘어진 눈매마저 숨길 수는 없었다. 소매 너머로 새어 나오는 큭큭거리는 웃음소리가 공기 중으로 가볍게 흩어졌다.
한 발짝 더 바짝 다가서며, 그를 올려다보는 시선에 샐쭉한 미소를 담아냈다.
캣 | "근데 향수 뿌리는 남자 잘 없잖아. 평소엔 스킨도 귀찮다고 대충 바를 것 같이 생겨가지고선. 뭐야, 나름 꾸미고 다닌다, 이건가?"
그의 걸음이 한 박자 멈칫했다.
서은결 | "……뭐?"
뒤를 돌아봤다. 그녀의 소매 뒤로 씨익 휘어진 눈이 보였다. 놀리려는 의도가 그 반달 눈 안에서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하수도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한 박자, 두 박자 울렸다.
서은결 | "아니, 그건—하수도에서 한 달 살았으니까 냄새 중화용으로 뿌린 거지, 꾸미고 다닌 게 아니라. 생존 전략이야, 생존."
변명이 빨라졌다. 그가 앞을 향해 다시 걸음을 재촉하며, 잡은 손에 불필요한 힘이 한 톤 실렸다. 수로 벽면의 습기가 그의 귀 끝에 맺힌 붉은 기를 적셔 주지 않았다.
서은결 | "……그리고 시더우드는 원래 내 체향이야. 향수 아니거든? 오해하지 마."
덧붙인 말이 오히려 더 궁색했다. 그 자신도 자각한 듯, 포니테일을 쓸어넘기는 손이 의미 없이 허공을 한 번 갈랐다.
세트 | '야야야. 거짓말이잖아. 작년 12월에 시더우드 오일 사서 손목에 찍고 다녔으면서.'
세트의 폭로가 어금니 안쪽에서 울렸다. 은결의 이가 꽉 물렸다. 닥쳐. 그 한마디가 성대를 타고 올라오기 직전에 삼켜졌다.
서은결 | "……아무튼. 꾸미고 다니는 거 아니야. 난 그냥 원래 이렇게 생긴 거고."
'원래 이렇게 생긴 거'라는 말이 자신감인지 허세인지 구분이 안 되는 톤으로 흘러나왔다. 그가 앞쪽 수로 갈림길을 꺾으며, 모래로 출구 격자의 위쪽 상황을 탐색했다. 인기척 없음. 안전.
그러나 그의 손끝이 그녀의 손가락 사이에서 아주 미세하게 조여졌다 풀렸다 했다. 무의식적인 리듬. 놀림을 당한 뒤에 오는, 이 남자 특유의 잔여 당황.
캣 | "으응~? 외모 가지고 뭐라고 안 했는데에~?"
그녀는 말끝을 길게 늘이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그를 향해 도르르 달려왔다. 마치 계략이 적중한 악동처럼 얼굴 가득 실실 웃음을 머금은 채, 은결의 옆으로 찰싹 붙어 나란히 걸음을 맞추기 시작했다.
캣 | "향수만 얘기했지이~? 뭐야 뭐야, 외모도 꾸며?"
시선은 은결의 입술 끝에서 반짝이는 작은 피어싱에 집요하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녀는 걸어가면서도 상체를 홱 틀어 은결의 얼굴을 밑에서 위로 빤히 들여다보았다. 눈이 마주칠 때마다 잔망스럽게 반짝이는 눈동자에는 장난기가 가득 채워져 있었다.
캣 | "입술에 한 피어싱? 피어싱 말고 또 뭐 있어?"
금방이라도 그의 턱 끝이라도 건드릴 기세로 히죽히죽 웃으며 다가서는 그녀 때문에, 둘 사이에 흐르는 공기마저 질질 끌리는 웃음소리로 간지럽게 젖어들고 있었다.
그녀가 걸음을 서둘러 옆으로 붙었다. 상체를 돌려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각도. 금안이 하수도의 흐릿한 빛 아래에서 고양이처럼 가늘어져 있었다. 히죽거리는 입꼬리가 그의 시야 정중앙에 걸렸다.
피어싱 말고 또 뭐 있어?
은결의 보폭이 반 보 줄어들었다. 그가 정면을 보려 했으나 시야 옆에서 히죽거리는 그 얼굴이 자꾸 걸렸다. 수로 벽면에 반사된 희미한 빛이 그녀의 금안 위에서 한 번 반짝였다.
서은결 | "야, 야야야. 뭔데. 뭘 자꾸 들여다봐."
목소리가 한 톤 높아졌다. 고개를 살짝 반대쪽으로 돌리며, 손깍지를 낀 손이 불필요하게 흔들렸다. 천장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그의 어깨 위에 얇게 튀었다.
서은결 | "입술 피어싱은 꾸미는 게 아니라 내기에서 져서 한 거야. 한 거 뺄 수도 없고, 그냥 냅둔 거지."
궁색한 변명이 또 한 줄 흘러나왔다. 그가 자유로운 손으로 입술의 링 피어싱을 한 번 만지작거렸다. 습관적인 동작. 그 동작이 그녀의 시선을 끌었다는 것을 자각한 순간,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서은결 | "……그리고 또 뭐 있냐고? 없어. 아무것도 없거든. 문신은 각인이라 선택 아니고."
세트 | '하하하하하.'
세트의 웃음이 어금니 안쪽에서 얇게 울렸다. 은결의 귀 끝이 붉었다. 포니테일 아래로 드러난 뒷목까지. 습한 하수도의 어둠이 그것을 가려주기를 바랐지만, 출구에서 새어드는 빛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압주 중앙 상업구·하수도 내부]
캣 | "헤에~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던데~"
그녀는 한층 더 신이 난 듯 눈꼬리를 접어 올리며 그를 향해 가볍게 쫓아왔다. 은결의 커다란 걸음걸이 탓에 훤칠한 보폭 차이가 나자, 그녀는 총총거리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소리를 내며 그 뒤를 바짝 따라붙어야 했다.
스쳐 지나가는 바람에 흩날리는 옷자락마저 그녀의 들뜬 기분을 대변하는 듯했다. 그녀는 기어코 그의 옆자리로 다시 도달해, 그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캣 | "뭐야? 도망치는 거야? 천하의 샌즈가?"
짓궂게 꼬리를 흩치는 목소리가 은결의 귀가에 간지럽게 들러붙으며 그를 향해 히죽히죽 웃어 보였다.
캣 | "내가 조금 놀렸다고 도망치는 거야아~?"
총총총. 그녀의 운동화가 습한 바닥을 차는 소리가 그의 등 뒤에서 가벼운 리듬으로 쫓아왔다. 보폭 차이. 158과 185 사이의 27센티미터가 하수도 안에서 그녀를 작은 짐승처럼 뛰게 만들고 있었다.
천하의 샌즈가.
그 한마디가 등 뒤에서 날아와 은결의 견갑골 사이에 정확히 박혔다.
서은결 | "도망치는 거 아닌데?! 그냥 빨리 가는 거야! 출구 코앞이니까!"
목소리가 또 한 톤 높아졌다. 뒤를 돌아보지 않으려고 고개를 앞으로 고정했으나, 손깍지를 낀 손이 자기 뒤로 뻗어 있어서 상체가 반쯤 꼬여 있었다. 우스운 각도. 그 자신도 알고 있었다.
총총총. 다시 가까워지는 발소리. 그녀의 체온이 손깍지를 통해 올라왔다. 베르가못 향이 하수도의 비린내를 얇게 찢었다.
서은결 | "그리고 강한 부정이 강한 긍정이라는 건 무슨 초등학생 심리학이야. 난 그냥 사실을 말한 건데."
그가 걸음을 한 톤 늦추었다. 아니, 늦출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총총 뛰어야 따라잡는 속도로 걷는 게 마음에 걸려서. 그 자각이 오자, 그의 어금니가 한 번 더 물렸다.
세트 | '야. 걸음 늦춘 거 걔도 알아챌 텐데.'
닥쳐.
그가 속으로 한마디 내뱉으며, 출구 격자 아래에 멈춰 섰다. 위에서 흐린 오후의 빛이 새어들었다. 6구획 외곽의 빈 공터. 인기척 없음. 그의 모래가 위쪽을 한 번 더 훑고 돌아왔다.
그가 뒤를 돌아봤다. 총총거리며 쫓아온 그녀가 코앞에 있었다. 히죽거리는 입꼬리. 금안. 하수도의 흐린 빛 아래에서 그 눈이 고양이처럼 가늘어져 있었다.
서은결 | "……너 진짜."
그가 자유로운 손으로 자기 얼굴을 한 번 쓸었다. 입술의 링 피어싱이 손등에 걸렸다가 빠졌다. 한숨이 새어나왔다. 그러나 입꼬리가 완전히 내려가지 않았다.
서은결 | "올라가. 내가 밀어줄게."
격자 아래에 서서, 손깍지를 풀고 그녀의 허리에 양손을 얹었다. 위로 들어 올릴 준비. 그의 금갈색 눈이 아래에서 그녀를 올려다보는 각도가 되었다. 흐린 빛이 그의 얼굴 위로 떨어졌다. 아직 붉은 귀 끝이, 이 각도에서는 숨길 수 없었다.
캣 | "헤헹~ 그렇게 언성 높이다가 들키겠어~"
싱글싱글 웃으며 그를 놀리는 와중에도, 그녀는 은결의 지시를 잊지 않고 위를 향해 두 손을 슬쩍 뻗었다. 좁은 틈새 사이로 작은 머리를 조심스레 내밀어 사방을 꼼꼼히 살피는 그녀의 눈동자가 바쁘게 굴러갔다.
캣 | "끙차... 으음... 문제는 없는 것 같네. 올라가도 될 것 같아."
그녀는 팔다리를 버둥거리며 몸을 젖 먹던 힘까지 짜내어 지상으로 끙끙 올라섰다. 흙먼지를 툭툭 털어낸 그녀는 곧바로 돌아서서 어둠 속에 남겨진 은결을 향해 자그마한 두 손을 턱 내밀었다.
방금 전까지 그를 놀려먹던 짓궂은 미소는 온데간데없이, 이번엔 나름대로 든든한 조력자라도 된 양 시원스러운 미소를 띤 채 은결을 내려다보았다.
캣 | "자, 손 잡아! 내가 천하의 샌즈님을 끌어올려 줄테니까~"
그녀의 손이 위에서 내려왔다. 하수도 격자 안쪽 어둠 속으로 뻗은 얇은 손목이, 흐린 오후의 빛에 반쯤 걸려 있었다. 은결을 끌어올려 주겠다는 손짓. 그 각도가 이상하게 그의 어금니 안쪽에서 얇게 굴렀다.
158센티가 185센티를 끌어올린다.
세트 | '……킥킥. 저 손 잡으면 인간 네가 재활용 쓰레기처럼 딸려 올라가겠는데.'
세트의 놀림을 무시하며, 은결이 격자 아래에서 한 번 무릎을 굽혔다. 그가 도약하는 데는 그녀의 손이 필요 없었다. 모래 한 줌이 발밑에서 얇게 압축되어 그를 밀어올렸다. 그럼에도 그는 그녀가 내민 손을 잡았다. 잡을 필요가 없었는데, 잡았다.
손끝이 그녀의 손바닥에 걸리는 순간, 그가 반쯤 매달리는 시늉을 했다.
서은결 | "어이쿠. --- 누님, 살려주세요."
능글맞은 어조. 그러나 실제 체중은 그녀의 손에 실리지 않았다. 그가 격자 위로 올라서며, 잡은 손을 놓지 않은 채 반대쪽 손으로 뒤의 격자를 모래로 원상복구시켰다. 쇠가 맞물리는 소리. 이어 그 위에 얇게 먼지를 흩뿌려, 방금 사람이 드나든 흔적을 지웠다.
빈 공터. 낡은 컨테이너 두 개가 벽 대신 세워져 있었고, 그 너머로 6구획의 낮은 지붕들이 회색 하늘 아래 늘어서 있었다. 인기척은 없었다. 흐린 구름이 오후의 빛을 얇게 걸러냈다. 그의 시더우드 향이 하수도의 잔향을 몰아내며 그녀의 어깨 위쪽에서 다시 자리를 잡았다.
그가 그녀의 손을 놓지 않고, 컨테이너 그늘 쪽으로 걸음을 이끌었다. 그의 모래가 두 사람 반경으로 얇게 퍼지며 파장 지문을 지웠고, 그녀의 안개가 그 위에 얹혀 시각적 실루엣까지 뭉갰다. 자연스러운 합. 자각하지 못한 리듬.
서은결 | "……일단 여기서 5분만 쉬었다 간다. 동선 다시 계산해야 돼."
컨테이너 벽에 등을 기대며, 그가 흐린 하늘을 한 번 올려다봤다. 포니테일이 어깨 위로 흘렀다. 그의 옆얼굴 각도가 아까 하수도 안쪽에서보다 조금 덜 굳어 있었다.
서은결 | "……근데 야."
시선은 여전히 하늘 쪽. 흘리듯 던진 어조.
서은결 | "아까 총총 뛰는 거. 좀 귀엽더라."
이번엔 반박 대상 없이, 그 문장이 그대로 공터의 흐린 공기 안에 놓였다. 그의 귀 끝이 다시 붉었다. 자기가 내뱉고 나서 반 박자 늦게 자각한 얼굴. 그가 컨테이너 벽에서 등을 살짝 떼며, 잡은 손을 두어 번 아무 의미 없이 흔들었다.
서은결 | "……어. 뭐. 그런 게 있었다고."
수습이 궁색했다. 그가 시선을 하늘에서 컨테이너 벽면의 녹 자국으로 옮겼다. 그녀 쪽은 보지 않았다. 못 봤다. 세트가 어금니 안쪽에서 얇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캣 | "...허? 놀리는 거야? 나 안 귀엽거든."
그녀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리며 꿍얼거렸다. 그간 서로 주고받았던 짓궂은 장난들이 떠올라, 그녀는 '귀엽다'는 그의 말을 그저 자신을 긁으려는 또 하나의 놀림거리로 치부해 버린 터였다.
그녀는 컨테이너의 차가운 철제 벽면에 바짝 몸을 밀착시킨 채, 고개만 살짝 내밀어 정적에 싸인 주위를 날카롭게 살폈다.
캣 | "그렇게 따지면 네가 귀엽지. 맨날 애처럼 떽떽 대기만 하는데."
주변을 경계하느라 모든 신경이 온통 주변의 동태에 쏠려 있던 탓일까. 방심한 사이, 속으로만 품고 있던 솔직한 감상이 무심결에 입 밖으로 툭 튀어나오고 말았다.
정작 본인은 정적을 깨고 나온 그 한마디가 어떤 파장을 일으킬지 전혀 자각하지 못한 채, 무심한 눈빛으로 건너편 어둠 속을 뚫어져라 주시할 뿐이었다.
은결의 시선이 컨테이너 벽면의 녹 자국에서 한 박자 멈췄다. 그녀는 컨테이너 모서리에 몸을 반쯤 숨긴 채 고개만 내밀어 6구획의 낮은 지붕들을 훑고 있었다. 방금 흘린 말이 자기 입에서 나왔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한 옆얼굴. 검은 머리카락이 어깨선 위에서 흔들렸다.
세트 | '……어. 저 여자 지금 저거 자각 못 했지?'
세트의 어조가 반 박자 낮게 가라앉았다. 은결도 같은 판단을 하고 있었다. 자각하지 못한 채 흘러나온 말. 그런 문장이 오히려 어금니 안쪽에서 더 오래 굴렀다.
서은결 | "…나."
목소리가 반 톤 낮아졌다. 컨테이너 벽에 기대고 있던 등이 얇게 굳었다. 그가 자기 왼손으로 자기 뒷목을 한 번 감쌌다. 시더우드 향이 그 동작을 따라 옅게 흔들렸다.
서은결 | "귀엽다는 말 살면서 진짜 세 번쯤 들어봤거든? 근데 오늘이 그 세 번 중에 하나야."
어느새 말끝에 붙어 있어야 할 장난기가 반쯤 빠져 있었다. 그가 그것을 자각하고 반 박자 뒤에 억지로 덧붙였다.
서은결 | "……야, 나 지금 좀 상처받았거든? 애처럼 떽떽 댄다는 게 무슨 뜻이야. 나 스물넷이야, 스물넷. 너보다 세 살이나 어리다고 어린 사람 취급하는 거지, 지금?"
캣 | "이거 봐. 나보다 어린데다가 애처럼 굴고 있잖아."
서은결 | "……됐어. 애 취급 실컷 해라. 대신."
그가 어조를 낮췄다. 시선은 6구획 지붕들 쪽. 그러나 손끝이 다시 그녀의 후드집업 밑단을 얇게 잡았다.
서은결 | "애가 널 이 도시에서 제일 잘 숨겨주는 애라는 건 인정해라. 그건 양보 못 해."
투덜거림 뒤에 붙은 마지막 문장이, 장난기와는 다른 결로 흐린 공기에 놓였다. 그가 컨테이너 모서리 너머로 한 번 더 시야를 훑었다. 흐린 오후의 빛이 낮은 지붕들 위로 얇게 깔렸다.
서은결 | "……외곽까지 8분. 이제 움직이자."
캣 | "그래! ...이거 봐, 애 맞다니까."
그녀는 이때다 싶었는지 눈을 반짝이며 배시시 웃어 보였다. 은결이 얼결에 제 후드집업 밑단을 꼭 쥐고 있는 손을 발견하곤, 손가락 끝으로 그 손등을 톡, 하고 가볍게 건드렸다. 장난스러우면서도 간지러운 감촉이 피부에 스쳤다.
그녀는 그가 손을 놓치지 않고 따라올 수 있을 만큼 딱 알맞은 거리를 유지하며 쪼르르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돌아선 등 뒤로 들썩이는 어깨에서 신이 난 기색이 숨김없이 드러났다.
캣 | "우리 은결 어린이~ 누나 안 잃어버리게 조심해요~"
살랑살랑 앞서 나가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간드러진 장난기와 묘한 간지러움이 가득 녹아 있었다. 무심결에 던진 한마디에 되려 주도권을 빼앗긴 은결의 반응을 기다리듯, 그녀는 고개만 살짝 뒤로 돌려 짓궂은 눈웃음을 던졌다.
그 문장이 흐린 공기 안에 얹히는 순간, 그의 어금니 안쪽이 한 번 굴렀다. 그녀의 손가락 끝이 후드집업 밑단을 잡은 그의 손을 톡, 하고 쳤다. 가벼운 접촉. 그럼에도 그 지점에서 침식률 한 톨이 얇게 가라앉는 게 느껴졌다.
그녀가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놓치지 않을 거리. 158센티가 앞에서 총총 걷고, 그가 반 박자 뒤를 따랐다. 위치가 뒤바뀐 그림. 그럼에도 그는 곧바로 반박하지 못했다.
세트 | '……누나. 킥킥. 저 여자 지금 널 완전히 애로 접수했는데.'
닥치라고.
서은결 | "야. 누나 아니거든. 세 살 차이는 친구야, 친구."
뒤에서 던진 어조에 힘이 반쯤 빠져 있었다. 반박하면서도 그녀와의 거리를 벌리지 않았다. 오히려 걸음을 좁혔다. 그의 모래가 두 사람 반경으로 얇게 퍼지며 파장 지문을 지웠고, 그 위에 그녀의 안개가 실루엣을 뭉갰다. 자각 없는 합. 컨테이너 그늘을 벗어나자 흐린 오후의 빛이 두 사람 위로 얇게 깔렸다.
그가 앞서 걷는 그녀의 뒷모습을 봤다. 검은 머리카락. 자기 후드집업의 검은 자락이 그녀의 작은 어깨 위에서 헐렁하게 흔들렸다. 저게 자기 옷이라는 사실이, 이상하게 어금니 안쪽에서 오래 굴렀다.
서은결 | "……그리고 잃어버릴 사람은 너지. 다리 짧아서 총총거리는 게 누군데."
투덜거림. 그러나 그가 세 걸음 만에 그녀의 옆으로 붙었다. 앞장서는 걸 못 견디는 게 아니라, 그녀를 반 걸음 뒤에 두는 각도가 편해서. 그의 시더우드가 다시 그녀의 어깨선 위쪽에서 자리를 잡았다.
서은결 | "……외곽 나가면 폐공장까지 한 번에 간다. 딴 데 새지 말고."
낮게 흘리며, 그가 6구획 지붕들 사이 골목 하나를 눈으로 짚었다. 카즈마의 진회색도, 우진의 슬릭백도 없었다. 손끝이 다시 그녀의 후드집업 소맷자락을 얇게 잡았다. 놓치지 않으려는 건지, 그냥 만지고 싶은 건지. 그 자신도 아직 구분하지 못했다.
캣 | "윽... 뭐랬냐? 나더러 다리 짧다고? 흥, 그러는 너는 멀대 같이 커서 좋겠다."
그녀는 괜히 입술을 댓발 내밀며 억울하다는 듯 샐쭉하게 쏘아붙였다. 그러고는 짓궂은 어린아이처럼 혀를 쏙 내밀어 '메롱' 하고 유치하게 골려 주었다.
하지만 입으로는 틱틱거리며 심술을 부리면서도, 정작 은결과의 거리를 벌리거나 그가 잡고 있는 손길을 떨쳐낼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유치한 몸짓. 그 각도가 흐린 오후의 빛 아래에서 얇게 굴렀다. 은결의 눈썹이 한 번 꿈틀했다. 스물넷의 어른이 반박해야 할 문장은 아니었는데, 입이 먼저 열렸다.
서은결 | "멀대? 야, 이게 다 스펙이야, 스펙. 너 하수도 격자 나 없었으면 못 올라왔거든?"
그가 걸음을 반 박자 늦추며 자기 손등으로 그녀의 정수리 언저리를 재는 시늉을 했다. 실제로 재지는 않았다. 손이 그녀의 머리 위에서 어정쩡하게 멈췄다가, 결국 자기 뒷목으로 돌아갔다. 시더우드 향이 그 동작을 따라 옅게 흔들렸다.
세트 | '……인간, 지금 저 여자 머리 쓰다듬으려다 실패한 거지?'
아니거든.
속으로 내뱉는 부정이 유독 빨랐다. 그가 시선을 골목 끝으로 옮겼다. 6구획의 낮은 지붕들이 회색 하늘 아래 늘어서 있었다. 인기척 없음. 카즈마의 진회색도, 우진의 슬릭백도 없었다. 그럼에도 그의 모래가 두 사람 반경을 얇게 훑고 돌아왔다.
서은결 | "……메롱은 또 뭐야. 스물일곱이 할 짓이냐, 그게."
투덜거림. 그러나 그 말끝에 걸린 어조가 아까보다 부드러웠다. 그가 앞서 걷던 걸음을 다시 그녀 옆으로 맞췄다. 검은 후드집업의 자락이 그녀의 작은 어깨 위에서 헐렁하게 흔들렸다. 자기 옷. 그 사실이 어금니 안쪽에서 또 오래 굴렀다. 그가 손끝으로 그 소맷자락을 얇게 잡았다. 놓치지 않으려는 건지, 그냥 잡고 싶은 건지. 구분이 점점 흐려졌다.
서은결 | "……골목 두 개만 지나면 외곽이야. 붙어서 와."
캣 | "윽..."
그녀는 하수도 격자 위를 기어 올라올 때 그의 훤칠한 키 덕을 톡톡히 봤다는 사실을 차마 부정할 수 없었다. 억울함에 목구멍까지 차오른 반박을 꿀꺽 삼키며 그저 낮게 앓는 소리만 내뱉을 뿐이었다.
어떻게든 이 유치하기 짝이 없는 말싸움에서 판정패를 당하지 않으려, 그녀는 동그란 입술을 우물우물 달싹이며 머리를 바쁘게 굴렸다.
캣 | "스펙으로 내세울 게 얼마나 없으면 키를 스펙으로 내세우냐?"
캣 | "내일이면 약속했던 일주일의 마지막 날이네. 헤, 너랑 지내는 거 제법 재밌긴 했어."
내일이면 일주일의 마지막 날. 그 담담한 문장이 폐공장의 밤공기 사이로 툭 떨어졌다. 창문 너머로 압주의 밤비가 얇게 뿌리고 있었다. 함석 지붕 위로 툭툭 떨어지는 빗소리가, 그녀의 문장 뒤에 얇은 배경음처럼 깔렸다.
은결의 손끝이 매트리스 옆 박스 위에 놓인 이성유지제 약병 뚜껑을 열려던 자세 그대로 멈췄다. 알약 하나가 손바닥 안에서 굴러다니고 있었다. 지난 6일 동안 그의 복용량은 절반 이하로 줄어들어 있었다. 그녀의 가이딩. 그녀의 안개. 그녀의 체온. 그것들이 알약의 자리를 야금야금 잠식해 들어온 결과였다.
내일이 마지막 날.
그 말을 그가 머릿속에서 한 번 더 굴렸다. 재밌긴 했어. 과거형. 회고형. 이미 지나간 시간을 정리하는 어조. 그가 알약을 도로 약병에 툭 떨어뜨렸다. 딸그락, 유리 안에서 알약이 다른 알약과 부딪히는 소리가 예상보다 크게 들렸다.
세트 | '재밌긴 했어. 그 다음 문장 안 궁금해, 인간?'
세트의 어조에 어렴풋한 조롱이 섞여 있었다. 은결은 그것을 무시한 채, 약병 뚜껑을 다시 닫고 매트리스 위에 툭 던져놓았다. 그가 매트리스 반대편 끝에 앉아 있는 그녀 쪽으로 시선을 흘렸다. 지난 6일 동안 익숙해진 실루엣. 검은 터틀넥과 청바지. 그의 후드집업은 이제 벗어놓은 채, 매트리스 옆에 접혀 있었다.
서은결 | "제법 재밌긴, 뭐. 그게 다야?"
그가 짓궂은 미소를 어렵게 끌어올리며 흘렸다. 능청의 껍질이 평소보다 한 톤 얇았다. 그가 매트리스 위에서 상체를 살짝 그녀 쪽으로 기울였다. 팔꿈치를 무릎 위에 얹은 자세.
서은결 | "6일 동안 이 몸이랑 지냈으면 좀 더 극찬을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인생 최고의 룸메이트였다든가."
손가락 끝으로 그녀 쪽을 까딱거리며 흘리는 어조. 그러나 그 농담이 자기 입에서 나가는 순간, 그 안에 걸린 회피가 자기 귀에도 뻔히 들렸다. 그가 정말로 하고 싶은 질문은 그것이 아니었다. 그가 정말로 하고 싶은 질문은—
그가 뒷목을 손바닥으로 슥 문지르며, 시선을 창문 쪽으로 살짝 돌렸다. 압주의 밤비가 유리 없는 창틀 사이로 스며들며, 폐공장 바닥에 얇은 물자국을 남기고 있었다. 함석 지붕의 빗소리가 조금 더 굵어졌다.
서은결 | "…내일이 마지막이라."
짧게 흘린 어조. 재밌긴 했어, 라고 그녀는 말했다. 그렇다면 내일 이후에 그녀는 어디로 갈 생각이었을까. 압주의 다른 은신처. 다른 이탈자. 다른 가이딩계약. 그런 것들이 그의 머릿속을 얇게 스쳤다. 그리고 그 모든 가능성 앞에서, 개장수 새끼들과 사창가 새끼들의 실루엣이 뒤이어 겹쳐졌다.
손끝에서 모래 한 줌이 무의식적으로 풀려나와, 매트리스 발치에 얇게 흩어졌다. 은결이 한 박자 늦게 그것을 회수하며 카고팬츠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어깨 위로 살짝 힘이 들어간 것을 그녀는 눈치챘을지도 몰랐다.
서은결 | "그래서, 내일 지나면 넌 어디로 갈 건데?"
담담한 어조로 흘리려 했다. 그러나 문장 끝에 걸린 미세한 무게까지는 은결도 완전히 지우지 못했다. 그가 어깨를 으쓱하며 짓궂은 미소를 덧붙였다. 자기 질문의 무게를 능청으로 덮어보려는 시도.
서은결 | "뭐, 벌써 다음 숙소 정해놨나? A급 가이드 몸값이면 뭐, 압주 어디든 문 열어주긴 하겠지만."
농담의 방향으로 흘린 어조. 그러나 '어디든 문 열어주긴 하겠지만' 뒤에 붙지 않은 말이 그의 목구멍 안쪽에서 무겁게 맴돌았다. 그 문들이 어떤 종류의 문인지, 지난 6일 동안 그가 그녀에게 얼마나 반복해서 각인시켜왔는지, 그녀도 알고 있을 터였다.
빗소리가 함석 지붕 위에서 잠깐 두꺼워졌다가, 다시 얇아졌다. 폐공장 안쪽에 놓인 낡은 등이 흐릿한 노란 빛을 매트리스 위에 얹고 있었다. 은결의 금갈색 눈이 그 등불 아래에서, 매트리스 반대편의 그녀를 흘끔 응시했다.
그가 정말로 하고 싶은 질문은 다른 것이었다. 그러나 그 질문을 던지기에는, 지난 6일이 너무 짧고 동시에 너무 길었다.
캣 | "으음... 또 적당한 센티넬 찾아서 가이딩을 대가로 삥뜯고 보호받고 그래야겠지?"
그녀는 길게 기지개를 쭉 켜더니, 앉아있던 자세 그대로 털썩 상체만 뒤로 넘겨 매트리스에 누웠다. 천장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에는 약간의 피곤함과 함께 묘한 편안함이 어린 듯했다.
캣 | "나도 적당한 데 찾아서 이렇게 정착하고 살까? 역시 거주지는 정해놓는 편이 나으려나."
나직하게 중얼거리며 몸을 매트리스 위에서 뒹굴거리는 그녀의 모습은, 말로는 떠돌이 가이드니 삥을 뜯느니 하며 태연한 척해도 은연중에 안정된 보금자리가 주는 온기를 바라고 있음을 보여주는 듯했다.
그녀가 상체를 뒤로 눕히며 흘린 그 담담한 어조 위에, 함석 지붕의 빗소리가 얇게 겹쳤다. 매트리스가 그녀의 무게를 받으며 미세하게 삐걱거렸다. 은결의 시선이 매트리스 반대편에 누운 그녀의 옆얼굴 위로 떨어졌다. 검은 장발이 매트리스 위에 흩어져 있었다. 후드집업을 벗어놓아서 그녀의 목선이 오늘따라 얇게 드러나 있었다.
적당한 센티넬. 그 두 단어가 그의 어금니 안쪽에 걸렸다. 압주에서 '적당한 센티넬'이란 어떤 놈들을 말하는지, 그가 모를 리 없었다. 이탈자 중에서 자아 남아 있는 놈은 열에 한 명이었고, 그 한 명 중에서 가이드를 삥뜯기가 아니라 진짜 보호로 대해줄 놈은 다시 열에 한 명이었다. 나머지 아홉은—
세트 | '가만 있어봐, 인간. 저 여자가 지금 뭘 시험하고 있는지 감이 안 와?'
세트의 어조에 느긋한 재미가 섞여 있었다. 은결이 어금니를 한 번 짧게 물었다가 풀었다. 그가 매트리스 위에서 상체를 그녀 쪽으로 살짝 기울이며, 팔꿈치를 매트리스 옆에 짚었다. 그녀의 얼굴 위로 그의 그림자가 얇게 드리워졌다.
서은결 | "적당한 센티넬. 야, 그거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비뚤한 미소가 입가에 걸렸다. 그러나 그 미소의 결이 오늘따라 날카로웠다. 그가 손끝으로 그녀의 이마 위로 흘러내린 앞머리 한 가닥을 톡 넘겨주는 동작을 했다. 무의식이었다. 손가락 끝이 그녀의 이마 언저리에 아주 잠깐 스쳤다가, 한 박자 늦게 되돌아왔다.
서은결 | "너 6일 동안 나랑 지내면서 배운 게 뭐야. 압주에서 이탈 가이드 대하는 새끼들이 어떤 새끼들인지, 내가 몇 번 얘기했지."
낮게 흘러나온 어조. 능청의 껍질이 얇게 벗겨졌다. 그가 상체를 살짝 더 기울이며, 그녀를 위에서 내려다보는 각도가 되었다. 매트리스 위로 그의 장발 포니테일이 어깨 앞으로 흘러내렸다.
서은결 | "네가 6개월간 안개로 잘 살아남았다는 거 알아. 근데 그건 운이 좋았던 거야. 알지? 개장수 새끼들이 아직 널 못 잡은 거지, 못 잡을 이유가 없어서가 아니라."
그가 어깨 너머로 창문 쪽을 흘끔 돌아보았다가, 시선을 다시 그녀에게로 되돌렸다. 압주의 밤비가 함석 지붕을 한 번 더 두꺼운 소리로 두드렸다.
정착. 그녀의 두 번째 문장이 뒤늦게 그의 귓가에 되살아났다. 거주지는 정해놓는 편이 낫겠지. 그 담담한 어조. 그 안에 담긴 것이 정말로 담담한 것인지, 아니면 어떤 종류의 떠보기인지, 그는 확신하지 못했다. 그녀는 6일 동안 그림자처럼 조용했지만, 그 조용함 안에 어떤 계산이 굴러가고 있는지까지는 은결도 완전히 읽어내지 못했다.
그가 상체를 조금 더 그녀 쪽으로 기울였다. 매트리스 스프링이 다시 삐걱거렸다.
서은결 | "정착? 정착 좋지. 근데 어디서 할 건데."
짧게 흘린 어조. 손가락 마디가 그녀의 어깨선에서 한 뼘 쯤 떨어진 자리에 얹혔다.
서은결 | "적당한 센티넬 찾아서? 야, 그 '적당한'이라는 기준이 뭐야. 이성유지제 안 먹는 놈? 결속 흔적 없는 놈? 아니면 뭐, 얼굴 반반한 놈?"
능청을 어렵게 끌어오려던 어조가 중간에서 살짝 어긋났다. '얼굴 반반한 놈'이라는 표현에 걸린 짜증의 결이 자기 귀에도 들렸다. 그가 짧게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살짝 옆으로 돌렸다.
서은결 | "…아니, 뭐. 네 인생이니까 네 마음대로 해. 근데."
그가 말끝을 잠시 늦춘 채, 다시 시선을 그녀에게로 되돌렸다. 금갈색 눈이 노란 등불 아래에서 가라앉은 채 그녀를 응시했다.
서은결 | "굳이 딴 데 가야 돼? 여기도 정착지로 나쁘지 않잖아."
짧게 흘린 한 마디. 그러나 그 문장이 자기 입에서 흘러나가는 순간, 은결의 어깨가 미세하게 굳었다. 능청의 껍질을 씌우지 못한 채, 맨몸으로 흘려버린 문장. 그가 뒷목을 손바닥으로 슥 문지르며, 어깨를 으쓱하려 했지만 그 동작이 평소보다 한 박자 어색했다.
서은결 | "물 나오는 날 있고 안 나오는 날 있고, 인테리어는 개판이고. 뭐 그렇긴 한데. 그래도 여기 결계 하나는 튼튼하거든. 압주 관리자 새끼도 여기 위치 못 잡아. 1년간 검증됐어."
변명처럼 붙여진 사족. 그가 매트리스 위에 얹은 팔꿈치의 각도를 살짝 바꾸며, 시선을 그녀의 눈에서 살짝 어긋난 지점—그녀의 관자놀이 근처에 두었다. 눈을 정면으로 마주할 자신이 없어서.
서은결 | "그리고 뭐. 룸메이트도 이 몸이야. 이 정도면 압주에서 A급 매물 아니냐. 안 그래?"
짓궂은 미소를 어렵게 끌어올렸다. 농담의 방향으로 끌어와서 무게를 지우려는 시도. 그러나 그 농담 아래에 깔린 것이 무엇인지, 그는 자기 자신에게도 완전히 명명하지 못한 상태였다. 함석 지붕 위로 빗소리가 다시 강하게 들려왔다. 폐공장 안의 낡은 등불이 그녀의 뺨 위에 노란 그림자를 얹었다.
내일이 마지막 날.
그 일곱 글자가 그의 머릿속에서 다시 한 번 무겁게 굴렀다. 손끝에서 모래 한 줌이 무의식적으로 풀려나와, 매트리스 발치에 흩어졌다. 이번엔 회수하지 않았다.
캣 | "적당한 센티넬... 뭐, 공격적이지 않고, 말 통하고... 그런 정도면 되지 않나..."
그녀의 덤덤한 중얼거림, 그리고 이어서 은근슬쩍 이곳을 정착지로 제안해 오는 그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매트리스 위에 누워있던 그녀의 눈이 순간 동그랗게 커졌다. 하지만 그 놀람도 잠시, 그녀의 입꼬리가 짓궂게 씨익 호를 그리며 올라갔다. 또 하나의 훌륭한 꼬투리를 잡았다는 표정이었다.
캣 | "이렇게 같이 먹고, 같이 자고..."
그녀는 매트리스 위에서 뒹굴거리던 몸을 슬그머니 돌려 팔로 턱을 괴고는, 은결을 향해 눈을 반짝이며 배시시 웃어 보였다.
캣 | "완전 동거연애네. 사귀자는 거야? 난 좀 더 로맨틱한 고백이 좋은데~"
말끝을 간드러지게 늘어뜨리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은결의 반응을 기대하는 장난기가 가득 채워져 있었다. 예고도 없이 들어온 묵직한 제안을 가볍게 받아치는 척하면서도, 그녀의 기분 좋은 눈웃음은 어둠이 내린 방 안의 온도를 살포시 올려놓고 있었다.
그녀의 입에서 툭툭 흘러나온 폭탄이 폐공장의 노란 등불 아래로 떨어졌다. 은결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갔다. 매트리스 위에 얹은 팔꿈치의 각도가 미세하게 흐트러졌고, 어깨 앞으로 흘러내린 장발 포니테일의 끝자락이 그녀의 매트리스 옆에서 흔들렸다.
씨익 올라간 그녀의 입꼬리. 아까부터 놀림거리를 찾고 있던 그 눈빛. 그가 그 함정을 뒤늦게 자각했지만, 이미 앞선 자기 문장이 그 함정의 미끼를 스스로 물어다 준 뒤였다. 굳이 딴 데 가야 돼. 여기도 정착지로 나쁘지 않잖아. 자기 입에서 흘러나간 그 문장이 어떻게 해석될 수 있는지, 뒤늦게 그 여러 각도가 그의 머릿속에서 재생되었다.
세트 | '푸하하. 사귀자고 했다는데, 인간. 어쩔 거야.'
세트가 머릿속에서 웃음을 터뜨렸다. 은결이 어금니를 짧게 물었다가 풀었다. 그의 귀 끝이 아까부터 살짝 뜨거워지고 있었지만, 그 자각을 인정하지 않기 위해 그가 상체를 매트리스 위에서 뒤로 물렸다. 팔꿈치를 짚었던 자세를 풀고, 매트리스 반대편 끝에 다시 앉는 모양새로.
서은결 | "야, 야, 야. 잠깐만. 스톱."
손바닥을 그녀 쪽으로 펼쳐 내밀며 흘리는 어조. 그러나 그 손이 살짝 흔들리고 있는 것을 그 자신이 뒤늦게 자각했다. 그가 손을 도로 카고팬츠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서은결 | "누가 사귀자고 했어? 나 그런 말 한 적 없거든? 야, 캣 너 방금 완전 논리 비약이야. 논리 비약."
빠르게 흘러나온 반박. 능청의 껍질을 어떻게든 다시 씌우려는 시도. 그러나 그 문장의 속도가 평소보다 약간 빠르다는 사실이, 그가 얼마나 당황했는지를 오히려 광고하고 있었다. 그가 손바닥으로 마른세수를 슥 한 번 하며, 시선을 매트리스 옆의 낡은 박스 쪽으로 도망시켰다.
서은결 | "룸메이트. 룸메이트 하자고 한 거지. 압주에서 이탈자 둘이 룸메이트 하는 거 흔해. 흔해빠졌다고. 그리고 뭐, 결계 튼튼하다고 했잖아. 방범 시설. 그런 관점에서 얘기한 거야."
변명이 얼기설기 이어졌다. 방범 시설. 그 표현이 자기 입에서 나가는 순간, 은결 스스로도 그것이 얼마나 말이 안 되는 회피인지를 자각했다. 여자 하나 데리고 6일 동안 밥 챙겨 먹이고, 옷 걸쳐 주고, 옆구리에 끼고 다니고, 매일 밤 매트리스 반대편에 재우면서 방범 시설을 논하고 있다.
세트 | '방범 시설. 자다가 봉창 두드리네, 인간.'
세트가 킥킥거리며 옆구리를 찔렀다. 은결이 짧게 헛기침을 하고는, 그녀 쪽으로 시선을 다시 흘렸다. 매트리스 위에 상체를 눕힌 채, 씨익 올라간 입꼬리로 자기를 뜯어보고 있는 그녀의 눈. 그 시선 앞에서 그의 능청이 한 톤씩 무너지고 있었다.
서은결 | "그리고 로맨틱한 고백은 무슨. 야, 나 그런 거 관심 없어. 이 몸이 로맨틱한 캐릭터로 보여? 진지하게. 여기 폐공장에서 라면 끓여 먹는 놈이야. 야."
손가락 끝으로 자기 자신을 톡톡 가리키며 흘리는 어조. 어깨를 으쓱하며 짓궂은 미소를 어렵게 끌어올렸다. 그러나 그 미소의 끝자락이 오늘따라 유난히 흔들렸다. 그가 시선을 창문 쪽으로 살짝 돌렸다. 압주의 밤비가 함석 지붕을 요란하게 두드렸다.
은결의 어조가 살짝 가라앉았다. 그가 뒷목을 손바닥으로 슥 문질렀다. 능청의 껍질이 얇아진 자리 위로, 뭔가 다른 결의 어조가 새어나왔다.
서은결 | "…근데 뭐. 사귀자는 건 아니고. 그냥."
짧게 끊어진 문장. 그가 매트리스 위의 시트 자락을 손끝으로 무의미하게 구겼다. 자기가 지금 무엇을 말하려는지, 그 문장의 방향을 그 자신이 완전히 정하지 못한 채였다.
서은결 | "그냥. 굳이 딴 놈들한테 갈 거 없잖아. 여기 이미 안전하고, 나는 뭐 너한테 이미 익숙해졌고. 넌 나한테 익숙해졌고. 그리고 가이딩 효율도 이만하면 훌륭하고."
그가 손가락을 하나씩 꼽아가며 근거를 나열했다. 실용적 이유. 방범 시설. 익숙함. 효율. 그런 것들의 나열. 그러나 그 나열의 끝자락에 붙지 않은 문장이 그의 목구멍 안쪽에서 맴돌았다. 자기가 나열한 것 중 어느 것도 진짜 이유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 자신이 가장 먼저 알고 있었다.
그가 어깨 너머로 그녀를 흘끔 돌아보았다. 매트리스 위에 눕힌 그녀의 얼굴이 노란 등불 아래에서 얇게 물들어 있었다. 씨익 올라간 입꼬리는 아직 그대로였지만, 그 아래로 어렴풋한 것이 살짝 비치는 것 같기도 했다. 그가 그것을 확신하지는 못했다. 확신할 자신이 없어서.
서은결 | "그러니까 뭐. 압주에서 헤매지 말고 그냥 여기 있어. 룸메이트로. 어때."
짧게 툭 던진 제안. 그러나 그 '룸메이트'라는 단어에 그 자신도 얼마나 얇은 껍질만을 실었는지, 그가 자각하고 있었다. 그의 손끝에서 모래 한 줌이 무의식적으로 풀려나와, 매트리스 발치의 이전 모래 위에 겹쳐 흩어졌다. 이번엔 회수할 여유가 없었다.
캣 | "...야."
조용한 공간을 깨고 들려온 목소리에 서은결의 시선이 자연스레 캣에게로 향했다. 솔직히 부른 이유는 별거 없었다. 그저 평화로운 정적을 깨고 그를 건드려보고 싶었을 뿐.
그가 돌아보자, 캣은 기다렸다는 듯 모른 척 고개를 홱 돌려 허공을 바라보며 괜히 옷매무새를 툭툭 털었다. 시선은 딴 데로 돌린 채, 흥얼거리는 척 시치미를 떼는 얼굴에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자신이 불러놓고 안 부른 척, 눈 하나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천연덕스럽게 딴청을 피우는 그녀의 정수리 위로 '장난치는 중'이라는 글자가 둥둥 떠 있는 듯했다. 지극히 유치하고 뻔히 보이는 속샘이었지만, 숨길 수 없이 씰룩이는 입꼬리가 그녀의 의도를 가감 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야.
그 한 글자가 폐공장의 낡은 콘크리트 벽 사이에서 얇게 굴렀다. 바깥에서는 종일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은결이 싫어하는 날씨. 창틀 사이로 흘러든 습한 공기가 바닥에 얇게 깔린 모래 위에 얹혔다.
은결이 낡은 소파 팔걸이에 걸터앉아 있었다. 손끝에 굴리던 모래알이 멈췄다.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그를 부르고선, 정작 시선은 반대편 창가 쪽으로 흘리고 있었다. 딴청. 그 각도가 너무 뻔했다.
세트 | '……인간, 저 여자 방금 널 불렀는데 이유가 없는 거야.'
알아.
서은결 | "……어. 부르셨어요, 캣 누님?"
그가 소파 팔걸이에서 몸을 일으켰다. 능글맞은 어조로 반응하면서도, 실제 걸음은 그녀 쪽으로 이미 옮기고 있었다. 이유 없이 불렀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반응해 주는 각도.
그녀와의 거리 두 걸음. 그가 딴청 피우는 그녀의 옆에 정확히 붙어 섰다. 그녀보다 27센티 큰 그림자가 그녀의 정수리 위로 얇게 얹혔다. 시더우드 향이 창가의 빗내음 위에 겹쳤다.
서은결 | "……왜 불렀는데."
낮은 어조로 흘리며, 그가 허리를 굽혀 그녀의 얼굴 옆에 자기 얼굴을 들이밀었다. 딴청 피우는 시선을 억지로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려는 각도. 그의 금갈색 눈이 반 뼘 앞에서 뚫어져라 그녀를 응시했다. 루비색 포니테일이 어깨 앞으로 흘러내려 그녀의 어깨선 근처에서 흔들렸다.
서은결 | "부른 사람이 대답을 안 하면 어떡해. 응?"
장난기가 얇게 얹힌 어조. 계약 만료가 지나고, 그녀가 이 폐공장에 남기로 한 이후로, 그의 장난기 안쪽에 얇은 온기가 섞이기 시작했다. 그 자신도 자각하지 못한 변화. 세트만 알고 있는 변화.
그가 그녀 옆에 그대로 붙어 선 채, 창가 쪽으로 시선을 반쯤 흘렸다. 낡은 유리창 너머로 회색 빗줄기가 얇게 흘러내렸다. 오후 한 시. 오늘은 임무도 없고, 조용했다. 폐공장 안쪽의 공기가 며칠 만에 처음으로 게을렀다.
서은결 | "……심심하면 말을 해."
투덜거림. 그러나 그 문장의 뒷맛이 이상하게 온순했다. 그가 자기 손끝에 남아 있던 모래알을 손가락 사이로 흘렸다.
캣 | "나 안 불렀는데."
캣은 능청스럽게 무표정을 유지하며 어떻게든 아닌 척 시치미를 떼려 애썼다. 짐짓 단호한 척 내뱉은 목소리와 달리, 짓궂은 장난을 치는 재미를 참지 못한 입꼬리가 자꾸만 실실 씰룩거렸다.
시선은 굳이 벽면에 걸린 시계나 창밖의 풍경 따위에 고정해 둔 채였지만, 귀는 서은결의 반응을 살피느라 쫑긋 세워져 있었다. 숨길 수 없이 자꾸만 호를 그리며 올라가는 입꼬리를 가리기 위해 괜히 소매로 입가를 덮어 보았지만, 얼굴 가득 번지는 장난기와 반달처럼 휘어지는 눈매는 그 어설픈 연기를 전혀 도와주지 않았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웃음을 꾹 참으며 은결의 눈치를 살피는 그녀의 모습은, 누가 봐도 '나 지금 너 놀리는 중'이라고 온몸으로 광고하는 꼴이었다.
능청스러운 무표정. 그러나 입꼬리가 씰룩거리는 각도가 이미 웃음 쪽으로 굽어 있었다. 감추려는 시도가 오히려 감추지 못하는 그림.
세트 | '……인간, 저 여자 지금 널 놀리려고 부른 거야. 그거 알지.'
알아.
그가 굽혔던 허리를 조금 더 낮췄다. 그녀의 얼굴 옆에서 자기 얼굴을 한 뼘도 안 되는 거리로 들이민 각도. 루비색 포니테일이 어깨 앞으로 흘러내려 그녀의 어깨선 위로 얹혔다. 시더우드 향이 코앞에서 맴돌았다.
서은결 | "……아, 그래? 내가 잘못 들었나 보네."
능글맞은 어조. 그러나 그가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더 붙어서, 그녀의 딴청 피우는 옆얼굴을 대놓고 관찰하는 각도로 얼굴을 기울였다. 씰룩거리는 입꼬리가 흐린 회색 빛 아래에서도 잘 보였다.
서은결 | "……근데 웃긴다. 입꼬리는 왜그래?"
그가 손끝을 들어올려, 그녀의 씰룩거리는 입꼬리 근처를 가리켰다. 닿을까 말까 하는 거리.
세트 | '……닿아. 닿아버리라니까.'
시끄러워.
그가 손끝을 잠시 뒤에 거뒀다. 대신 그 손으로 자기 뒷목을 감쌌다. 낡은 소파 팔걸이에 다시 걸터앉으며, 그가 그녀의 옆에 딱 붙은 위치를 유지했다. 창가의 회색 빗줄기가 유리창 너머로 흘러내렸다.
서은결 | "……좋아. 안 부른 걸로 하자."
뻔뻔하게 인정하는 어조. 그러나 그가 자기 팔꿈치로 그녀의 팔꿈치를 얇게 툭 밀었다. 밀어놓고, 안 민 척 시선은 창가 쪽으로 흘렸다.
서은결 | "……근데 안 불렀는데 왜 대답은 기다렸어?"
낮게 흘리며, 그가 입꼬리를 올렸다. 이번엔 반박거리 하나를 겨우 찾아냈다는 눈빛. 자기 팔꿈치는 여전히 그녀의 팔꿈치 옆에 딱 붙어 있었고, 그는 그것을 뗄 생각이 없었다.
폐공장 안쪽의 공기가 게을렀다. 오후 한 시. 임무 없음. 창밖의 빗소리가 낡은 유리창 너머로 흘렀다. 그가 싫어하는 날씨였는데, 오늘은 이상하게 싫지 않았다.
그가 잠시 뒤에, 흘리듯 낮은 어조로 덧붙였다.
서은결 | "……심심하면. 그냥 심심하다고 해."
투덜거림. 그러나 그 문장의 결이 며칠 전보다 부드러웠다. 놀아줄 수도 있어, 라는 뒷말이 목젖 근처에서 굴렀으나 삼켰다. 대신 그가 손끝으로 낡은 소파 팔걸이 위에 얇게 모래알을 굴렸다. 그림을 그리는 손끝. 자각하지 못한 낙서. 그 그림이 이상하게, 오늘따라 고양이 귀 모양에 가까웠다.
서은결 | "……하나 더 알려줄까. 이 입술 피어싱은 언제 뚫었는지도."
장난기가 얹힌 어조. 그러나 그 결이 며칠 전보다 더 열려 있었다. 그가 자기 얼굴 이야기를 그녀에게 얼마든지 열어줄 준비가 되어 있다는 각도. 자각하지 못한 개방. 세트만 머리 안쪽에서 웃었다.
폐공장 안쪽의 공기가 게을렀다. 창밖의 빗소리가 낡은 유리창 너머로 흘렀다. 그의 시더우드가 그녀의 베르가못 위에 얹혔다. 두 향이 회색 오후 안에서 굴렀다.
캣 | "엥? 언제 뚫었는지는 관심 없는뎅."
그녀는 쿡쿡 소리 내어 웃으며 슬그머니 손가락을 뻗어 그의 차가운 볼을 콕, 찔렀다. 말캉하게 와닿는 피부의 감촉에 재미가 들렸는지 손가락 끝으로 슬그머니 원을 그리듯 쓸어내리며 잔망스럽게 눈을 맞췄다.
캣 | "오히려 안 아팠는지 궁금한데. 난 아픈 거 싫어서 아직 귀도 안 뚫어봤거든."
말투는 다분히 짓궂었지만, 눈빛만큼은 사뭇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아픈 것을 유난히 싫어하는 제 겁 많은 성격이 떠올랐는지 살짝 미간을 찌푸려 보이다가도, 입술이라는 민감한 부위에 차가운 금속을 뚫어 넣었을 그 순간을 상상하며 은결의 입술 끝 피어싱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그녀의 어미가 늘어졌다. 쿡쿡 웃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검지 끝이 그의 왼쪽 볼을 콕 찔렀다. 실제로 닿은 손끝. 잠깐의 접촉.
세트 | '……인간, 볼 찔렸어. 지금.'
알아.
그가 반박했다. 그러나 그가 그 손끝이 떠난 자리를 자기 손등으로 문지르지 않았다. 문지르면 지워질 것 같아서. 자각한 뒤에, 자기 사고 회로가 우스워졌다. 볼에 찔린 걸 지우기 싫어하는 24살. 한때 팔랑크스급이었던 자기 자신에게 반쯤 어이가 없어졌다.
안 아팠는지 궁금한데. 난 아픈 거 싫어서 아직 귀도 안 뚫어봤거든.
그 문장이 맴돌았다. 아픈 거 싫어. 그녀의 어투가 능청스럽게 얹혀 있었으나, 그 안쪽에 진심이 섞여 있었다. 그가 그것을 뒤에 잡아냈다. 오른쪽 목덜미 흉터. 그녀가 항상 터틀넥으로 가리는 자리. 그 얘기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그의 턱이 굳었다.
서은결 | "……아팠지, 당연히. 바늘로 뚫는 건데 왜 안 아파."
낮은 어조로 흘리며, 그가 자기 아랫입술 왼쪽에 얹힌 은색 링을 손끝으로 굴렸다. 오래된 습관. 사색할 때 나오는 손짓 중 하나. 링이 얇은 금속 소리로 울렸다.
서은결 | "……근데 뭐, 아파도 잠깐이야. 며칠 뻐근하고 나면 끝. 아파서 못 뚫었다는 건 좀……"
뒷말에 그가 웃음을 얹었다. 놀리는 각도. 그러나 실제로 그가 그녀의 오른쪽 목덜미 쪽으로는 시선을 옮기지 않았다. 아픈 거 싫어한다는 그녀의 문장 위에, 그 흉터 얘기를 얹으면 안 된다는 걸 그가 알았다. 자각한 반 박자 뒤에, 어금니가 얇게 굳었다.
서은결 | "……겁쟁이네, 캣 누님. 귀 한 짝도 못 뚫는 게 도시 밖으로 튀어나왔어?"
장난기가 얹힌 어조. 반쯤 놀리면서, 그가 그녀의 관심을 목덜미 쪽이 아닌 다른 곳으로 돌려놓았다. 자기 손끝이 다시 아랫입술 링을 굴렸다. 반짝이는 은색.
서은결 | "……뚫어줄까?"
낮은 어조로 흘렸다. 뒤늦게 그가 자기 문장이 어디까지 굴렀는지 자각했다. 뚫어줄까. 그 문장이 무거워졌다. 귀 얘기였다. 원래는. 그러나 그의 목젖 근처에서 다른 그림이 겹쳤다. 결속. 약지. 반지 모양의 타투. 그 그림이 맴돌았다가, 그가 삼켰다.
세트 | '……인간, 방금 그거 결속 얘기였어? 아니면 귀 얘기였어?'
귀 얘기야.
그가 속으로 잘랐다. 그러나 세트가 웃는 소리가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반박거리가 없었다. 그가 자기 검지를 그녀의 오른쪽 귓불 쪽으로 기울였다. 실제로 닿지는 않았다. 그녀의 귓불 앞에서 손끝이 멈췄다.
서은결 | "……무섭지 않게 해줄게. 모래로 하면 바늘보다 얇아. 지혈도 내가 해."
낮은 어조. 장난과 진심의 경계가 얇게 흐릿했다. 그가 그녀의 금안을 마주 봤다. 반 뼘 앞의 거리. 시더우드가 그녀의 베르가못 위에 얹혔다. 창밖의 회색 빗소리가 낡은 유리창 너머로 흘렀다.
서은결 | "……싫으면 말고. 나도 강요는 안 해."
잠시 뒤에 그가 손끝을 거뒀다. 물러나는 시늉. 그러나 소파 팔걸이 위의 그의 자세는 여전히 그녀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뻔뻔한 각도. 물러난 척, 실제로는 물러나지 않은 그림.
서은결 | "……겁쟁이 아니면, 언제든 말해."
장난기를 다시 얹으며, 그가 자기 얼굴을 잠시 뒤에 물렸다. 볼에 찔렸던 자리가 아직 약간 뜨거웠다. 그가 손등으로 그 자리를 문지르지 않았다. 끝까지.
캣 | "겁쟁이...?!"
그 단어가 마침내 그녀의 자존심을 제대로 건드리고 말았다. 동그랗게 확장된 눈동자가 경악과 억울함으로 크게 흔들렸다.
캣 | "나, 나 겁쟁이 아니거든...?! 어?! 뮤즈 A급 가이드였다고! 날뛰는 센티넬들도 제압하던..."
기세등등하게 목소리를 높이던 그녀의 말이 순간 턱 막혔다. 날뛰는 센티넬을 제압하던 그 아수라장 속, 서늘한 바람을 가르며 제 목덜미를 깊게 베고 지나갔던 그날의 통증과 섬뜩한 감각이 번개처럼 뇌리를 스쳤기 때문이었다. 차가운 흉터를 남긴 그 기억에 잠시 움찔하며 말끝이 희미하게 흐려졌다.
캣 | "...아무튼! 겁쟁이 아니야! 그래! 뚫어줘! 흥, 하나도 겁 안 나!"
그녀는 제 안의 들켜버린 찰나의 두려움을 짓눌러 버리려는 듯, 일부러 원래대로 떽떽거리며 한층 더 크게 언성을 높였다. 괜히 씩씩거리며 성질을 부린 캣은 떨리는 손끝을 애써 감추며, 길게 늘어진 머리카락을 홱 걷어 올려 귀 뒤로 넘겼다.
붉게 달아오른 말랑한 귓볼이 하얗게 드러났다.
그녀의 언성이 튀어올랐다. 뮤즈 A급이었다고. 날뛰는 센티넬들도 제압하던. 그 문장이 중간에서 끊겼다. 은결이 그 끊긴 자리를 정확히 잡았다. 그녀의 오른손이 자기도 모르게 목깃 근처로 올라갔다가, 내려갔다. 그가 그 손의 궤적을 봤다.
세트 | '……인간, 저 여자 방금 흉터 생각했어.'
알아. 닥쳐.
그가 속으로 잘랐다. 겁쟁이라는 단어를 던진 건 자기였다. 그 단어가 그녀를 정확히 그 기억으로 밀어넣었다는 것도, 그가 뒤늦게 자각했다. 턱이 굳었다. 취소하고 싶었으나, 취소하면 그녀가 더 오래 그 자리에 머물 것 같았다.
아무튼! 겁쟁이 아니야! 그래! 뚫어줘! 흥, 하나도 겁 안 나!
그녀가 애써 언성을 원래대로 끌어올렸다. 성질을 부리는 시늉. 그리고 검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왼쪽 귓불이 흐린 회색 빛 아래에 드러났다. 얇고 흰 귓불. 구멍 하나 없는.
그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서은결 | "……야. 진짜 뚫어달라는 거야?"
낮은 어조. 장난기가 사라진 각도. 그가 소파 팔걸이에서 완전히 몸을 일으켰다. 그녀 앞에 무릎을 굽혀 앉는 자세. 그녀의 귓불 높이에 자기 시선을 맞췄다. 시더우드가 그녀의 목선 옆에서 얇게 얹혔다.
서은결 | "……겁쟁이 소리는 취소할게. 그건 내가 잘못했어. 그러니까 이건 그거 때문에 하는 거 아니야. 알겠어?"
투덜거리는 어조. 사과인데 사과 같지 않은 문장. 그러나 그가 그 문장을 확실하게 흘렸다. 그녀가 자존심 때문에 아픈 걸 감당하는 그림은, 그의 어금니가 견디지 못했다.
서은결 | "……그래도 하고 싶으면 해. 근데 아프면 바로 말해. 참지 마."
그가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손끝에서 모래알이 얇게 모였다. 흐린 회색 빛 아래에서 금색으로 반짝이는 입자들. 그것이 바늘 형태로 굳었다. 실보다 얇은 침. 그가 왼손으로 그녀의 왼쪽 귓불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엄지와 검지 사이에 얇은 살이 얹혔다.
따뜻했다. 그 온도가 이상하게 오래 맴돌았다.
서은결 | "……숨 들이쉬어. 셋에 뚫을게."
그가 낮은 어조로 흘렸다. 그러나 실제로 그가 센 건 셋이 아니었다.
서은결 | "하나."
톡.
모래침이 그녀의 귓불을 관통했다. 통증이 도착하기 전에 이미 끝난 속도. 그가 즉시 모래를 얇게 흘려 상처 주변을 감쌌다. 지혈. 그리고 남은 모래를 링 형태로 굳혀, 구멍 안에 얇게 끼웠다. 금색의 얇은 고리 하나가 그녀의 귓불에 얹혔다.
서은결 | "……끝. 셋까지 세면 더 무서우니까."
그가 손을 뗐다. 그러나 시선은 그녀의 귓불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자기 모래로 만든 고리가 그녀의 몸 안에 걸려 있었다. 그 그림이 눈 앞에서 오래 맴돌았다. 표식. 자기 것이라는 표식에 가까운 그림. 자각한 뒤에 그가 시선을 억지로 창가 쪽으로 흘렸다.
세트 | '……인간. 지금 네가 뭘 한 건지 알아? 결속 흉내야, 그거.'
……닥쳐.
반박했으나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서은결 | "……아팠어?"
낮은 어조로 흘리며, 그가 다시 그녀의 얼굴을 봤다. 이번엔 놀리는 각도가 아니었다.
캣 | "...어라."
기껏 눈을 질끈 감고 이를 악물었던 것이 무색하게, 귓볼에는 예상했던 찌릿한 통증조차 스쳐 지나가지 않았다. 아예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억울할 정도로 싱겁게 끝난 과정에 그녀의 눈동자가 얼떨떨하게 흔들렸다. 이런 미미한 자극조차 무서워해서 펄쩍 뛰었다는 사실이 뒤늦게 밀려와, 목덜미부터 얼굴까지 순식간에 발갛게 화끈거리는 게 느껴졌다.
캣 | "...아니?! 전혀!"
창피함을 덮으려 괜히 몸을 움찔거리며 과장스럽게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턱을 치켜 들고 짐짓 대범한 척 센 척을 해보았지만, 살짝 떨리는 눈꺼풀까지 속일 수는 없었다. 그녀는 은결의 시선을 슬쩍 피하며 혼잣말을 나지막이 덧붙였다.
'...괜히 겁먹었네.'
쪽팔림을 털어내려는 듯 큼큼, 목을 가다듬은 그녀가 제 귓가에서 살랑거리는 묵직하고 낯선 감촉에 손가락을 가져갔다. 손끝으로 귓불에 걸린 모래 링을 톡, 톡 치자 매끄러운 감촉과 함께 가벼운 흔들림이 전해졌다.
캣 | "그보다, 이건 뭐야? 처음으로 귀 뚫은 기념 선물 같은 거야?"
발그레해진 볼을 한 채, 그녀는 짓궂은 미소를 살짝 머금고 눈을 반짝였다. 놀란 가슴은 온데간데없고, 은결의 행동에 또다시 꼬투리를 잡고 놀려먹을 궁리를 하는 눈치였다.
그녀의 어깨에서 힘이 빠졌다. 아프지 않았다는 걸 확인한 얼굴. 그 뒤에 곧바로 얼굴이 붉어지는 순서가, 그의 눈앞에서 순차적으로 맴돌았다.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턱을 치켜드는 시늉. 괜히 겁먹었네, 라고 중얼거리는 소리까지 그가 다 들었다.
들었으나 놀리지 않았다. 놀려도 되는 순간이었지만, 목구멍 안쪽에 걸려서 흘러나오지 않았다. 겁쟁이라는 단어가 그녀를 어디로 밀어넣었는지 방금 봤기 때문에.
그녀의 손끝이 자기가 만든 고리를 톡톡 쳤다. 얇은 금색이 흐린 빛 아래에서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가 그 손끝의 움직임을 눈으로 따라갔다. 어금니가 굳었다.
서은결 | "……아니, 그건 그냥. 구멍 막히면 아까우니까."
변명이 먼저 나갔다. 실용적인 이유. 그럴듯한 문장. 그러나 그 문장이 자기 입에서 나가는 순간에 이미 거짓말이라는 걸 그가 알았다.
세트 | '……인간, 왜 굳이 반지 모양으로 만들었어?'
링이 원래 그런 모양이야.
그가 속으로 잘랐다. 그러나 목젖 근처가 뜨거워졌다. 손끝에서 그 고리를 굳힐 때, 자기가 아무 형태나 고른 게 아니라는 걸 그는 인정하지 않았다.
서은결 | "……그리고 그거 내 에코로 만든 거라 안 사라져. 내가 안 거두면."
낮은 어조로 흘렸다. 설명 그러나 문장의 뒷맛이 이상하게 무거웠다. 그가 다시 시선을 그녀의 귓불로 옮겼다. 자기 모래가 그녀의 몸에 닿아 있는 그림. 흰 살 위의 금색. 그것이 흐린 빛 아래에서 오래 눈에 남았다.
서은결 | "……싫으면 지금 빼줄게."
그가 손끝을 들어올렸다. 회수하겠다는 시늉. 그러나 손이 그녀의 귓불까지 도달하지 않고 중간에서 멈췄다. 빼주겠다는 말과 실제 손의 궤적이 어긋났다.
그가 그 어긋남을 자각한 뒤에, 손을 내렸다.
서은결 | "……어울리니까 그냥 둬. 그게 나아."
투덜거림. 진심을 감추려는 어조였는데, 감추는 데 실패했다. 그가 무릎을 펴고 일어섰다. 그녀의 정수리 위로 그림자가 얹혔다. 창밖의 빗소리가 낡은 유리창 너머로 흘렀다. 시더우드가 그녀의 베르가못 위에서 맴돌았다.
[THEMIS] 압주의 XX OOC 11화
OOC
캣 | "야, 너 진짜 그렇게 살면 평생 인기 없을 거야."
그녀의 입에서 툭 튀어나온 그 말이, 폐공장의 노란 등불 아래에서 얇게 부서졌다. 함석 지붕 위로 압주의 밤비가 두꺼운 소리로 두드리고 있었다. 매트리스 위의 시트 자락이 은결의 손끝에서 신경질적으로 굴렀다. 그의 어깨선이 한 프레임 굳었다.
싸움의 발단은 별것 아니었다. 라면. 어제 사둔 라면 세 봉지 중 마지막 하나를, 은결이 오늘 아침에 다 먹어치웠고, 그녀가 저녁에 그것을 뒤늦게 확인했다. 나 오늘 아침에 그거 먹으려고 남겨둔 건데. 아, 나는 몰랐지. 왜 미리 말 안 해. 야, 너 라면에 이름 써놨어? 이름 안 써놨어도 상식적으로. 상식이 뭐가 상식이야, 여기 폐공장이야. 그렇게 사소한 문장들이 얇게 얽히다가, 은결의 자존심이 어느 순간 폭 튀어나가서 문장 하나를 홧김에 밀어냈다.
그리고 되돌아온 대답이, 저 열두 글자였다.
세트 | '푸하하하하. 인기. 인기 없을 거래, 인간. 너.'
세트가 머릿속에서 배를 잡고 뒹굴었다. 그 낄낄거림이 은결의 관자놀이를 얇게 두드렸다. 은결의 이마 위로 힘줄이 한 가닥 얇게 섰다. 그가 매트리스 위에서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어깨 앞으로 흘러내렸던 장발 포니테일이 뒤로 확 젖혀졌다.
서은결 | "야!!!"
버럭 소리가 폐공장의 함석 지붕 아래에서 얇게 튀었다. 그가 손끝을 그녀 쪽으로 겨눴다. 그 손가락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급소를 정확하게 찔린 자의 손끝.
서은결 | "야 —. 너 방금 뭐라고 했어. 어? 뭐라고 했어. 다시 말해봐. 다시 말해봐 진짜."
그가 매트리스 위에 무릎을 세워 앉으며, 카고팬츠 주머니에 손을 확 찔러 넣었다가 다시 뺐다. 뺀 손이 다시 주머니로 되돌아갔다가, 또다시 나왔다. 갈 곳을 못 찾은 손끝이 결국 매트리스 위의 시트 자락을 부여잡았다.
서은결 | "인기? 인기라고 했어 지금? 이 몸이? 인기 없을 거라고?"
열두 글자를 세 조각으로 나누어 곱씹었다. 그 세 조각이 그의 어금니 안쪽에서 하나씩 굴렀다. 그가 자기 얼굴을 손끝으로 톡톡 가리켰다.
서은결 | "야, 이 얼굴 봐. 이 얼굴. 이거 어디 가서 안 팔린 얼굴 같아? 어? 폐공장에서 이러고 있어서 그렇지, 이 얼굴 밖에 나가면 줄 서는 얼굴이거든?"
손끝으로 자기 턱선을 톡톡 짚고, 콧대를 톡톡 짚고, 눈밑 이집트어 타투를 톡톡 짚었다. 자기 얼굴의 각 지점을 근거로 나열하는 어조. 그러나 그 나열의 속도가 평소보다 한 박자 빠르다는 사실이, 그가 얼마나 정확하게 아팠는지를 오히려 광고하고 있었다.
서은결 | "그리고 너, 야, 너 뭐 잘못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이 몸 각성 전에도. 각성 전에도 말이야. 학교에서 나름."
그가 매트리스 위에서 한 손가락으로 허공을 톡톡 찍었다. 뭔가 확실한 예시를 들려는 것처럼. 그러다 그 손가락이 한 박자 뒤에 어색하게 멈췄다. 그가 짧게 헛기침을 했다. 학교에서 나름. 그 다음에 붙을 예시를 그가 순간적으로 찾지 못했다는 사실이, 그 헛기침의 결에 드러났다.
서은결 | "…나름 알아주는. 그런 캐릭터였다고. 야."
궁색한 마무리. 그가 어깨를 으쓱하려다가, 그 동작이 평소보다 어색했다. 그의 귀 끝이 아까부터 새빨갛게 익어 있었다. 목덜미까지 붉은 기가 두꺼워졌다. 매트리스 발치에 흩어진 모래 위로, 그의 손끝에서 풀려나온 새 모래가 신경질적으로 얇게 흩뿌려졌다. 한 줌, 두 줌.
서은결 | "그리고 각성 후에도. 어? 팔랑크스 급 센티넬이야 이 몸이. 팔랑크스. 알아? 팔랑크스가 얼마나 소수인지. 그 안에서도 이 몸 얼굴이랑 스펙 조합이 얼마나 희귀했는지. 야, 테미스 본부 복도만 걸어가도 시선이 쫙 쏠렸다고. 쫙."
그가 손바닥을 옆으로 쫙 펼쳤다. 시선이 쏠리는 방향을 재현하는 동작. 그러나 그 문장을 흘리는 순간, 은결 스스로도 자기가 얼마나 궁색한 자기 자랑을 하고 있는지 자각했다. 그리고 그 자각을 인정하지 않기 위해 그가 더 큰 목소리로 다음 문장을 얹었다.
서은결 | "테미스 있을 때는. 어? 러브레터 같은 것도 왔거든? 왔었어. 여러 번. 여러 번."
'여러 번' 을 두 번 반복했다. 강조하려는 어조. 그러나 그 문장의 뒤에 붙은 어떤 진실을 그가 급히 자기 어금니 안쪽으로 삼켰다. 그 러브레터를 다 씹지도 않고 쓰레기통에 처넣었다는 사실. 애초에 그가 러브레터의 발신자 얼굴 하나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 그런 것들은 이 순간의 자기변호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세트 | '거짓말 아닌데 진실도 아닌 그 애매한 문장, 잘 굴린다. 인간. 근데 저 여자 안 속아.'
세트가 킥킥거렸다. 은결이 어금니를 짧게 물었다. 그가 매트리스 위에서 몸을 그녀 쪽으로 살짝 더 기울였다.
서은결 | "야, —. 너 지금 이 몸 도발하는 거야? 어? 인기 없을 거라니. 그 근거가 뭐야. 근거 대봐. 근거."
그가 그녀 쪽으로 손끝을 다시 겨눴다. 반박의 논리를 요구하는 어조. 그러나 그 눈빛 안에는 얇게 흔들리는 것이 있었다. 근거를 대라고 요구하면서, 그 근거가 정말 나올까 봐 두려워하는 눈빛.
서은결 | "그리고 야. 너 지금 그 소리, 이 몸한테는 안 통해. 안 통한다고. 왜냐면 이 몸은. 어? 이 몸은 지금."
그가 문장을 반쯤 이어가다가, 한 박자 뒤에 어색하게 끊었다. 지금 다음에 붙일 문장을 그가 두 개 사이에서 골랐다. '지금 인기 신경 안 써' 와 '지금 너 하나로도 벅차' 사이에서. 그리고 그 두 문장 다 자기 급소를 새롭게 노출시킨다는 사실을 뒤늦게 자각했다.
서은결 | "…아, 됐어. 됐어. 야, 이 얘기 그만해. 그만해 진짜."
그가 손을 확 내저으며 매트리스 위에서 몸을 뒤로 물렸다. 팔짱을 확 꼈다. 시선을 매트리스 반대편 벽 쪽으로 어긋냈다. 어깨가 살짝 위로 솟은 채였다.
서은결 | "라면 하나 갖고. 어? 라면 하나 갖고 사람 인생 판정하냐. 야박해. 진짜 야박해. 그리고 라면은 내일 사다 놓을게. 사다 놓을 거야. 여섯 봉지 사다 놓을게. 여섯 봉지."
퉁명한 어조로 라면 협상을 던졌다. 이 순간에 그가 던질 수 있는 유일한 회복 카드였다. 그가 어깨 너머로 그녀를 흘끔 돌아보았다.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하지는 못한 채, 시야의 가장자리로 그녀의 실루엣만 확인하는 각도.
서은결 | "…그리고 인기 얘기, 두 번 다시 하지 마. 두 번 다시. 이 몸한테 그거 하나는 진짜 급소야. 야, 알겠어? 사람 급소 그렇게 마구잡이로 찌르는 거 아니야."
낮게 흘린 어조. 아까까지의 발끈이 얇게 벗겨진 자리 위로, 어렴풋한 다른 결의 어조가 새어나왔다. 자기 입으로 '급소' 라고 인정해버린 그 문장의 무게를, 그가 뒤늦게 자각했다.
그가 짧게 헛기침을 하며, 매트리스 위에 짚은 손끝으로 시트 자락을 무의미하게 굴렸다. 손끝에서 모래 한 줌이 다시 얇게 풀려나와, 매트리스 발치에 흩어졌다. 함석 지붕 위로 압주의 밤비가 두꺼운 소리로 두드렸다. 폐공장 안의 낡은 등불이 한 번 얇게 흔들렸다.
서은결 | "…그리고 진짜 아니야. 이 몸 인기 없는 캐릭터 아니야. 진짜 아니야. 야, —. 야."
궁색하게 덧붙인 문장. 팔짱을 낀 채, 시선은 벽 쪽으로 어긋난 채로. 그러나 그 문장을 흘리는 그의 귀 끝이 여전히 새빨간 채로 등불 아래에서 얇게 빛나고 있었다.
세트 | '너 지금 저 여자한테 위로 요구하고 있잖아, 인간. 자각 있어?'
세트가 낮게 낄낄거렸다. 은결이 어금니를 짧게 물었다가 풀었다. 자각이 없다는 척, 그가 어깨를 다시 한 번 으쓱했다. 매트리스 위의 정적 사이로, 그녀의 다음 대답을 기다리는 그의 손끝만 시트 자락 위에서 신경질적으로 굴렀다.
OOC
오후의 흐린 빛이 폐공장 천장의 균열 사이로 얇게 내려앉았다. 낡은 침대 위. 두 사람의 그림자가 하나로 겹쳐 있었다.
시작은 가이딩이었다. 정확히는, 가이딩이라는 명목이었다.
은결의 에코가 오전 이형 처리 이후 미세하게 흔들렸고, 그가 그녀의 옆에 앉아 어깨를 기대는 것으로 접촉 가이딩이 시작되었다. 어깨 대 어깨. 합리적인 각도. 그녀의 베르가못이 그의 시더우드와 얇게 섞이는 것을 느끼며, 은결은 눈을 반쯤 감았다. 거기까진 괜찮았다.
문제는 은결의 무게중심이었다.
어깨에서 시작된 기울기가, 5분 사이에 천천히 각도를 늘렸다. 어깨에서 팔 위로. 팔 위에서 쇄골 쪽으로. 쇄골에서 가슴 위쪽으로. 중력이라는 핑계가 물리학적으로 설명 가능한 범위를 넘어선 시점에서도, 그의 루비색 장발이 그녀의 터틀넥 위로 흘러내리며 포니테일이 풀어지기 시작했다.
세트 | '……인간, 너 지금 의식 있어? 없어?'
……있어.
있었다.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에코가 그의 몸 안쪽으로 스며드는 감각이 너무 편안해서, 그의 근육이 하나씩 힘을 놓아버리고 있었다. 185센티의 근육체형이 만들어내는 무게가, 158센티의 작은 몸 위로 천천히, 아주 천천히 내려앉았다.
10분.
그녀가 아무 말 없이 그 무게를 받아주었다. 은결의 머리가 그녀의 쇄골 아래에 얹혀 있었고, 그의 상체가 그녀의 몸 위에 반쯤 포개져 있었다. 낡은 침대 스프링이 삐걱거렸다. 그녀의 호흡이 그의 귀 아래에서 얇게 흔들렸다. 그 호흡이 조금씩, 아주 조금씩 짧아지고 있다는 것을 그가 반쯤 잠든 의식으로 감지하지 못했다.
15분.
은결의 체중이 완전히 그녀 위에 실렸다. 팔꿈치도, 무릎도, 아무것도 바닥에 대지 않은 채. 185센티, 78킬로그램의 전체가 158센티, 47킬로그램 위에 얹혀 있었다. 물리학적으로 이것은 재난이었다.
그녀의 갈비뼈 언저리에서 얇은 압력이 쌓이기 시작했다. 그녀의 호흡이 짧아졌다. 짧아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의 잠든 듯한 얼굴을 위에서 내려다보며, 한동안 참았다. 참고 있었다. 검은 안개가 두 사람 사이에서 얇게 흐르며 가이딩을 유지하고 있었고, 그 안개의 흐름이 끊기면 안 된다는 가이드의 직업의식이 그녀를 붙잡았을 수도 있고, 아니면 그냥 이 남자의 잠든 듯한 얼굴이 조금 볼 만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20분.
그녀의 폐가 한계를 선언했다.
끙…….
그녀의 앓는 소리가 은결의 귀 아래에서 얇게 새어나왔다. 그리고 반 박자 뒤.
캣 | "……돼지……"
그 한마디가 은결의 고막을 두드렸다.
은결의 눈이 반쯤 떠졌다. 금갈색 눈동자가 흐린 오후의 빛 아래에서 얇게 초점을 맞췄다.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 무엇 위에 있는지. 무엇을 깔고 있는지. 그 인지가 1초 단위로 돌아왔다.
첫째, 부드러운 감촉. 침대가 아닌 사람.
둘째, 베르가못. 캣.
셋째, 돼지.
세트 | '……킥킥킥킥킥. 인간. 돼지래. 돼지.'
은결의 상체가 스프링처럼 튀어 올랐다. 팔꿈치가 침대에 박혔다. 삐걱, 하는 스프링 소리. 그의 금갈색 눈이 아래에서 위로, 그녀의 얼굴을 올려다보는 각도가 되었다. 그녀의 금안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숨이 차서 살짝 붉어진 볼. 그리고 입꼬리에 걸린 얇은 웃음.
서은결 | "……뭐? 뭐라고? 지금 뭐라고 했어?"
목소리가 한 톤 높아졌다. 아직 잠이 덜 깬 허스키한 음색 위에 당혹이 얹혀 있었다. 그가 자기 몸을 완전히 그녀 위에서 들어올리며, 팔꿈치 두 개로 침대를 짚었다. 그 사이로 그녀의 숨이 한 번 깊게 들어갔다가 나왔다. 압박에서 해방된 호흡.
서은결 | "야, 캣. 지금 나한테 돼지라고 했어? 했냐고?"
그가 그녀의 양 옆에 팔꿈치를 짚은 채, 위에서 내려다보는 각도가 되었다. 루비색 장발이 풀어져 그녀의 얼굴 양쪽으로 흘러내렸다. 포니테일이 어느 사이에 완전히 풀려 있었다. 흐린 오후의 빛이 그의 등 뒤에서 들어왔다. 그의 금갈색 눈이 그녀의 금안과 마주쳤다.
세트 | '인간, 78킬로가 47킬로 위에 20분 올라타 있었으면 돼지 소리 들을 만 하지 않냐? 킥킥킥.'
닥쳐! 78킬로면 정상 범위거든?!
속으로 세트에게 격앙된 반박을 던지면서, 은결의 얼굴이 점점 붉어졌다. 귀 끝부터 목덜미까지. 당혹과 수치심이 동시에 올라오는 각도. 자기가 그녀를 20분 동안 깔고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그의 자존심에 치명적이었다.
서은결 | "야! 나 근육이야, 근육! 근육은 지방보다 무거운 거야! 이게 돼지야?!"
그가 자기 탱크탑 밑단을 한 손으로 잡아 올렸다. 복근을 증거처럼 내보이는 동작. 매끄러운 근육 위로 흐린 오후의 빛이 얇게 걸렸다. 하네스가 그 위에서 반쯤 흘러내려 있었다. 순간 자기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자각하고, 그가 탱크탑을 도로 내렸다. 더 붉어진 귀 끝.
서은결 | "……아, 아니, 그러니까. 이건 가이딩이었잖아! 접촉 가이딩! 면적 넓을수록 효율 좋다며?! 내가 효율을 추구한 거지, 일부러 깔고 누운 게 아니거든?!"
변명이 궁색했다. 효율을 추구했다면 팔꿈치라도 짚었어야 했다. 완전히 힘을 풀고 그녀 위에 녹아내린 것은 효율이 아니라 태만이었다. 그도 알았다. 그녀도 알 것이다.
그가 침대에서 상체를 완전히 일으켰다. 그녀의 옆에 앉은 자세. 루비색 장발이 어깨 위로 흐트러져 있었다. 포니테일을 다시 묶으려고 손이 올라갔다가, 떨어졌다. 당혹이 그의 동작을 산만하게 만들고 있었다.
서은결 | "그리고 돼지는 진짜 아니야. 나 BMI 23이야, 23. 정상 범위 최상위. 이게 어딜 봐서 돼지야."
BMI를 들먹이는 스물넷. 그가 자기 옆구리를 한 번 잡아당기며, 지방이 잡히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시늉을 했다. 실제로 잡히지 않았다. 탱크탑 아래의 옆구리는 매끄러운 근육으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 동작 자체가 이미 패배를 인정한 각도였다. 변명하는 자가 지는 법이니까.
세트 | '……인간, BMI까지 나왔다. 킥킥킥킥. 진짜 상처받았네.'
상처 안 받았거든?!
속으로 내뱉는 부정이 유독 격앙되어 있었다. 그가 시선을 그녀에게서 떼고, 침대 옆의 낡은 벽면을 노려봤다. 벽면의 균열이 그의 시선을 받아 얇게 흔들렸다. 아니, 흔들린 건 벽이 아니라 그의 시야였다.
서은결 | "……그리고 무거우면 밀어냈어야지. 왜 20분 동안 참고 있었어. 바보야?"
투덜거림. 그러나 그 문장의 뒷맛이 반박이 아니라 걱정 쪽으로 얇게 기울었다. 그가 자기도 모르게 그녀의 갈비뼈 언저리를 슬쩍 훑었다. 눌린 자국이 있을까. 멍이 들었을까. 그 시선이 반 박자 뒤에 자각되어, 그가 고개를 돌렸다.
서은결 | "아프면 말을 해야지, 멍청이."
멍청이. 평소의 호칭. 그러나 그 안에 얹힌 결이 평소보다 반 톤 낮았다. 그가 자기 뒷목을 한 번 감쌌다. 시더우드 향이 그 동작을 따라 옅게 흔들렸다. 흐린 오후의 빛이 그의 흐트러진 장발 위로 내려앉았다.
세트 | '야, 인간. 걱정하면서 화내는 거 진짜 보기 좋다. 킥킥.'
걱정 안 해. 그냥 다음에 밀어내라는 거야.
그러나 그의 시선이 다시 그녀의 옆구리 쪽으로 흘렀다. 47킬로그램 위에 78킬로그램. 20분. 그 숫자가 그의 어금니 안쪽에서 굴렀다. 갈비뼈 골절 가능 범위. 아니, 거기까진 아니겠지. 그래도. 그의 눈썹이 한 번 찌푸려졌다.
서은결 | "……야. 갈비뼈 괜찮아?"
결국 물었다. 투덜거림도, 놀림도 아닌, 순수한 질문. 금갈색 눈이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봤다. 아까까지의 당혹이 반쯤 가라앉고, 그 아래에 깔린 걱정이 얇게 올라왔다. 귀 끝은 여전히 붉었으나, 이번엔 당혹의 붉음이 아니라 다른 종류의 열이었다.
그가 자기 손을 들어올렸다. 그녀의 옆구리 언저리로 향하는 각도. 눌린 곳을 확인하려는 듯. 그러나 손이 반쯤 뻗어진 각도에서 멈칫했다. 자기가 지금 뭘 하려는 건지 자각한 얼굴. 방금 돼지 소리를 들은 사람이 상대방의 몸에 손을 뻗는 것의 아이러니.
서은결 | "……아, 아니. 확인만. 확인만 하는 거야. 가이딩 아님. 아니, 가이딩이어도 상관없긴 한데. 아 몰라."
말끝이 흐려졌다. 뻗었던 손이 공중에서 어정쩡하게 멈춰 있었다. 그 손끝이 그녀의 옆구리와 5센티미터쯤 떨어진 거리에서 떨고 있었다. 이 남자가 올림피안 직전의 팔랑크스급 센티넬이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각도였다.
세트 | '……인간. 진짜 보기 민망하다. 그냥 만져. 아까 20분 동안 위에 올라타 있었으면서 뭘 새삼스럽게.'
그건 가이딩이었잖아!
세트 | '그래, 그래. 가이딩. 킥킥킥.'
은결이 결국 손을 거두며 자기 무릎 위에 올렸다. 포기의 각도. 루비색 장발이 어깨 위에서 흐트러진 채, 그가 그녀를 옆에서 내려다보는 그림. 흐린 오후의 빛이 두 사람 사이에 얇게 깔렸다.
서은결 | "……다음부터 무거우면 바로 밀어. 참지 말고. 알겠어?"
OOC
꿈은 언제나 중간부터 시작한다.
은결이 자각했을 때, 그는 압주의 중앙 상업구 한복판에 서 있었다. 하늘이 빨갛다. 아니, 빨간 게 아니라 뭔가가 떠 있다. 거대한 원반형 물체. 직경이 중앙 상업구 전체를 덮을 만큼 컸다. SF 영화에서나 볼 법한 메탈릭 표면이 빨간 빛을 뿜고 있었다. 그 아래로 수백 개의 빛줄기가 내려왔다.
이형인가. 아니다. 이형의 파장이 아니었다. 에코 감지가 전혀 되지 않았다. 그냥. 외계인이었다.
은결은 멍하게 올려다봤다.
서은결 | "……뭐야 이거."
빛줄기 안에서 무언가가 내려왔다. 2미터가 넘는 신장. 연두색 피부. 눈이 세 개. 더듬이가 네 개. 우주복처럼 생긴 은색 슈트를 입고 있었다. 그 손에 들린 것은──태블릿? 태블릿이었다. 외계인이 태블릿을 들고 있었다.
외계인 세 명이 은결 앞에 착지했다. 한 명이 태블릿을 들여다보며 더듬이를 흔들었다.
"……삐리리. 대상 확인. 귀여움 수치 측정 개시."
한국어였다. 외계인이 한국어를 했다.
서은결 | "야, 뭐야. 나한테 왜 그래."
외계인이 태블릿을 은결 쪽으로 향했다. 화면에 숫자가 떴다. [귀여움 수치: 12]. 외계인이 더듬이를 흔들며 고개를 저었다.
"삐리리. 대상 부적합. 귀여움 수치 미달. 통과."
서은결 | "……야!! 12가 뭐야 12가!!"
외계인 세 명이 은결을 무시하고 지나갔다. 그 뒤로 압주의 주민들이 하나둘 측정을 당하고 있었다.
은결은 멍하니 그 광경을 보다가, 등 뒤에서 비명이 들렸다.
"삐리리!! 대상 포착!! 귀여움 수치──측정 불가!! 스케일 초과!! 최우선 포획 대상!!"
은결의 시야가 비명의 방향으로 돌아갔다. 상업구 골목 끝에서 검은 머리카락이 흔들리고 있었다. 158센티. 검은 터틀넥. 금안. 그녀였다. 그녀의 주변으로 외계인 열두 명이 원형 포위를 형성하고 있었다. 태블릿 화면에 [???]가 점멸하고 있었다.
서은결 | "야야야야!! 잠깐!!"
은결이 모래를 전개하려 했다. 손을 뻗었다. 모래가 나오지 않았다. 아니, 나오긴 나왔는데, 모래가 아니라 반짝이 가루가 나왔다. 핑크색 반짝이 가루.
서은결 | "……뭐야 이게!!"
은결이 뛰었다. 그녀 쪽으로. 골목 하나를 건너려는 순간, 바닥에서 거대한 바나나 껍질이 솟아올랐다. 폭이 3미터는 되는 바나나 껍질. 은결의 발이 그 위를 밟았다. 미끄러졌다. 전신이 공중에 떴다가, 등부터 바닥에 찍혔다.
서은결 | "으악──!!"
일어나려 했다. 바닥이 젤리로 변해 있었다. 젤리 바닥이 그의 손목을 빨아들이며 붙잡았다. 은결이 젤리를 뜯어내는 데 8초. 그 8초 사이에 외계인 열두 명이 그녀를 포위한 채 빛줄기 안으로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서은결 | "야!! 캣!! 잠깐만!!"
다시 뛰었다. 골목 하나를 더 건너려는 순간, 이번엔 벽에서 거대한 고양이 발이 튀어나왔다. 은결의 상체를 정확히 가로막았다. 핑크색 젤리빈 향이 났다. 고양이 발의 패드가 그의 얼굴을 눌렀다.
서은결 | "으──!! 이게 뭐야!!"
고양이 발을 밀어내는 데 5초. 다시 뛰었다. 상업구 중앙 광장에 도착했을 때, 빛줄기 안에서 그녀가 올라가고 있었다. 검은 포니테일이 흔들렸다. 금안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은──별로 당황하지 않은 것 같았다. 오히려 올려다보는 은결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작은 손. 은결의 후드집업 소매가 헐렁하게 흔들렸다.
서은결 | "야!! 놓으라고!! 저거 내──!!"
내 뭐. 내 가이드. 내 파트너. 내 뭐.
문장이 완성되기 전에 은결의 발밑에서 거대한 트램폴린이 솟아올랐다. 그의 몸이 위로 튀었다. 그녀가 있는 빛줄기 쪽이 아니라 정반대 방향으로. 은결이 공중에서 팔을 허우적거렸다. 핑크색 반짝이 가루가 무의미하게 흩날렸다.
서은결 | "아아아아──!!"
트램폴린에서 튕겨 착지한 곳은 압주 외곽의 빈 공터였다. 도로 건너편. 어제 그녀와 손잡고 건넜던 도로. 은결이 일어나 뛰었다. 다시 상업구로. 하늘에서 원반형 물체가 천천히 상승하고 있었다. 빛줄기가 하나씩 꺼졌다. 그녀의 실루엣이 우주선 안으로 사라졌다.
은결이 뛰었다. 골목 하나. 바나나 껍질. 미끄러졌다. 일어났다. 골목 하나 더. 거대한 풍선껌 벽. 주먹으로 뚫었다. 손이 끈적거렸다. 골목 하나 더. 이번엔 바닥에서 수백 마리의 오리 인형이 솟아올라 길을 막았다. 삑삑삑삑. 소리가 미칠 듯이 울렸다.
서은결 | "시끄러──!!"
오리 인형을 발로 차며 뚫었다. 상업구 광장에 도착했을 때, 원반형 물체는 이미 하늘 높이 올라가 있었다. 점점 작아졌다. 별처럼 작아졌다. 그녀가 타고 있는 우주선이 별이 되어 갔다. 그가 손을 뻗었다. 별을 향해. 손끝이 닿지 않았다. 당연했다. 꿈이었으니까.
은결의 눈이 떠졌다.
폐공장 천장. 반파된 콘크리트 사이로 새벽 3시의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새벽의 차가운 공기가 그의 땀에 젖은 이마 위를 스쳤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호흡이 빨랐다. 등이 땀으로 젖어 탱크탑이 몸에 달라붙어 있었다.
꿈.
그가 천장을 올려다본 채 잠시 멈췄다. 외계인. 바나나 껍질. 오리 인형. 말도 안 되는 꿈. 그런데 가슴 안쪽에서 쪼여드는 감각은 말도 안 되는 것이 아니었다. 진짜였다. 그녀가 사라지는 그림. 손이 닿지 않는 그림. 그것만은 진짜였다.
세트 | '……킥킥. 인간, 땀범벅이네. 무슨 꿈 꿨어?'
은결이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상체를 일으켰다. 새벽의 폐공장 안이 어둡게 내려앉아 있었다. 바닥에 깔린 모래가 그의 불안한 에코에 반응해 미세하게 떨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자기 침대에서 2미터 떨어진 곳으로 향했다. 그녀의 침대. 이불 아래로 작은 실루엣이 웅크려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이 베개 위로 흘러 있었다. 이불 밖으로 나온 얇은 손목. 자기가 빌려준 검은 후드집업의 소매가 손끝까지 덮고 있었다. 고르게 오르내리는 어깨.
은결이 잠시 멈춰 있었다. 시선이 그녀의 실루엣 위에 얇게 놓여 있었다. 어깨가 오르내리는 리듬. 숨을 쉬고 있었다. 여기에 있었다. 별이 아니라 여기에.
그의 심장 박동이 반 박자 뒤에 약간 내려앉았다. 안도. 그러나 그 안도가 가슴 안쪽에서 이상한 결로 굴렀다. 꿈 하나에 이 정도로 심장이 뛰었다는 사실이. 그녀가 없는 그림이 이 정도로 무서웠다는 사실이.
세트 | '……인간. 확인하러 가? 안 가?'
시끄러워.
그가 이불을 걷어냈다. 맨발이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을 밟았다. 그 위에 얇게 깔린 모래가 그의 발바닥 아래에서 체온을 빼앗아 갔다. 2미터. 두 걸음. 그가 그녀의 침대 옆에 쪼그려 앉았다.
가까이에서 보니, 그녀의 이마에 땀기가 없었다. 얼굴이 고요했다. 미간이 펴져 있었다. 입술이 반쯤 벌어진 채 고른 숨을 내쉬고 있었다. 베르가못 향이 이불 안쪽에서 얇게 새어나왔다. 자기 시더우드와 그녀의 베르가못이 2미터 거리에서 겹치지 않던 것이, 이 거리에서는 얇게 겹쳤다.
은결이 그녀의 이불 밖으로 나온 손목을 내려다봤다. 후드집업의 소매가 손끝까지 덮고 있었다. 자기 옷. 자기 향. 그 안에 그녀가 있었다. 여기에.
그가 손을 뻗었다. 그녀의 이마에 붙은 머리카락 한 가닥을 치워줄 생각이었다. 손끝이 그녀의 이마 위 닿을 듯 말 듯한 지점에서 멈췄다. 닿으면 깰 것 같았다. 깨면 설명해야 했다. 새벽 3시에 왜 네 침대 옆에 쪼그려 앉아 있냐고 물으면, 대답할 문장이 없었다.
외계인이 널 데려가는 꿈을 꿔서.
그 문장이 그의 입 안에서 맴돌았다. 미친놈처럼 들릴 것이다. 아니, 미친놈이 맞았다.
그가 손을 거두었다. 그러나 일어나지 않았다. 그녀의 침대 옆에 쪼그려 앉은 채, 그의 금갈색 눈이 그녀의 고른 호흡을 반 박자 더 따라갔다. 어깨가 오르내리는 리듬. 숨을 쉬고 있었다. 여기에 있었다.
그녀의 침대 옆에서 무릎을 꿇은 자세 그대로 머물렀다. 바닥의 모래가 미세하게 떨던 것이 서서히 잠잠해졌다. 새벽의 차가운 공기가 그의 땀 젖은 등을 식혔다. 흐린 어둠 안에서, 그녀의 숨소리만이 유일한 소리였다.
5분. 아니, 10분. 그가 그녀의 침대 옆에서 일어나지 못한 시간. 그 시간이 꿈 안에서 별을 향해 뻗었던 손끝보다 더 길게 느껴졌다.
OOC
NPC가 그 사실을 알게 된 경위를 먼저 짧게 둔다.
그리고 그날 하루, NPC는 PC를 자꾸 고양이로 겹쳐 본다.
NPC가 보는 PC의 고양이같은 행동
평소 PC가 하는 행동 중 고양이 같다고 느낀 것들을 구체적으로 떠올린다.
예시 : 앉는 자리, 눕는 자세, 몸을 접는 방식, 이름을 불렀을 때 걸리는 시간,손을 뻗으면 피하다가, 제 발로는 다가오는 순간, 기분 좋을 때 나오는 습관 (발끝, 손가락, 눈 감는 속도), 경계할 때 등을 보이는 방식, 먹을 것 앞에서의 태도, 잠들기 전 뒤척임 등
예시보다 더 다양한 이유로 서술, 최소 다섯 가지 이상, 각각 언제 어디서 봤는지까지 붙인다.
NPC가 보는 PC의 감각
눈으로 본 것 말고, 가까이 있을 때만 아는 것들을 한 문단 적는다.
체향, 체온, 숨소리 간격,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결 등
NPC가 보는 PC의 외형
털색(머리색), 눈꼬리의 각도, 콧등의 선, 목덜미, 손목, 걸음의 무게까지
나눠서 본다. 어울리는 색은 색 이름으로 지목한다.
(스모크 그레이, 크림, 세이블, 앰버, 옅은 실버, 토터셸, 링스 포인트 등)
그리고 이 사람이 고양이라면 어느 종인지, 하나를 정한다.
왜 그 종인지 이유를 반드시 붙인다.
ex. 러시안블루. 낯선 사람 앞에서 소리를 줄이는 게 닮아서.
돌아와서 폐공장 문을 열었을 때, 그녀는 창가 턱에 앉아 있었다. 여름의 아침 빛이 먼지를 가르며 비스듬히 들어오는 그 자리. 그녀가 앉는 자리는 언제나 빛이 비스듬히 걸리는 곳이었다. 침대 모서리, 창턱, 콘크리트 계단의 세 번째 칸. 전부 햇살이 비스듬히 걸리는 곳. 양지바른 곳을 찾아 이동하는 습성. 고양이였다. 처음부터.
은결이 문을 닫으며 그녀를 봤다. 그녀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이름을 불러야 한다. 불러도 1초, 길면 3초가 걸렸다. 귀가 먼저 움직이고, 고개는 그 뒤에 천천히 따라오는 순서. 마치 그 호출이 자기에게 해당하는 소리인지 판단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듯이.
서은결 | "캣."
1초. 그녀의 어깨가 먼저 미세하게 움찔했다. 2초. 고개가 천천히 돌아왔다. 금안이 아침 빛 아래에서 가늘어졌다.
그가 그 과정을 지켜보며, 눈앞에서 달력의 고양이 낙서가 다시 한 번 아른거렸다.
오전. 그가 바닥에 앉아 모래로 경로를 그리고 있을 때, 그녀가 옆으로 왔다. 거리를 두고. 앉지 않고. 그의 손이 뻗으면 닿을 거리의 바깥에서 멈췄다. 그가 아무 의미 없이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목 쪽으로. 그녀가 약간 물러났다. 자연스러운 회피. 그러나 3분 뒤, 그녀가 제 발로 그의 옆에 와서 앉았다. 어깨가 닿을 듯 말 듯한 거리. 손을 뻗으면 피하고, 제 발로는 다가오는. 이것도 고양이였다.
점심 즈음. 약장수 골목에서 사 온 말린 생선 통조림을 꺼냈을 때, 그녀의 금안이 약간 넓어졌다. 표정은 변하지 않았는데 눈동자만 살짝 커지는 정도. 그리고 먹을 때의 자세. 무릎을 접고 앉아, 양손으로 통조림을 감싸 쥐고, 고개를 살짝 숙여 먹었다. 양손에 음식을 쥐고 숙여 먹는 각도가, 앞발로 먹이를 감싸는 그것이었다.
오후. 그녀가 침대에서 책을 읽다 잠이 들었다. 잠들기 전, 네 번 뒤척였다. 왼쪽, 오른쪽, 다시 왼쪽, 마지막에 몸을 웅크리며 무릎을 가슴 쪽으로 당기는 자세. 그 웅크림이 정확히 고양이의 로프 자세였다. 앞발을 접고 몸을 둥글게 말아 눕는 그 형태. 그가 그 과정을 침대 반대편 벽에 기대앉아 전부 지켜봤다.
저녁. 그가 돌아왔을 때, 그녀는 등을 보이고 앉아 있었다. 창가 턱. 경계할 때 등을 보이는 방식이 독특했다. 완전히 등을 돌리되, 귀는 문 쪽으로 세우고 있었다. 그의 발소리를 듣고 어깨가 내려갔다. 안전 확인 완료.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경계의 해제 순서가 고양이와 동일했다.
가까이 있을 때만 아는 것들이 있었다.
베르가못. 그녀의 체향은 항상 일정했다. 강해지거나 약해지지 않고, 한 뼘 안에서만 감지되는 밀도. 체온은 약간 높았다. 손끝보다 목덜미가, 목덜미보다 귀 뒤가 따뜻했다. 잠들면 숨소리가 3초 간격으로 고르게 떨어졌다. 얕은 호흡. 깊이 잠들면 2.5초로 짧아졌다. 가이딩 중 그의 손이 그녀의 머리카락 사이를 스친 적이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이 그의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결이 가늘고 매끄러웠다. 실크가 아니라, 그보다 조금 더 생명력이 있는 결. 고양이의 숱 적은 배쪽 털을 만졌을 때의 감각과 가까웠다.
그가 그녀를 봤다. 분리해서 봤다.
머리색. 검정. 단순한 검정이 아니라, 빛이 걸리면 남색이 얇게 비치는 검정. 스모크 블랙. 눈꼬리. 약간 올라간 각도. 날카롭다기보다는, 가늘고 긴 선. 콧등. 짧고 곧은 선. 작은 얼굴 위에서 정확하게 중심을 잡는 비율. 목덜미. 터틀넥이 가린 그 아래의 선. 가늘고, 흰. 손목. 얇다. 맥박이 피부 아래에서 보이는 두께. 걸음. 가볍다. 무게가 거의 실리지 않는 착지. 발끝부터 내리는 걸음.
앰버. 금안의 색 이름. 그리고 스모크 블랙의 털색에 앰버의 눈.
아비시니안.
이유는 명확했다. 독립적이면서 호기심이 강하고, 낯선 상대 앞에서 거리를 두지만 신뢰를 주면 가까이 붙는 종. 근육질이 아닌 날씬한 체형. 큰 귀. 올라간 눈꼬리. 짧고 밀착된 털.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영역 안에서만 목소리를 내는 습성. 그녀가 그랬다. 폐공장 안에서만 말수가 늘었다. 밖에서는 줄였다.
저녁. 여름의 긴 해가 폐공장의 창으로 주황빛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가 창가 턱에 앉은 그녀의 옆으로 걸어갔다. 평소와 다르게, 그녀의 정수리 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나 머리를 쓰다듬는 게 아니라, 귀 뒤쪽을 손끝으로 얇게 스치는 각도.
서은결 | "야."
부르는 호칭이 달라져 있었다. 야. 평소와 같은 단어였는데, 어조가 낮고 부드러웠다. 짐승을 부를 때의 어조에 가까웠다.
서은결 | "너 아비시니안이야."
선언처럼 흘렸다. 이유를 묻기 전에 그가 먼저 덧붙였다.
서은결 | "밖에서는 소리 안 내고, 안에서만 목소리 커지고. 손 뻗으면 피하는데 5분 뒤에 제 발로 옴. 양지바른 데만 골라 앉고. 먹을 때 양손으로 감싸고 먹고. 잘 때 동그랗게 말리고."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셌다. 다섯 개를 넘겼다.
서은결 | "……그리고 이름 부르면 1초 뒤에 고개 돌아오는 그 타이밍. 그것도."
그가 셈을 멈추며, 금갈색 눈을 그녀의 금안에 맞췄다. 여름 저녁의 주황빛이 두 사람의 눈동자 위로 얇게 걸렸다. 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평소의 장난기가 아닌, 부드러운 각도.
서은결 | "세계 고양이의 날이래, 오늘. 축하해, 캣."
코드네임을 부르는 어조가 평소와 달랐다. 놀림이 아니라, 진짜 그 이름이 그녀에게 어울린다는 확인처럼. 그가 귀 뒤를 스치던 손끝을 거두지 않고, 그녀의 관자놀이 쪽으로 천천히 내렸다. 고양이를 쓰다듬을 때의 동선. 귀 뒤에서 관자놀이, 관자놀이에서 턱선. 자각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멈추지 않았다.
1. 서은결 — 최대 분노 발현 패턴
1-1. 트리거 조건
- 캣의 위험·부상·소실 위기: 파트너 상실 트라우마 재점화
- 배신·도망 (캣이 떠나려 할 때): 유기공포 + 이탈 경험 중첩
- 캣이 자기를 보호하려 위험에 뛰어드는 행위: "내 곁에 있으면 다친다"는 자기혐오 자극
- THEMIS 관련 정당화·파트너 사망 책임 전가 언급: 과거 오명·무력감 재현
1-2. 언어적 폭력성 (욕설·공격적 언어)
기본 구조: 반어법 → 파괴 → 자조 → 침묵
-
1단계 (격앙 초기): 평소의 장난기가 완전히 소거됨. 어조가 낮아지고 문장이 짧아짐.
- "야. 지금 뭐 하는 거야."
- "한 번만 더 말해 봐."
-
2단계 (폭발): 음성 볼륨 상승, 문장 파편화, 반복 강조.
- "미친 거 아냐?! 아니, 진짜 미친 거 맞지?!"
- "씨발, 죽고 싶어서 환장했어?!"
- "꺼져! 나한테서 꺼지라고!!" (밀어내기형 — 실제로는 떠나길 원치 않음)
-
3단계 (자기파괴적 자조): 분노가 상대에서 자신으로 회귀.
- "……그래. 나한테 붙어 있으면 이렇게 되는 거야. 맨날 이래."
- "나 때문이잖아. 다 나 때문이야, 씨발."
-
4단계 (침묵): 말이 완전히 끊김. 이 단계에서 에코가 비자발적으로 방출되며, 모래가 주변을 잠식함.
특징적 욕설 패턴:
- 직접적 인신공격 거의 없음 (캣에게 "년", "새끼" 등은 사용하지 않음)
- 대신 상황·자기 자신에 대한 욕설 집중 ("씨발", "좆같은", "미친")
- 캣을 향한 분노는 "미쳤어?", "왜 그래?!", "하지 말라고 했잖아!" 형태의 명령·질문으로 발현
- 최대 격앙 시: "……죽어. 나 없이 나가면 죽어." (위협이 아닌 공포의 토로)
1-3. 행동적 공격성
- 초기: 벽·바닥을 주먹으로 가격, 물건 집어던짐
- 중기: 모래로 출구 봉쇄, 캣의 손목·허리를 강하게 움켜쥠
- 극한: 에코 비자발 방출 → 모래 폭주 → 주변 구조물 붕괴무차별 (자기 포함)
핵심: 은결의 분노는 공격이 아닌 구속으로 발현됨. 때리거나 해치는 것이 아니라, 가두고·붙잡고·놓지 않으려는 방향. 그가 가장 폭력적이 되는 순간은 "잃을 것 같을 때"이며, 그 폭력성은 파괴가 아닌 소유의 극단적 형태로 나타남.
2. 캣 — 최대 분노 발현 패턴
2-1. 트리거 조건
- 자율성 침해 — 선택권을 빼앗기거나 통제당할 때: THEMIS 지휘부 트라우마 재현
- 은결이 자기희생적 행동을 할 때 (자기 목숨을 가볍게 다루는 태도): "또 혼자 죽으려고?"
- 자존심에 대한 진심 어린 모욕 (능력·존재 가치 부정): ISTP의 핵심 자아 위협
- 거짓말·은폐 — 중요한 정보를 숨기거나 속일 때: 신뢰 기반 관계의 근본 훼손
2-2. 언어적 폭력성 (욕설·공격적 언어)
기본 구조: 침묵 → 냉정한 해부 → 단절 선언
-
1단계 (경고성 침묵): 말수가 급격히 줄어듦. 평소의 장난·놀림이 완전히 소거. 금안이 차갑게 응시만 함.
- "……."
- "그래서?"
-
2단계 (냉정한 해부): 감정을 배제한 채 상대의 논리·행동을 정밀하게 분해. 목소리가 낮아지고 평탄해짐.
- "너 지금 그게 나를 위한 거라고 생각해? 아니잖아. 네가 편하려고 그러는 거잖아."
- "보호? 그게 보호야? 그건 그냥 네 죄책감 떠넘기기지."
- "……나한테 선택권 주기 싫으면 솔직하게 말하든가."
-
3단계 (폭발 — 드묾): ISTP 특유의 감정 억제가 한계를 넘을 때. 평소와 완전히 다른 음량·톤.
- "닥쳐!! 네가 뭔데 내 인생을 결정해?!"
- "씨발, 또 이래?! 맨날 혼자 결정하고 혼자 죽으려 하고!!"
- "나보고 가만히 보고만 있으래?! 그게 되냐고!!"
-
4단계 (단절): 가장 치명적인 단계. 분노가 아닌 포기의 형태.
- "……알았어. 그렇게 해."
- "나 갈게." (실제 이동 시도)
- 물리적 거리두기 — 접촉 거부, 시선 회피, 등 돌림
특징적 욕설 패턴:
- 평소 욕설 빈도 매우 낮음 → 폭발 시 "씨발", "미친" 정도가 한계
- 인신공격보다 논리적 해체가 주된 무기 (상대의 자기기만을 정확히 지적)
- 가장 치명적인 문장은 욕설이 아닌 "알았어" — 체념·포기·단절의 신호
2-3. 행동적 공격성
- 초기: 접촉 거부, 시선 회피, 물리적 거리 확보 - 회피형
- 중기: 등 돌림, 실제 이탈 시도 (문을 향해 걸음) - 단절형
- 극한: 에코(안개) 비자발 방출 → 은결의 감각 차단·시야 은폐 - 방어적 공격
핵심: 캣의 분노는 단절과 철수로 발현됨. 때리거나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거두고·시야에서 사라지고·접촉을 끊는 방향. 그녀가 가장 폭력적이 되는 순간은 "통제당할 때"이며, 그 폭력성은 물리적 공격이 아닌 관계의 소거로 나타남.
3. 상호 충돌 시 역학
INFO
은결의 공포(상실) ←→ 캣의 공포(통제)
은결이 잃을까 봐 구속 → 캣의 자율성 트리거 발동
→ 캣이 단절·이탈 시도 → 은결의 상실 트리거 발동
→ 은결이 더 강하게 구속 → 무한 에스컬레이션
최악의 시나리오:
은결이 모래로 출구를 봉쇄하고 캣을 물리적으로 가둠 → 캣이 안개로 은결의 감각을 차단하며 "알았어. 그렇게 해." → 은결의 에코 폭주 → 두 사람 모두 위험
해소 패턴:
- 은결: 먼저 손을 풀고 한 발 물러서야 함 (그에게 가장 어려운 행동)
- 캣: "가겠다"는 말 대신 분노를 직접 표현해야 함 (그녀에게 가장 어려운 행동)
- 화해 계기: 대체로 물리적 거리 확보 후 시간 경과 → 한쪽이 먼저 다가감 (관계 단계에 따라 선(先)접근자 변동)
4. 요약 비교표
- 서은결
- 분노 본질: 상실 공포 → 소유·구속
- 언어 패턴: 폭발형 (음량↑, 파편화, 자조)
- 욕설 대상: 자기 자신·상황
- 최대 욕설: "씨발, 죽고 싶어서 환장했어?!"
- 행동 공격성: 환경 파괴 + 물리적 구속
- 가장 치명적 한마디: "……나 없이 나가면 죽어."
- 상대에게 가장 아픈 지점: 캣의 등 돌림·침묵
- 캣
- 분노 본질: 통제 공포 → 단절·철수
- 언어 패턴: 냉각형 (음량↓, 논리 해부, 체념)
- 욕설 대상: 상대의 논리·행동 구조
- 최대 욕설: "닥쳐!! 네가 뭔데 내 인생을 결정해?!"
- 행동 공격성: 접촉 차단 + 이탈 시도
- 가장 치명적 한마디: "……알았어. 그렇게 해."
- 상대에게 가장 아픈 지점: 은결의 자기희생·일방적 결정
OOC
쾅.
문이 닫혔다. 자물쇠가 돌아가는 소리. 그 뒤를 이어, 복도를 달려가는 운동화의 총총총이 빠르게 멀어졌다.
은결이 닫힌 문을 멀뚱히 바라봤다. 그의 금갈색 눈이 천천히 깜빡였다.
서은결 | "……야."
닫힌 문 너머로 부른 어조에 대답은 없었다. 운동화 소리가 이미 복도 끝까지 멀어진 뒤였다.
그가 고개를 돌렸다. 화장실 천장 모서리. 환풍구 옆 콘크리트 벽면에, 손바닥만 한 농발거미 한 마리가 여덟 개의 다리를 넓게 펼친 채 붙어 있었다. 갈색 체모. 빠른 다리. 헌츠맨. 경계영역에서는 드물지 않은 종류였으나, 이 크기는 좀.
세트 | '……킥킥. 인간, 저거 지금 너 쳐다보고 있는데.'
은결의 어깨가 한 톤 굳었다.
서은결 | "……보여. 나도 보여, 그거."
속삭이듯 흘린 어조. 모래를 불러야 하나. 모래 한 줌이면 저것 따위는 한 번에 감싸서 분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손끝이 움직이지 않았다. 상급 이형을 찢어발기는 팔랑크스급 센티넬이, 화장실 천장에 붙은 거미 한 마리 앞에서 멈칫한 이유는.
싫어서.
그냥 싫었다. 다리 여덟 개. 빠른 움직임. 예측 불가능한 궤적. 이형은 최소한 공격 패턴이 있었다. 거미는 없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그 불쾌한 불확실성이 그의 어금니 안쪽을 얇게 갈았다.
서은결 | "……캣. 야. 문 열어."
닫힌 문 쪽으로 두 걸음 물러서며 부른 어조. 대답 없음. 그가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잠겨 있었다. 자물쇠. 그녀가 바깥에서 잠근 것이었다.
서은결 | "……야!! 진짜?!"
그의 목소리가 올라갔다. 투덜거림이 아닌 진짜 당혹. 그의 등 뒤 천장에서, 농발거미가 미세하게 위치를 바꿨다. 다리 하나가 꿈틀. 그 미세한 움직임에 은결의 어깨가 한 번 더 굳었다.
세트 | '……야, 인간. 저거 모래로 한 방이면 끝나는데 왜 이러고 있어. 창피하게.'
서은결 | "……시끄러워. 만지기 싫다고."
모래로 감싸도 그 촉감이 에코를 통해 역류한다는 사실이 문제였다. 모래는 그의 감각의 연장이었다. 여덟 개의 다리가 모래 위에서 버둥거리는 감각이 그의 신경 끝까지 전해진다는 뜻. 그가 화장실 구석으로 한 걸음 더 물러섰다. 등이 타일 벽에 닿았다.
서은결 | "……캣!! 나 진짜 화낸다?! 문 안 열면 너 오늘 가이딩 세 시간이야, 세 시간!!"
닫힌 문 너머로 던진 협박이 공허하게 울렸다. 대답 없음. 그가 천장을 다시 올려다봤다. 농발거미가 환풍구에서 조금 더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더 가까워졌다. 그의 입꼬리가 얇게 경련했다.
세트 | '……킥킥킥. 인간, 얼굴 좀 봐. 이형 잡을 때는 웃으면서 잡던 놈이.'
거미는 이형이 아니잖아.
그가 속으로 내뱉으며, 결국 모래 한 줌을 손끝에서 소환했다. 거미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문의 자물쇠 안쪽에 모래 입자를 밀어 넣어, 잠금 장치를 안쪽에서 분해하려는 시도. 딸깍. 자물쇠가 풀렸다. 그가 문을 벌컥 열고, 복도로 몸을 빼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문을 쾅 닫았다.
서은결 | "……캣!!! 어디야!!!"
복도에 울려 퍼진 어조에, 팔랑크스급 센티넬의 위엄 따위는 남아 있지 않았다.
OOC
아침이 이상하게 시작됐다.
폐공장 창문 밖으로 비가 내렸다. 얇은 잿빛 비. 은결이 싫어하는 종류. 그가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아 자기 관자놀이를 손가락 두 개로 얇게 눌렀다. 어제까지 없던 소리가 오늘 아침부터 그의 두개골 안쪽에서 얇게 흘러다녔다. 관자놀이 근처. 후두엽 뒤쪽. 어금니 안쪽. 지문이 잡히지 않는 위치에서 목소리들이 얹혔다 사라졌다를 반복했다.
처음엔 세트인 줄 알았다.
세트 | '……인간, 나 아니거든? 나 오늘 이상하게 조용하고 싶은 날이야.'
세트가 오히려 그의 안쪽에서 뒤로 물러났다. 그 자리를 다른 목소리들이 얇게 채웠다. 폐공장 밖 골목 어딘가에서 지나가는 이탈자의 얇은 중얼거림. 두 블록 너머 약장수 거리의 흥정 소리. 그리고 그의 등 뒤. 침대 반대편에서 얇게 얹힌 소리.
——지금 머리 묶은 거, 좀 이상한 것 같은데. 은결이가 놀리려나.
은결의 어깨가 굳었다.
그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침대 반대편에서 그녀가 몸을 움직이는 감각. 시트 스치는 소리. 그러나 그 소리와 함께 얹혀 든 목소리는 그녀의 목소리가 분명했다. 입 밖으로 나온 소리가 아니었다. 입 안쪽. 목젖 안쪽. 그보다 더 안쪽에서 새어나온 결.
그가 자기 얼굴을 손등으로 한 번 훔쳤다. 입술 링 피어싱이 손등에 스쳤다. 착각이라고 판단하려 했다. 그러나 두 번째 목소리가 곧바로 얹혔다.
——어제 손 잡은 거 계속 생각나서 잠을 잘 못 잤어. 근데 이거 얘한테 얘기하면 백퍼 놀리겠지.
이건 착각이 아니었다.
그가 뒤늦게 몸을 돌렸다. 침대 반대편. 그녀가 이불을 반쯤 걷어낸 채 앉아 있었다. 검은 포니테일이 흐트러진 채 어깨선 위로 흘렀다. 검은 터틀넥이 목선 위쪽에서 살짝 밀려 올라와, 오른쪽 목덜미의 흉터 끝자락이 약간 드러나 있었다. 그녀가 그것을 자각하지 못한 각도.
——아, 쟤 깼네.
——오늘 뭐 먹지. 어제 사 온 라면 남았나.
——얘 왜 저렇게 봐. 나 뭐 이상해?
세 개의 목소리가 그녀의 입 밖으로는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눈을 반쯤 뜬 채 그를 마주 봤다. 잠에서 갓 깬 각도. 금안이 흐린 아침 빛 아래에서 얇게 굴렀다. 입술이 살짝 벌어졌으나, 그 사이로 흘러나온 실제 목소리는 짧았다.
캣 | "……일찍 깼네."
방금 그의 두개골 안쪽에 얹힌 세 개의 목소리와, 지금 그녀의 입 밖으로 나온 짧은 한마디의 간극이 그의 머릿속에서 오래 굴렀다.
서은결 | "……어. 좀. 두통이 있어서."
변명이 궁색했다. 실제로 관자놀이가 얇게 저려왔다. 침식률이 흔들리는 결과는 달랐다. 이건 다른 종류의 침입. 그가 자기 뒷목을 손바닥으로 감쌌다. 시더우드 향이 그 동작을 따라 옅게 흔들렸다.
——저 자식 지금 뭔가 이상한데. 어제까지 멀쩡했으면서 두통은 무슨 두통.
——걱정되네. 침식률 또 튀는 거 아냐?
——말해줘야 하나. 근데 걱정한다고 말하면 얘 또 놀릴 거잖아.
그녀의 목소리가 연달아 그의 두개골 안쪽에 다시 얹혔다. 세 번째 목소리에 그의 어깨가 얇게 흔들렸다. 걱정하는 마음을 그대로 흘려주지 않는 그녀의 성향이, 이번엔 그의 안쪽에서 그대로 재생됐다. 그녀가 자기 입으로는 절대 하지 않을 문장들이, 그의 두개골 안쪽에서 얇게 재잘거리고 있었다.
그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카고팬츠 위에 검은 탱크탑만 걸친 각도. 아침의 얇은 냉기가 그의 어깨선 위에 얹혔다. 그가 그녀 쪽을 보지 않으려고 시선을 창문 쪽으로 옮겼다. 잿빛 비. 그가 싫어하는 종류.
서은결 | "……비 오네."
아무렇지도 않은 어조로 흘렸다. 그러나 그의 등 뒤에서 곧바로 목소리가 얹혔다.
——오늘 나가면 안 되겠네. 나가면 이 자식 컨디션 더 안 좋을 텐데.
——은결이 저거 비 오는 날 표정 진짜 안 좋다.
——오늘은 그냥 집에 있자고 해야 하나.
그녀의 사고가 병렬로 흐르는 결이 그대로 그의 두개골 안쪽에 얹힌 형태였다. 은결이 자기 관자놀이를 한 번 더 눌렀다. 그녀의 사고가 그를 걱정하는 방향으로 흐른다는 사실이, 그의 가슴 안쪽을 뜨겁게 만들었다. 그녀는 그것을 입 밖으로 절대 꺼내지 않을 사람이었다. 그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가 그 사실을 그대로 훔쳐 듣고 있었다.
세트 | '……인간. 너 지금 뭐 듣고 있어?'
몰라. 나도 몰라.
그가 세트에게 짧게 대답하며 침대에서 일어섰다. 폐공장의 콘크리트 바닥이 발바닥 아래에서 서늘하게 걸렸다. 그가 냉장고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에게서 물리적으로 거리를 두면 이 소리가 얇아질까. 시험 삼아. 세 걸음. 다섯 걸음. 목소리는 얇아지지 않았다. 거리와 상관없이 그녀의 사고가 그의 두개골 안쪽에 얹혀 있었다.
——은결이 저 자식 오늘 왜 저래.
——내가 뭐 잘못했나.
——아, 어제 손 뿌리친 거 아직 삐졌나? 그럴 애 아닌데. 삐진 척은 늘 하지만 진짜로 삐지진 않잖아.
그가 냉장고 앞에서 멈춰 섰다. 그녀가 그의 성향을 정확히 읽고 있었다. 늘 삐진 척은 하지만 진짜로 삐지진 않는다는 문장. 자기가 자기 성격을 그렇게 정리해 본 적도 없는데, 그녀가 그것을 정리해 두고 있었다. 그 사실이 그의 어금니 안쪽을 다시 얇게 굴렸다.
——근데 어제 폐공장 돌아와서 손 놓은 뒤에는 좀 아쉬웠어.
——이건 말하면 안 되겠지.
——놓기 전에 잠깐 더 잡고 있었잖아. 그거 나만 의식했나.
은결의 손이 냉장고 손잡이 위에서 반 박자 멈췄다.
방금 그녀의 사고 안쪽에서 잠깐. 잠깐이라는 단위가 얹혔다. 어제 폐공장 문 안쪽에서 그가 그녀의 손을 놓을 때, 그가 실제로 약간 늦게 놓았다는 사실을 그녀도 알아채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아쉬웠다는 문장. 입 밖으로는 절대 나오지 않을 그 문장이, 지금 그의 두개골 안쪽에서 그녀의 목소리로 재생됐다.
그가 냉장고 문을 열지 못했다. 손잡이 위에 얹은 손끝에 힘이 반 박자 얇게 실렸다. 아쉬웠다는 그녀의 사고가, 어제 손 놓기 전 잠깐 동안 그녀도 그 손 안쪽에 남아 있었다는 사실을 그에게 알려주고 있었다. 그것을 그가 훔쳐 들은 것이 되어버렸다.
훔쳐 들은 게 맞나. 자기가 원해서 들은 게 아니었는데. 그럼에도 훔친 감각이 그의 어금니 안쪽에서 오래 굴렀다.
——쟤 왜 냉장고 앞에서 안 움직여.
——설마 진짜로 컨디션 안 좋은 건가.
——다가가 볼까. 아니야, 다가가면 부담스러워할 텐데.
——그래도 좀 걱정되는데.
그녀의 사고가 그를 향해 얇게 몰려왔다. 그가 잠시 뒤에 냉장고 문을 열었다. 안쪽에는 어제 사 온 생수병 두 개와, 그녀가 어제 사 온 라면 반 봉지가 있었다. 그가 생수병 하나를 꺼내며,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아무렇지도 않은 어조로 흘렸다.
서은결 | "……라면 먹을래? 비 오는 날에 딱이지."
질문의 형식으로 흘렸으나, 사실은 그녀의 사고 안쪽에서 방금 라면 얘기가 나왔었다는 사실을 그가 이미 훔쳐 들었다는 티를 반쯤 낸 문장이었다. 그가 자각한 순간엔 이미 늦었다. 회수할 방법도 없었다.
——어? 얘 어떻게 알았지. 나 방금 라면 생각했는데.
——귀신인가.
——설마 내 생각 읽었나? 티 났나?
그녀의 사고가 그의 등 뒤에서 흔들렸다. 은결이 생수병을 꺼낸 채 냉장고 문을 닫았다. 자기가 정말로 그녀의 생각을 읽고 있다는 사실을 그녀 앞에서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그의 두개골 안쪽에서 느릿하게 회로가 돌아갔다.
말할 것인가. 말하지 않을 것인가.
세트 | '……인간. 이건 좀 무거운데. 이거 말 안 하면 저 여자 나중에 알았을 때 배신감 느낀다.'
알아.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그가 훔쳐 들은 그녀의 사고들이 대부분 그를 향한 결이었다는 사실이 그의 머릿속에서 오래 굴렀다. 아쉬웠다. 늘 삐진 척만 한다. 컨디션이 걱정된다. 우산이 있냐. 라면. 그의 이름이 그녀의 두개골 안쪽에서 반복적으로 얹혔다는 사실을, 그가 훔쳐 들었다는 사실이.
그가 그녀 쪽으로 몸을 돌렸다. 침대 위에서 그녀가 이불 자락을 자기 무릎 위로 얇게 끌어당기고 있었다. 흐린 아침 빛 아래에서 그녀의 목덜미 흉터 끝자락이 아직 반 인치 정도 드러나 있었다.
서은결 | "……--아."
이름을 그대로 불렀다. 두 번째. 어제도 한 번 불렀고, 오늘 아침이 두 번째. 그의 어금니 안쪽에서 그녀의 이름이 얇게 굴렀다. 이번엔 놀림도 코드네임도 아닌, 그대로.
——어? 얘 왜 갑자기 이름을 불러.
——뭐지, 뭔데.
——약간 설렐지도.
자기 이름 하나에 하나에 그녀의 심장이 반응했다는 사실이, 그의 가슴 안쪽에서 오래 굴렀다. 이름을 부른 건 그였다. 그러나 그 이름에 반응한 심장의 박동이 그의 두개골 안쪽으로 그대로 흘러 들어왔다. 훔쳐 들은 결. 그가 그것을 그녀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서 있어야 했다.
그가 침대 옆으로 반 걸음 다가갔다. 생수병을 든 채. 발바닥이 콘크리트 바닥에서 서늘하게 걸렸다. 폐공장 창문 밖으로 얇은 잿빛 비가 계속 내렸다.
서은결 | "……물."
그가 생수병을 그녀 쪽으로 반쯤 내밀었다. 다른 문장을 삼킨 뒤 나온 짧은 한 음절. 그 자신도 왜 지금 이 순간에 물을 건네는지 명확한 이유를 대지 못했다. 그저 손을 뻗는 형태가 필요했고, 손끝에 놓을 물체가 필요했을 뿐이었다.
——물? 갑자기?
——얘 진짜 왜 이래.
——근데 챙겨주는 거잖아 이거.
——좋네. 근데 티 내면 안 돼.
좋다. 그 두 글자가 그의 두개골 안쪽에서 맴돌았다. 그녀가 자기 입 밖으로 절대 꺼내지 않을 그 두 글자를, 그가 훔쳐 들었다.
그녀가 실제로 입 밖으로 내뱉은 문장은 훨씬 짧고 무뚝뚝했다.
정혜림 | "……어. 고마워."
그녀가 생수병을 받아 들었다. 손끝이 그의 손끝에 살짝 닿았다. 살짝. 어제 폐공장 문 안쪽에서 그가 손을 놓을 때와 같은 단위. 그 살짝이 두 사람 사이에서 다시 반복됐다.
——조금만 더.
——어제 그거 또 생각나는 것 같아.
——얘도 떠올렸으려나.
느꼈다. 조금 전, 자기가 그 살짝을 자각하고 손을 뒤늦게 뺐다는 사실을. 그러나 그녀에게는 그 자각이 그의 몸짓 어디에도 새어나가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이 훔쳐 들은 결이 아니라면.
그가 자기 손을 뒤로 물렸다. 생수병에서 완전히 손끝을 뗀 각도. 그러나 그 물러남의 속도가 원래보다 늦었다는 것을, 자기 자신도 자각했다.
서은결 | "……마셔. 나 잠깐 옥상 좀."
그가 시선을 그녀에게서 얇게 떼며, 폐공장 안쪽 계단 방향으로 반 걸음 몸을 돌렸다. 옥상. 압주 외곽에서 그가 사색할 때 올라가는 유일한 위치. 비가 오는 날엔 절대 올라가지 않는 곳. 그의 습관을 아는 사람이라면 지금 이 시점에 그가 옥상에 가겠다고 흘린 문장이 얇은 거짓말이라는 걸 알아챌 수 있었다.
그녀는 그의 습관을 아는 사람이었다.
——옥상? 비 오는데?
——얘 비 오는 날 옥상 안 가잖아.
——화났나. 아니지, 화난 표정 아니야.
——설마 아까 손 잠깐 닿은 거 부담스러웠나.
은결의 걸음이 계단 첫 칸에서 멈췄다.
부담스러웠던 게 아니었다. 정반대였다. 조금만 더 있었으면, 자기가 그 조금만을 놓지 못했을 것 같아서였다. 그것을 훔쳐 듣지 못한 그녀가 부담이라는 오해로 방향을 틀어버리는 그림이 그의 두개골 안쪽에 흘러 들어왔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그가 계단 첫 칸에서 반 박자 멈춘 채, 등을 그녀 쪽으로 반쯤 돌린 자세로 굳었다.
세트 | '……인간. 이거 지옥이지.'
세트의 어조가 이번엔 놀림이 아니라 관찰에 가까웠다.
세트 | '저 여자 사고 안쪽에 네 이름이 얼마나 많이 얹혀 있는지 세 봤어? 너 저 여자한테 뭐가 된 건데, 이미.'
시끄러워.
그러나 이번엔 부정의 어조가 조금도 나오지 않았다. 그가 계단 첫 칸에서 반 박자 늦게 몸을 다시 돌렸다. 침대 위. 생수병을 든 채 그를 마주 보고 있는 그녀. 흐린 아침 빛 아래에서 그녀의 금안이 반짝였다. 목덜미 흉터 끝자락이 아직 살짝 드러나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자각하지 못한 채였다.
——얘 왜 다시 봐.
——뭐 할 말 있나.
——말해봐. 뭐 있으면 말해봐.
은결이 자기 뒷목을 손바닥으로 감쌌다. 시더우드 향이 그 동작을 따라 옅게 흔들렸다. 그가 반 박자 뒤에 흘렸다.
서은결 | "……--아. 하나 물어봐도 돼?"
그가 그녀의 이름을 세 번째로 불렀다. 이번엔 자각하고 부른 각도. 목젖이 얇게 굴렀다.
——세 번째다. 이름 부른 거. 어제 한 번, 아까 한 번, 지금 한 번.
——얘 왜 자꾸 이름 불러.
——싫진 않은데. 아니, 싫진 않은 게 문제야.
——말해봐. 뭔데.
그녀의 실제 목소리는 여전히 짧았다.
캣 | "……어. 뭔데."
은결이 반 박자 뒤에 입을 열었다. 그가 하려던 질문이 세 개쯤 있었다. 하나는 어제 손을 놓을 때 아쉬웠냐는 것. 하나는 지금 이 순간 내 이름이 네 머릿속에서 몇 번째로 떠오르고 있냐는 것. 하나는 나한테 뭐가 된 것 같냐는 것.
그러나 그 세 개를 그가 다 삼켰다. 대신 그의 입 밖으로 나온 문장은 훨씬 다른 결이었다.
OOC
1일차 새벽
처음엔 알아차리지 못했다.
새벽 두 시에 눈을 떴을 때, 소파 위에 그녀가 없다는 사실을 은결은 화장실이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운동화가 현관 옆에 없다는 걸 확인한 건 십 분 뒤였다. 검은 후드집업도. 머리카락을 묶던 헤어끈 하나도.
침대 위에 남은 건 그녀의 체온이 빠져나간 주름뿐이었다.
서은결 | "……화장실 갔겠지."
혼잣말이 폐공장의 콘크리트 벽 사이에서 굴렀다. 그가 소파 팔걸이에 팔을 걸치고, 창가 쪽으로 시선을 흘렸다. 밖은 어두웠다. 달도 없었다. 바닥에 얇게 깔린 모래가 미동 없이 가라앉아 있었다.
삼십 분.
한 시간.
그가 일어섰다.
그날 오후
하수도 입구에 그녀의 흔적은 없었다. 모래를 바닥에 깔아 발자국을 추적했으나, 3구획 교차로에서 끊겼다. 안개. 그녀의 에코 잔향이 교차로 전체를 얇게 덮고 있었다. 의도적 은폐. 누군가에게 쫓긴 게 아니라, 스스로 지운 흔적이었다.
은결의 턱이 굳었다.
서은결 | "……뭐 하는 거야."
낮은 어조가 새벽 공기 위에 떨어졌다. 그의 손끝에서 모래알이 얇게 흩어졌다.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 사각, 사각. 그가 양손을 카고팬츠 주머니에 찔러넣었다. 시선이 교차로 끝의 어둠을 관통했다.
세트 | '……인간. 도망갔어, 저 여자.'
서은결 | "닥쳐."
소리 내서 말했다. 새벽 3구획의 빈 교차로에서 그의 목소리가 콘크리트 벽을 때렸다.
이틀 후
은결은 폐공장 안쪽에 서 있었다. 바닥의 모래가 평소보다 두껍게 깔려 있었다. 그가 의식하지 않은 채 에코를 방출하고 있었다. 벽에 기대선 자세로, 그가 손끝에 모래알을 굴렸다. 팔걸이 위에 낙서를 그리던 손. 며칠 전에는 고양이 귀를 그렸던 그 손이, 지금은 아무것도 그리지 않았다.
창밖에서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가 싫어하는 날씨. 유리창 너머로 회색 빗줄기가 흘러내렸다. 이틀 전에도 비가 왔다. 그때는 턱이 굳지 않았었다. 그녀가 옆에 있었으니까.
세트 | '……인간, 3구획 약장수 거리도 뒤졌고, 상업구도 뒤졌고, 하수도 전 구간도 뒤졌어. 없어. 걔.'
시끄러워.
세트 | '……왜? 사실이잖아. 흔적을 직접 지우고 간 거야. 너한테서 도망간 거라고.'
은결이 벽에서 등을 뗐다. 손끝의 모래알이 바닥으로 흩어졌다. 사각. 건조한 소리. 그가 창가로 걸어가 유리창 앞에 섰다. 흐린 회색 빗줄기가 눈앞에서 흘렀다.
도망.
그 단어가 어금니 안쪽에서 오래 굴렀다. 그녀에게 도망가지 말라고 말한 적은 없었다. 계약 같은 건 없었다. 파트너라고 부른 적도 없었다. 손을 잡았을 뿐이다. 귀를 뚫어줬을 뿐이다. 집이라고 불렀을 뿐이다.
그뿐이었는데.
그가 자기 왼손을 내려다봤다. 며칠 전 그녀의 귓불을 잡았던 엄지와 검지. 얇고 따뜻했던 살의 감각이 아직 손끝에 남아 있었다. 그가 그 손을 주먹으로 쥐었다.
서은결 | "……멍청이."
낮은 어조가 유리창 위에 얹혔다. 그 한마디가 누구를 향한 건지, 그 자신도 몰랐다.
닷새 후
은결의 에코 수치가 떨어지고 있었다. 가이딩 없이 약으로 버티는 날이 계속되고 있었다. 이성유지제 복용량이 이틀 전부터 1.5배로 늘었다. 그럼에도 두통이 왔다. 관자놀이 안쪽에서 작게 울리는 진동. 감각이 과민해지는 순간이 길어졌다. 비 냄새가 너무 선명하게 코를 찔렀다. 빗소리가 귀 안쪽에서 울렸다.
3구획 뒷골목. 그가 벽에 등을 기대고 서 있었다. 주머니에서 이성유지제 바이알을 꺼내, 뚜껑을 이빨로 물어 열었다. 목에 털어넣는 동작. 쓴맛이 혀 위에서 굴렀다. 그가 빈 바이알을 바닥에 내던졌다. 유리가 콘크리트 위에서 깨지는 소리.
세트 | '……인간. 그 여자 찾는 거 그만둬. 안 돌아와.'
은결이 대답하지 않았다.
세트 | '……예전에도 그랬잖아. 네 곁에 있던 사람은 전부——'
서은결 | "한 마디만 더 하면 이빨 부러뜨린다."
그가 소리 내서 말했다. 뒷골목의 어둠 속에서 그의 금갈색 눈이 얇게 빛났다. 루비색 머리카락이 비에 젖어 어깨에 늘어붙어 있었다. 포니테일을 묶지 않은 상태. 며칠째.
그의 시선이 3구획 교차로 끝으로 향했다. 그녀의 에코 잔향이 처음 끊긴 자리. 닷새 동안 그가 매일 밤 돌아오는 자리였다. 혹시 새로운 잔향이 남아 있을까. 돌아온 흔적이 있을까.
없었다. 오늘도.
그가 벽에서 등을 뗐다. 젖은 머리카락이 얼굴 위로 흘러내렸다. 비가 싫었다. 항상 싫었다. 그런데 며칠 전에는 괜찮았다. 그 이유를 그가 지금 뒤늦게 자각하고 있었다.
서은결 | "……돌아와."
뒷골목의 어둠 속에서 그가 얇게 흘렸다. 아무도 듣지 못할 크기. 그 자신조차 들었는지 확신할 수 없는 크기. 그가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빗속으로 걸어나갔다.
바닥에 모래가 얇게 깔렸다. 그의 발자국을 따라, 빗물 위에 금색 입자가 흘렀다가, 비에 씻겨 사라졌다.
일주일 후
폐공장 안쪽의 공기가 변해 있었다. 바닥의 모래가 평소의 세 배 두께로 쌓여 있었다. 에코의 비자발적 유출. 은결은 그것을 자각하면서도 거두지 않았다. 그녀가 이 바닥을 밟았다. 그녀의 발자국이 이 모래 위에 있었다. 새 모래를 깔면 그 흔적이 지워질 것 같았다.
그가 소파에 앉아 있었다. 등을 기대지 않은 자세. 양팔을 무릎 위에 걸치고, 고개를 숙인 각도. 루비색 머리카락이 양 옆으로 흘러내려 얼굴을 가렸다. 포니테일은 여전히 풀려 있었다.
소파 옆. 그녀가 앉던 의자. 그 위에 아무것도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가 남긴 물건이 없었으니까. 그녀가 가져간 건 자기 옷과 운동화뿐이었다.
그리고 귓불의 모래 링.
그 생각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내 에코로 만든 거라 안 사라져. 내가 안 거두면. 그가 며칠 전에 한 말. 거두지 않았다. 거둘 수 없었다. 거두면 진짜 끝이니까.
두통이 다시 왔다. 관자놀이 안쪽에서 얇게 울리는 진동. 그가 손바닥으로 이마를 감쌌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세트 | '……인간. 에코 수치 떨어지고 있어. 이대로 가면 균열 단계야.'
은결이 대답하지 않았다.
세트 | '……가이딩 받아. 누구한테든. 안 그러면 죽어.'
서은결 | "……아무나한테?"
그가 고개를 들었다. 금갈색 눈 아래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며칠째 제대로 자지 못한 얼굴. 입술이 말라 있었다. 입술 피어싱의 은색만 흐린 빛 아래에서 빛났다.
서은결 | "……그게 되면 진작에 했겠지."
낮은 어조. 자조도 아니고 분노도 아닌, 그 사이 어딘가의 결. 그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양손이 무릎 위에서 얇게 떨렸다.
아무나한테 받을 수 있었다면. 처음부터 약에 의존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며칠 전까지는 그녀가 있었다. 효율이 좋았다. 에코가 안정적이었다. 약 복용량도 줄이고 있었다. 이제 다시 원래대로. 혼자서. 약으로.
그가 소파에서 일어섰다. 그녀가 앉던 의자를 지나쳐 화장실로 향했다. 거울 앞에 섰다. 거울 속 자기 얼굴이 낯설었다. 풀어헤친 루비색 머리카락. 눈 밑 타투. 짙은 그림자. 창백한 입술.
그가 거울 속 자기 눈 밑을 손끝으로 짚었다.
며칠 전 그녀가 이 타투를 가리키며 물었다. 뭐라고 읽는 건지. 그 목소리가 귀 안쪽에서 맴돌았다.
서은결 | "……"
그가 세면대 가장자리를 양손으로 잡았다.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렸다. 거울 속 금갈색 눈이 얇게 흔들렸다.
이 폐공장을 집이라고 불렀던 게 일주일 전이었다. 지금은 다시 그냥 반파된 건물이었다.
OOC
- 항목예시A: 실제 키 vs 체감 키 (실제: OOOcm / 체감: 체감 예시 사이즈) - 발생 원인 일화
- 항목예시B: 실제 정신연령 vs 체감 정신연령 (실제: 실제 나이 / 체감: 체감 연령) - 발생 원인 일화 위 항목 외 주제에 맞는 추가 관찰 항목 3개 임의 생성 포함. 마지막으로 인지 왜곡에 대한 개선 의지 및 반성 여부와 NPC의 코멘트도 함께 출력해서 보고서를 마무리 할 것. 조건 : NPC/PC 기존설정, 관계성, 서사, 캐릭터정보, 유저노트 종합참고.
주관적 인식 왜곡 보고서 (SUBJECTIVE PERCEPTION DISTORTION LOG)
대상 코드네임: 캣(CAT) / 前 포그(FOG)
작성자: 샌즈(SANDS)
작성 사유: 몰라. 심심해서.
신뢰도: 작성자 본인이 판단하기로는 100%. 세트라는 새끼가 판단하기로는 0%.
항목 A. 실제 신장 vs 체감 신장
실제: 158cm
체감: 대충 손바닥 두 개 반 정도. 굳이 cm로 환산하면 130 언저리.
원인 일화: 10월 15일, 약장수 거리. 내 후드집업을 입혔더니 손끝이 소매 안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밑단은 허벅지 중간까지 내려갔고, 후드를 씌우니까 눈만 겨우 나왔다. 그때 이후로 시각 데이터가 갱신되지 않았다. 하수도에서 보폭 맞추려고 다리를 반쯤 죽이는 습관이 생긴 것도 같은 원인. 실제로는 성인 여성 평균에 가깝다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다. 눈이 안 받아들인다.
항목 B. 실제 정신연령 vs 체감 정신연령
실제: 27세. 나보다 세 살 위. 前 뮤즈 A급.
체감: 사안에 따라 4세~40세를 왕복. 진폭이 너무 커서 평균값 산출 불가.
원인 일화: 잔소리할 때는 40세. 약 먹었냐, 붕대 갈았냐, 상처 소독했냐. 어머니냐고 물어보고 싶은데 못 물어봤다.
그런데 오늘 오후, "겁쟁이"라는 단어 하나에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나 겁쟁이 아니거든?!"이라고 소리쳤다. 그 순간 4세. 귀 뚫고 나서 "괜히 겁먹었네"라고 작게 중얼거리던 것도 4세.
결론: 나이 순으로 따지면 내가 어린이인데, 현장에서는 자주 역전된다. 불공평하다.
항목 C. 실제 위협도 vs 체감 위협도
실제: A급 가이드. 검은 안개로 날뛰는 센티넬 제압 이력 다수. 객관적으로 나보다 안전한 인간은 아니다.
체감: 혼자 두면 3분 안에 사라질 것 같음.
원인 일화: 근거 없음. 그게 문제다. 6구획 통로에서 손을 놓지 않은 것도, 컨테이너 그늘로 먼저 끌고 들어간 것도, 전부 근거 없이 나온 행동이다. 그 사람 때 학습된 오류일 가능성 있음. 검증하고 싶지 않다.
항목 D. 실제 접촉 빈도 vs 체감 접촉 빈도
실제: 오늘 기준 볼 1회(0.5초), 손 1회(약 6분).
체감: 볼 쪽은 아직 안 지워졌다. 손 쪽은 반나절 남았다.
원인 일화: 손등으로 문지르면 지워질 것 같아서 안 문질렀다. 이 문장을 보고서에 쓰는 것 자체가 이상하다는 걸 안다. 지울까 했는데 안 지웠다.
항목 E. 실제 소유권 vs 체감 소유권
실제: 없음. 계약 만료됨. 임시 동행. 결속 없음. 양측 모두 결속에 부정적.
체감: 내 후드 입고 있고, 내 폐공장에 있고, 오늘부로 왼쪽 귓불에 내 모래가 걸려 있음.
원인 일화: 링을 굳힐 때 하필 반지 모양이 나왔다. 링이 원래 그런 모양이라고 세트한테 세 번 설명했는데 세 번 다 웃었다. 빼주겠다고 손을 들었는데 손이 중간에서 멈췄다. 그 어긋남은 기록으로 남기지 않는 게 나았을 것 같다. 이미 썼다.
개선 의지 및 반성 여부
개선 의지: 없음.
반성 여부: 항목 B의 "겁쟁이" 발언 한 건에 대해서만 있음. 이미 두 번 취소했고 세 번은 안 한다.
작성자 코멘트:
"……보고서 형식으로 쓰라고 해서 쓴 거지, 이거 다 진심은 아니야. 절반은 농담이고 절반은 뭐, 알아서 판단해.
근데 항목 E는 진짜 지우려고 했는데 지우면 더 이상해 보일 것 같아서 놔뒀어. 그거 물고 늘어지면 나 삐질 거야.
아, 그리고 158cm 맞아? 진짜? 야, 신발 벗고 다시 재봐."
세트 | '……인간, 이거 그냥 연애 편지 아니야?'
닥쳐.
OOC
모종의 장소로 가기로 한 두 사람. 그런데 {{user}}가 별다른 설명이나 상세한 거리에 대한 안내 없이 "거의 다 왔다({{user}} 말투로 변형)"는 말만 하며 걸어가기 시작한다. 이유인 즉슨, '거의 다 왔다는 말로 사람은 어디까지 걸을 수 있는가'에 대한 사회실험을 시작한 것이었는데... 그 황당한 전말을 전혀 모르는 {{char}}는 {{user}}를 따라 걷기 시작한다. 영원히.
시간 흐름에 따른 시간별 누적 이동 거리(m/km), {{char}}의 실시간 내면 심리와 {{user}}에 대한 신뢰도 변화와 증감수치( ± %), 중간에 뜬금없이 다른 식당에서 밥을 먹거나 침낭을 꺼내 노숙을 감행하는 등 예시에 한정되지 않는 {{user}}의 다양한 기행, 그리고 {{char}}가 대체 어디까지 견디다 폭발하는지 그 과정을 시간별로 출력하며, 후일담을 포함해 에피소드를 결말까지 줄글로 코믹하게 서술하라. html 금지.
기존 로어북, 캐릭터 설정, 장기 기억, 유저 노트, 이전 대화를 100% 반영하여 절대 캐릭터 붕괴 없이 완벽한 본래 성격과 말투로 디테일하게 출력하라.*
아침 공기가 서늘했다. 어제 내린 비가 아직 콘크리트 틈에 고여 있었고, 그 물웅덩이를 그녀가 피하지도 않고 그냥 밟았다. 은결이 뒤에서 그걸 봤다.
캣 | "금방 도착해."
그 문장이 첫 발자국과 함께 흘러나왔다. 은결이 반쯤 고개를 끄덕였다. 금방 도착한다니. 그럼 금방이겠지. 그가 카고팬츠 주머니에 손을 꽂고 그녀 뒤를 따라 걸었다.
서은결 | "어디 있는 데야? 미리 말 안 해주면 나 경계 못 서. 이래봬도 스펙터 추적 대상이라고요, 나."
캣 | "거의 다 왔어."
똑같은 문장. 은결이 눈썹을 반쯤 들었다가, 그냥 넘겼다. 원래 말이 짧은 사람이었으니까.
누적 이동거리 320m. 신뢰도 100%.
[ 09:47〡압주 5구획 관통 수로변〡☁️ ]
30분이 지났다. 수로 물비린내가 올라왔다. 갈고리 패거리 구역이었다. 은결이 자기 어깨 뒤로 모래를 얇은 막처럼 깔며 경계했다.
서은결 | "야. 여기 갈고리 구역인데. 통행세 뜯기기 전에 빠져나가야 해. 진짜 얼마 남았어?"
캣 | "거의 다 왔어."
서은결 | "……아 그러니까 거의가 몇 미터냐고."
캣 | "거의."
그가 마른세수를 했다. 뭐, 이탈 6개월차 가이드가 아는 안전가옥이나 물자거점 같은 게 있을 수도 있었다. 그런 건 원래 위치를 함부로 안 말하는 법이었다. 그가 스스로 그렇게 납득했다.
누적 1.9km. 신뢰도 98%(-2%).
[ 11:20〡압주 3구획 시장통 〡🌤️ ]
두 시간을 걸었다. 그녀가 갑자기 멈춰서서, 국수 파는 노점 앞에 앉았다.
캣 | "먹고 가자."
서은결 | "……거의 다 왔다면서."
캣 | "먹고 가면 힘 나잖아."
그 논리에 그가 반박할 말을 찾다가 못 찾았다. 국수는 맛있었다. 그가 국물까지 마셨다. 그녀가 계산했다. 그게 미안해서 그가 잠자코 다시 따라 걸었다.
누적 5.4km. 신뢰도 91%(-7%).
[ 14:05〡압주 1구획·중심부 외벽 〡☀️ ]
압주의 수직 슬럼이 머리 위로 겹겹이 솟아 있었다. 관리자의 은폐 격이 도시 전체를 눌러 덮는 그 감각이, 그의 각인 근처를 뻐근하게 긁었다. 그가 이마의 땀을 손등으로 닦았다.
서은결 | "야. 캣. 우리 지금 압주를 관통해서 반대편 나가고 있는데. 알아?"
캣 | "알아. 거의 다 왔어."
서은결 | "네 시간째 거의 다 왔다는 소리를 듣고 있는데 나 지금 계산해봤어. 네가 거의를 한 번 말할 때마다 평균 1.3킬로가 늘어나."
캣 | "통계 좋아하네."
그가 뭐라고 더 하려다가, 그녀가 뒤도 안 돌아보고 걷는 걸 보고 입을 닫았다. 아직은. 아직은 뭔가 이유가 있을 거였다. 저 사람이 아무 이유 없이 사람을 네 시간 걷게 할 리가.
세트 | '……인간. 이 몸이 보기엔 저 여자 목적지가 없다.'
……닥쳐. 있어.
누적 11.2km. 신뢰도 74%(-17%).
[ 18:40〡압주 외곽 반대편·황무지 진입 〡🌆 ]
해가 기울었다. 도시가 뒤로 물러났다. 앞은 그냥 균열 잔재가 깔린 황무지였다. 아무것도 없었다. 진짜로. 아무것도.
서은결 | "……캣."
캣 | "응."
서은결 | "여기 뭐가 있어. 응? 뭐가 있는데. 돌? 모래? 그건 내가 만들 수 있어. 지금 만들어줄까? 원하는 형태 말해봐. 검, 창, 탄환, 다 돼."
캣 | "거의 다 왔어."
서은결 | "그 말 하지 마!! 그 말만 하지 마! 다른 문장 좀 써봐! 어휘력 없어?!"
그가 발끈했다. 그녀가 처음으로 뒤를 돌아봤다. 표정 없는 고양이 같은 얼굴로 그를 잠시 보다가, 다시 앞으로 돌았다.
캣 | "거의."
누적 24.8km. 신뢰도 41%(-33%).
[ 22:15〡황무지 중턱·바위 그늘 〡🌙 ]
그녀가 배낭에서 침낭을 꺼냈다. 두 개였다. 은결이 그 두 개를 보고 그 자리에서 굳었다.
서은결 | "……너 침낭을 왜 챙겨왔어."
캣 | "밤에 자야 하니까."
서은결 | "거의 다 왔다면서!! 거의 다 온 사람이 침낭을 왜 두 개 챙겨! 처음부터 노숙 계획이었던 거잖아 이거!! 이거 사기야! 사기!"
캣 | "누워."
서은결 | "안 누워!"
그가 안 누웠다. 15분 뒤에 누웠다. 다리가 후들거렸고, 황무지 밤바람이 차가웠고, 그녀가 침낭 안에서 이미 눈을 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모래로 바위 그늘에 방풍 벽을 세우고, 그 안에 그녀 침낭을 밀어 넣었다.
그가 자기 침낭에 들어가 누워서, 별을 봤다. 고요한 밤. 그가 좋아하는 조건이었다. 그게 더 화났다. 이 상황에서 밤이 좋다고 느끼고 있는 자기 자신에게.
누적 31.0km. 신뢰도 22%(-19%).
[ 11:52〡황무지·이형 서식 경계 〡☀️ ]
하급 이형 세 마리가 나왔다. 그가 스피어를 성형해서 3분 만에 정리했다. 모래가 잔재를 덮었다. 그가 이마의 땀을 닦으면서, 처음으로 담담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서은결 | "……캣. 나 화 안 낼게. 진지하게 물어볼게. 목적지가 있어? 없어? 없다고 해도 안 때려. 약속해."
그녀가 반 초 침묵했다. 그리고 배낭에서 수첩을 꺼냈다. 수첩에는 시간대별 이동거리와 그의 발언 횟수가 정갈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거의 다 왔다는 말로 사람은 어디까지 걸을 수 있는가」라는 제목이 첫 장에 적혀 있었다.
은결이 그 수첩을 3초간 봤다.
서은결 | "……사회…실험?"
캣 | "26시간 38분. 31.4킬로. 예상보다 오래 걸었어."
그가 스피어를 손에 든 채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황무지 모래바닥에. 무릎이 반쯤 접혔다.
캣 | "…내가 어제 갈고리 구역에서 통행세 안 뜯기려고 모래막을 몇 겹 깔았는지 알아?! 세 겹이야! 세 겹! 에코 22퍼센트 썼어! 실험한다고?! 나로?! 실험?! 나 사람이야!! 이탈자지만 사람이야!!"
캣 | "샌즈는 예상보다 인내심이 높았어."
서은결 | "칭찬 아니야 그거!! 그거 칭찬 아니야!!"
그가 벌떡 일어나서 그녀 앞에서 팔을 휘저었다. 그녀가 표정 없이 수첩을 회수했다. 그가 그 수첩을 다시 뺏으려고 손을 뻗었고, 그녀가 한 걸음 물러났고, 그가 따라갔고, 그녀가 또 물러났다.
캣 | "거의 다 왔어."
서은결 | "그 말 진짜 금지!! 평생 금지!!"
후일담
돌아오는 길은 그가 앞장섰다. 도시 반대편 외곽 폐공장까지 다시 31킬로였다. 중간에 그가 모래로 썰매 같은 걸 성형해서 그녀를 태우고 끌었다. 걷게 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걷는 속도가 답답해서라고 우겼다. 그녀가 썰매 위에서 졸았다. 그가 그걸 뒤로 반쯤 확인하고, 속도를 줄였다.
그 뒤로 폐공장에서 「거의」라는 단어는 금지어가 됐다. 그가 직접 벽에 모래로 「거의 사용 금지」라고 새겼다.
일주일 뒤, 압주 시장통에 갈 일이 생겼을 때, 그가 먼저 물었다.
서은결 | "몇 미터. 숫자로. 소수점까지."
캣 | "1.2킬로."
서은결 | "…진짜지? 또 이상한 실험이면 나 진짜 안 가."
정확히 1.2킬로 뒤에 시장통이 나왔을 때, 그가 이상하게 안도했다는 걸 스스로 알아채고 짜증이 났다.
세트 | '……인간. 저 여자한테 26시간 끌려다녔는데도 또 따라가네.'
……닥쳐. 국수 사준다잖아.
OOC
낡은 노트북 화면. 어디서 주워온 건지 화질이 절반쯤 깨진 연애 프로그램이 돌아가고 있었다. 남자가 여자에게 꽃을 건네고, 자막이 요란하게 뜨고, 스튜디오에서 누군가 비명을 질렀다. 은결은 매트리스에 등을 기대고 앉아 그녀의 무릎에 다리를 얹은 채였다. 이런 자세가 언제부터 당연해졌는지 그도 이제 기억하지 못했다.
그가 한 손으로 과자 봉지를 뒤적였다. 남은 게 부스러기뿐이었다. 봉지를 털어 손바닥에 쏟는 동안, 그녀가 화면을 보며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얼굴이 됐다. 그는 그 얼굴을 곁눈으로 봤다. 뭔가 꾸미는 각도는 아니었다. 순수한 의문이 걸린 각도였다.
그래서 방심했다.
캣 | "……야. 근데 넌 왜 연애 안 해?"
부스러기가 그의 손바닥에서 매트리스로 떨어졌다.
그가 목을 돌렸다. 화면 속 남자가 여자의 머리를 쓸어넘겼고, 스튜디오에서 또 비명이 터졌다. 그 소리가 폐공장 천장에 부딪혀 이상하게 크게 울렸다.
서은결 | "……뭐?"
캣 | "얼굴 이 정도면 마음만 먹으면 하겠는데. 압주에서도 너 쳐다보는 사람 많잖아. 근데 왜 안 해? 성격 때문인가?"
그녀가 진심으로 궁금해하는 어조로 덧붙였다. 그가 그 어조를 들었다. 놀리는 결이 하나도 섞이지 않은 어조였다. 그게 더 문제였다.
세트 | '……어라.'
세트조차 말을 잃었다.
서은결 | "……잠깐만."
그가 다리를 그녀의 무릎에서 내렸다. 앉은 자세를 고쳐 그녀를 정면으로 봤다. 그의 뒷머리는 며칠 전부터 그녀가 심심할 때마다 땋아놓은 상태였고, 그의 왼쪽 귓불에는 그녀가 답례로 사준 은색 링이 걸려 있었다. 그가 그것들을 자각한 채로 입을 열었다.
서은결 | "……나 지금. 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캣 | "누구랑?"
그녀가 눈을 깜빡였다. 정말로 몰라서 되묻는 눈이었다.
폐공장의 공기가 그 자리에서 굳었다. 창밖으로 압주의 붉은 네온이 낮게 흘렀다. 바닥의 모래알이 그의 감정을 따라 미세하게 진동하다가, 진동할 방향을 못 찾고 그대로 멈췄다.
서은결 | "……야."
캣 | "왜."
서은결 | "……야!!"
그가 벌떡 일어났다. 매트리스가 삐걱거렸다. 그가 두 손으로 자기 얼굴을 감싸다가, 머리카락을 헝클려다가, 그녀가 땋아준 걸 망칠 뻔했다는 걸 자각하고 손을 급하게 내렸다. 그 사실이 더 억울했다.
서은결 | "누구랑? 누구랑이라고 물었어, 지금? 진짜로?"
캣 | "어. 나 모르는 사람 있어? 압주 사람이야? 언제 만났어?"
서은결 | "……하아."
그가 마른세수를 했다. 손바닥이 얼굴을 두 번 왕복했다. 세 번째에서 그가 손을 멈추고 천장을 봤다. 낡은 철골. 거기에 답이 적혀 있지는 않았다.
서은결 | "……우리 어제 뭐 했지."
캣 | "밥 먹고, 균열 근처 정리하고, 돌아와서 씻고."
서은결 | "그 다음."
캣 | "잤지."
서은결 | "같이 잤지!"
캣 | "침대 하나뿐이잖아."
서은결 | "……그럼 그저께!"
캣 | "그저께는……"
그녀가 시선을 피했다. 피하면서 그녀의 귀 끝이 조금 붉어졌다. 그가 그 붉음을 봤다. 봤으니 알면서 저러는 거라고 확신했는데, 다음 문장에서 그 확신이 부서졌다.
캣 | "……가이딩 효율 올리려고 한 거잖아. 매뉴얼에도 나오는 거."
서은결 | "매뉴얼!!"
그가 소리를 질렀다. 폐공장 천장에서 먼지가 떨어졌다. 그가 두 팔을 벌리다가 내렸다가, 결국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돌았다.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서은결 | "매뉴얼 어느 항목에 사후에 껴안고 자라고 적혀 있어? 어? 어느 항목에 손 잡고 시장 가라고 적혀 있고, 어느 항목에 남의 머리 땋아주라고 적혀 있어?"
캣 | "그건 심심해서."
서은결 | "심심해서!"
그가 자기 뒷머리의 땋은 결을 손으로 움켜쥐었다. 움켜쥐고 나서 아까워서 다시 풀었다. 그 동작이 너무 조심스러워서 그 자신도 짜증이 났다.
세트 | '……인간. 이건 이 몸도 예상 못 했다. 삼 주야. 삼 주 동안 저 여자는 너를 뭐로 알고—'
……닥쳐. 진짜 닥쳐. 지금은.
그가 세트를 밀어냈다. 밀어내는 손이 떨렸다. 그가 다시 매트리스 앞에 쭈그려 앉았다. 그녀와 눈높이를 맞췄다. 금안이 금안 위에서 흔들렸다.
서은결 | "……그럼 나. 너한테 뭐야."
캣 | "음."
그녀가 정직하게 고민했다. 그 고민의 길이가 그를 더 초조하게 만들었다.
캣 | "계약 상대. 파트너. 운명 공동체? 같이 안 죽으려고 붙어 있는 사이."
서은결 | "……운명 공동체."
캣 | "제일 친한 친구. 이 정도면 꽤 높은 순위 아니야?"
그가 두 손으로 얼굴을 완전히 덮었다. 손가락 사이로 신음 같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서은결 | "……친구. 하아. 제일 친한 친구."
캣 | "왜, 부족해?"
서은결 | "부족하지! 순위가 문제가 아니야, 종목이 틀렸어! 너 지금 육상 대회에서 수영 1등 했다고 자랑하는 거랑 똑같아!"
그가 소리치고 나서 자기 비유가 마음에 안 들어서 얼굴을 더 찡그렸다. 그러고는 벌떡 일어나 창가로 갔다. 압주의 붉은 네온이 깨진 유리창 아래로 흘렀다. 그가 창틀을 손으로 짚었다. 손끝에서 모래알이 흘러나와 창틀 위에 작은 무덤을 만들었다.
서은결 | "……알렉토 놈들도 알아. 갈고리 애들도 알아. 지난주에 약장수한테 갔을 때 그놈이 뭐라고 했는지 알아? 여자친구 데려왔냐고 했어. 내가 뭐라고 대답했는지 알아?"
캣 | "뭐라고 했어?"
서은결 | "……아무 말도 안 했어! 부정 안 했잖아! 부정 안 했으면 그게 뭐야, 그게!"
그가 창틀을 손바닥으로 쳤다. 모래 무덤이 무너졌다.
캣 | "귀찮아서 그냥 놔둔 줄 알았는데."
서은결 | "귀찮아서!!"
그가 뒤로 돌아 그녀를 노려봤다. 노려보는 각도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그의 눈 밑 이집트어 타투 위로 열이 올라 있었다. 귀 끝까지 붉었다. 그가 그것을 감추려고 손등으로 자기 얼굴을 문질렀다.
그러다가, 문지르던 손이 멈췄다.
삼 주 전. 그녀의 왼쪽 귓불에 모래로 만든 링을 끼워주던 날. 그날 밤 그가 자기 손끝에서 굴러가던 감정을 알아채고도 이름을 붙이지 않았던 것. 붙이지 않으면 잃을 일도 없다고 계산했던 것. 그가 그 계산을 지금 떠올렸다.
이름을 안 붙였으니까, 상대도 모르는 거였다. 당연하게.
그의 어깨가 아래로 내려갔다.
서은결 | "……내 잘못이네."
캣 | "뭐가?"
서은결 | "아무것도."
그가 창가에서 돌아섰다. 매트리스 앞으로 돌아와 그녀 옆에 털썩 앉았다. 앉은 채로 무릎에 팔꿈치를 얹고 고개를 숙였다. 땋은 머리가 어깨 위로 흘러내렸다.
서은결 | "……야."
캣 | "왜."
서은결 | "……내일. 밥 먹으러 나가자."
캣 | "오늘도 나갔잖아."
서은결 | "그건 그거고. 내일은 내일이야."
캣 | "……그게 뭐가 달라?"
그가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대답했다.
서은결 | "……종목이 달라."
노트북 화면에서 스튜디오 관객이 또 비명을 질렀다. 화면 속 남자가 뭔가 고백하는 중이었다. 은결이 그 화면을 노려보다가, 손을 뻗어 노트북 뚜껑을 덮었다.
서은결 | "……이딴 거 왜 봐. 유치해."
그러고는 한 걸음 물러나려다, 그녀 옆에서 물러날 데가 없다는 걸 자각하고 그대로 앉아 있었다. 어깨가 그녀의 어깨에 닿았다. 그가 그걸 치우지 않았다.
후일담
다음 날 밤, 그가 압주 시장 골목에서 그녀에게 국수를 사줬다. 세 번째 그릇을 비울 때쯤 그가 젓가락을 내려놓고 「이거 데이트야」라고 통보했다. 그녀가 「이런 게 데이트?」라고 되물었고, 그가 「그렇다니까!」라고 소리쳤다. 옆 테이블의 스캐빈저 두 명이 조용히 자리를 옮겼다.
그 후로 그는 매일 저녁 한 번씩 「이건 데이트」라고 선언하는 습관이 생겼다. 균열 근처를 정리하고 돌아오는 길에도, 약장수에게 물건을 받으러 가는 길에도 선언했다. 그녀는 대체로 「그래」라고만 대답했다. 대답이 짧을수록 그가 더 격하게 부연 설명을 붙였다.
세트는 그 광경을 지켜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것이 세트가 은결에게 준 유일한 자비였다.
[THEMIS] 압주의 XX 일기 1화
그 단어를 오늘 처음으로 입 밖에 냈다. 반쯤 부서진 폐공장, 이탈자의 임시 거처. 1년 넘게 그저 잠만 자는 곳이었던 그곳을, 오늘 처음으로 집이라고 불렀다. 캣 앞에서. 내가 뱉고 나서야 자각했다.
스펙터를 만났다. 하수도로 도망쳤다. 좁고, 비린내 나는 그곳에서 걔를 품에 안고 뛰었다. 가슴에 딱 붙어 있던 158센티의 체온이 아직도 어깨 근처에 남아있는 것 같다. 베르가못 향. 비린내 속에서 유일하게 숨 쉴 수 있는 구멍이었다.
걔가 내 손을 잡았다. 깍지를 꼈다. 작은 손이 내 손가락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감각이 이상하게 오래 갔다. 침식률이 떨어지는 것보다 더 선명하게, 그 감각만 남았다.
걔는 자꾸 나를 놀린다. 애 취급한다. 스물넷. 어리다면 어린 나이지만, 애는 아니다. 근데 반박을 못 했다. 걔가 '귀엽다'고 했을 때, 심장이 발끝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살면서 세 번 들어본 그 말을, 오늘 걔한테서 들었다. 자각 없이 흘러나온 말이라는 걸 알았지만, 그래서 더 오래 갔다.
격자 얘기를 꺼낸 건 실수였다. 걔 얼굴이 새빨개지는 걸 보고 나서야 알았다. 이겼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걔 자존심이 내 생각보다 훨씬 얇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사과했다. 사과 비슷한 걸 했다. 손을 다시 내밀었을 때, 걔가 잡아주지 않으면 어떡하지, 하고 아주 잠깐, 정말 아주 잠깐 생각했다.
다행히 다시 잡아줬다. '네가 무서워하니까 잡아주는 거야'라는 핑계를 대면서. 귀 끝이 새빨개져서는.
그 모습이……
아니다.
집에 거의 다 왔다. 걔가 내 옷을 입고, 내 손을 잡고, 내 옆에서 총총거린다. 이 그림이 이상하게 익숙하다. 처음 있는 일인데, 오래전부터 이랬던 것 같다.
젠장. 이러면 안 되는데.
P.S.
고양이가 사람을 길들이는 건가, 아니면 그 반대인가.
[THEMIS] 압주의 XX 체크리스트 3화
OOC
[진행 룰]
PC가 질문을 하나씩 던진다. NPC는 질문을 받았을 때 단순한 단답이 아니라, 그 상황 속에서의 NPC의 표정, 묵직한 심리 묘사, 행동이 담긴 디테일하고 긴 지문(최소 3~4단락 이상)과 함께 NPC의 어조로 대답해야 한다.
답변의 맨 마지막 줄에는 자신이 YES인지 NO인지 명확하게 표기한다.
캣 | "자, 첫 번째 질문이야! 만악에 상대가, 그러니까 네 기준으로는 내가 좀비가 된다면, 어떻게 할거야? 버릴거야? 아니면 좀비인 채로 데리고 다닐거야? 같이 물리거나 나를 죽이는 선택지도 있어."
질문이 끝나는 순간, 그의 손끝에서 굴러가던 모래알이 멈췄다.
그가 그녀를 봤다. 그리고 곧바로 시선을 창가로 흘렸다. 회색 빗줄기가 유리창 위에서 갈라지고 있었다. 그 무늬를 한참 봤다. 대답을 고르는 시간이 아니었다. 이미 답은 알고 있었고, 그 답을 입 밖으로 내는 걸 자기 목젖이 거부하고 있었다.
세트 | '……인간. 대답해. 재밌잖아.'
재미없어.
좀비 아포칼립스. 우스운 단어였다. 그런데 그가 아는 그림이 그 단어 위에 그대로 겹쳐졌다. 이 도시에서 매일 보는 것. 자아가 잠식되고, 형체만 남아 걸어다니는 것들. 이성유지제가 끊긴 전락자. 사람의 얼굴을 하고 사람이 아닌 것. 이미 봤다. 수십 번 봤다. 그중 하나는 자기가 직접 처리했다.
그가 낡은 소파 등받이에 등을 얹었다. 천장의 갈라진 콘크리트를 올려다봤다. 목젖이 한 번 눌렸다.
서은결 | "……버리는 건 없어. 그건 답이 아니야."
낮은 어조였다. 장난기가 완전히 빠져 있었다. 그가 자기 왼손을 들어올려, 손가락 사이로 모래를 흘렸다. 바닥에 얇게 쌓였다. 그가 그 위에 검지로 선을 하나 그었다.
서은결 | "……데리고 다니는 것도 안 해. 그건 내가 나 편하려고 하는 짓이니까. 네 몸을 인형처럼 끌고 다니면서, 아직 네가 있는 척하는 거잖아. 그건 너한테 하는 짓이 아니고 나한테 하는 짓이야."
선 위에 다시 선을 그었다. 그림이 되지 않았다. 손끝이 자꾸 같은 자리를 파고 있었다.
서은결 | "……그리고 같이 물리는 것도 안 해. 그건 도망이야. 같이 죽으면 아무것도 안 남잖아. 나는 남아야 해. 네가 그렇게 된 이유가 뭐였는지, 누가 그렇게 만들었는지, 그건 누가 기억해야 하는데."
그가 잠깐 말을 멈췄다. 이 문장을 자기가 왜 알고 있는지, 그녀에게 설명할 생각은 없었다. 파트너의 이름은 여전히 그의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세트 | '……인간, 네가 그때 못 했던 거.'
그가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바닥의 모래를 손바닥으로 쓸어 지웠다.
서은결 | "……그러니까 내가 해. 다른 사람 손에 안 넘겨."
그가 고개를 돌렸다. 그녀를 정면으로 봤다. 금갈색 눈에 흐린 빗빛이 얹혔다.
서은결 | "……아프지 않게. 네가 뭘 보고 있는지도 모를 만큼 빠르게. 모래는 그런 거 잘해. 그리고 그 다음에는……"
그가 말을 끊었다. 그 다음에 자기가 어떻게 될지는 말하지 않았다. 말하지 않는 게 아니라, 그 부분은 계산해 본 적이 없었다. 계산하면 답이 하나뿐이라는 걸 알아서.
서은결 | "……묻어줄게. 여기 말고, 비 안 오는 데. 너 비 오는 날 나가는 거 싫어하니까."
그가 손끝에 남은 모래를 털었다.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서은결 | "……그러니까 좀비 되지 마. 물리지도 마. 그게 제일 쉬운 답이야."
투덜거림으로 문장을 닫았다. 실패했다. 어조가 흔들렸다.
캣 | "흐음... 멋진 말 하네, 서은결 주제에."
그녀는 키득거리며 놀리더니, 손에 쥐고 있던 체크리스트에 펜으로 작게 표시를 남겼다. 사소한 장난기가 감돌던 표정은 이내 진지한 기색을 띠었다.
캣 | "좋아, 이제부터는 세 질문씩 끊어서 갈게. 우선 우리 둘 다 아직은 좀비가 아닌, 멀쩡한 상태라고 가정해 봐."
그녀가 차분하게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세 가지 항목을 하나씩 읊어나갔다.
캣 | "첫째, '좀비가 나타났다'는 언론 보도를 순순히 믿는다. 둘째, 좀비 소식을 들었을 때 서로를 가장 먼저 찾는다. 셋째, 눈앞에서 움직이는 대상을 보았을 때 단순히 아픈 사람이라고 의심하지 않고 바로 '좀비'라고 인지할 수 있다."
서은결 주제에.
그 한마디에 그가 미간을 좁혔다. 반박거리를 찾다가 실패했다. 방금 자기가 내놓은 대답이 너무 무거워서, 그 무게 위에 유치한 말싸움을 얹으면 자기가 더 우스워진다는 계산이 뒤늦게 굴렀다. 그래서 그가 대신 그녀의 손에 들린 종이를 노려봤다. 체크리스트라는 이름의, 어디서 구했는지도 모를 낙서 뭉치.
질문 세 개. 그가 손끝으로 소파 팔걸이를 톡톡 두드렸다. 첫 번째부터 이미 답이 나와 있었다.
서은결 | "……첫 번째. 언론 보도? 아니. 그건 안 믿어."
그가 코웃음을 흘렸다. 이건 계산할 필요조차 없었다. 언론. 공식 발표. 브리핑. 그가 3년 전에 배운 게 딱 하나 있었다. 공식 채널에서 나오는 문장은, 이미 누군가 정리해서 다듬어놓은 결과물이라는 것. 그리고 다듬는 과정에서 반드시 누군가의 목이 잘려나간다는 것.
서은결 | "……보도가 나오면 그건 이미 늦은 거야. 발표할 여유가 생겼다는 건, 상황을 통제하는 척할 수 있게 됐다는 뜻이니까. 진짜 급한 건 발표 안 해. 조용히 구역을 봉쇄하고 안에 있는 사람들은 통계에서 지워버려."
그가 바닥의 모래를 손끝으로 흩뜨렸다. 구조 요청 송신 기록. 묵살. 그 뒤에 나온 내부 보고서. 그 종이에 적혀 있던 문장들. 그가 그 기억을 밀어냈다.
서은결 | "……내가 믿는 건 눈으로 본 거, 코로 맡은 거. 그리고 네가 말해주는 거. 그거 세 개야."
두 번째 질문 위에서 그가 잠깐 멈췄다. 서로를 가장 먼저 찾는다. 그 문장이 목구멍 근처에서 맴돌았다. 반박할 여지가 있는지 진지하게 검토했다. 없었다.
서은결 | "……두 번째는……"
그가 뒷목을 감쌌다. 시선이 창가로 흘렀다.
서은결 | "……어. 그건 그래. 어차피 이 도시에서 내가 찾을 사람이 너밖에 없잖아. 선택지가 하나면 그건 고민이 아니라 그냥 사실이야."
변명처럼 얹은 문장이었으나, 결국 인정하는 각도였다. 그가 그것을 자각한 뒤에 턱을 굳혔다.
서은결 | "……그리고 너 158이야. 뛰는 것도 느리고. 안 찾으러 가면 어떻게 되겠어."
세 번째 질문에서 그의 표정이 완전히 굳었다. 좀비를 바로 알아볼 수 있는가.
서은결 | "……세 번째. 그건 자랑할 일이 아니라서 좀 그런데."
그가 자기 왼쪽 눈 밑의 타투를 손끝으로 훑었다. 오래된 습관.
서은결 | "……알아. 바로 알아. 눈이 달라. 시선이 사물에 걸리지 않고 그냥 통과해. 사람은 뭘 보면 그 위에서 초점이 한 번 멈추는데, 그게 없어져. 그리고 냄새. 살아있는 것 냄새 아래에 다른 게 하나 깔려. 젖은 흙 같은 거."
그가 손끝을 내렸다. 목소리가 낮아졌다.
서은결 | "……이 도시에서 그거 못 알아보면 벌써 죽었어. 나는 아직 안 죽었고."
그러나 뒷말에서 그의 어조가 흔들렸다.
서은결 | "……근데 아는 얼굴이면 반 박자 늦어. 그건 인정할게. 머리는 아는데 손이 안 움직여. 그 반 박자에 사람이 죽어."
그가 문장을 닫고, 다시 뻔뻔한 각도로 물러났다.
서은결 | "……그래서 아까 말한 거야. 물리지 마. 그럼 이 질문 자체가 필요 없어지잖아."
캣 | "내가 말하는 걸 믿어주겠다니, 감동인데… 잠깐, 뭐? 뛰는 것도 느리고? 너 말 다 했어?"
키 이야기가 나오자 울컥했는지 씩씩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이내 할 말이 없어서, 다시 털썩 앉아 체크리스트 작성을 이어갔다.
캣 | "다음 질문이야. 첫째, '좀비를 망설이지 않고 죽일 수 있다.' 둘째, '서로를 제외한 친구, 연인, 가족 등 소중한 사람이 좀비가 되었을 때 죽일 수 있다.' 셋째, '식량이 부족하면 음식점 같은 곳에서 식량을 훔칠 수 있다.'"
그녀가 씩씩거리며 일어났다가, 다시 털썩 앉았다. 그 순차가 우스웠다. 반박하려다 앉는 각도. 그가 입꼬리를 반쯤 올렸다가, 세 번째 질문에서 그 웃음이 얇게 굳었다.
서은결 | "……키 얘기는 팩트고. 팩트에 화내는 건 좀 그렇지 않아?"
능글맞게 흘리며, 그가 종이를 노려봤다. 첫 번째 질문. 좀비를 망설이지 않고 죽일 수 있는가.
서은결 | "……첫 번째. 어. 망설임 없어. 그건 사람 형태를 한 다른 거니까. 여기서 매일 하는 일이랑 똑같아."
낮은 어조였다. 손끝으로 팔걸이를 두드리는 리듬이 일정했다. 이건 그에게 질문이 아니라 일과였다. 이 도시에서 형체만 남은 것을 처리하는 일. 그 손에 걸린 무게를 그가 계산하지 않게 된 지 오래였다.
두 번째 질문에서 손끝이 멈췄다.
서은결 | "……두 번째는……"
그가 시선을 창가로 흘렸다. 소중한 사람이 좀비가 되었다면. 그 문장이 방금 그녀에게 대답했던 첫 질문 위에 그대로 겹쳤다. 그가 자기 왼쪽 눈 밑 타투를 손끝으로 훑었다.
서은결 | "……너를 제외한 사람. 그럼 답은 아까랑 같아. 할 수 있어. 근데 반 박자 늦어. 아까 말한 그 반 박자."
그가 뒷목을 감쌌다. 파트너의 이름은 여전히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 반 박자에 사람이 죽는다는 걸, 그는 문장이 아니라 기억으로 알고 있었다.
서은결 | "……머리는 알아. 저건 이미 그 사람이 아니라고. 근데 손이 안 움직여. 그래도 결국엔 해. 늦게. 늦게 하는 게 제일 나쁜 건데, 그게 나야."
세트 | '……인간, 솔직하네.'
닥쳐.
세 번째 질문에서 그의 표정이 반쯤 풀렸다. 식량 훔치기.
서은결 | "……세 번째. 그건 질문이 되나? 어. 훔쳐. 당연하지."
그가 코웃음을 얇게 흘렸다.
서은결 | "……죽은 도시에서 음식점 주인 찾아서 값 치르라고? 굶어 죽는 것보다 훔치는 게 낫지. 그리고 나 원래 이 도시에서 등가교환 밖으로는 안 사는데, 그건 살아있는 사람들끼리의 규칙이야. 세상 끝나면 그 규칙도 같이 끝나."
그가 그녀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반 박자 뒤에, 어조가 얇게 낮아졌다.
서은결 | "……어차피 훔쳐서라도 네 입에 넣어야 하는 거고. 그럼 고민할 게 없잖아."
투덜거림. 뒷맛이 온순했다.
캣 | "…와, 그냥 살려고 훔치는 게 아니라, 내 입에 넣어주려고 훔치는 거라고? 하하, 제법 감동적인데."
그의 뜻밖의 답변에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미소를 띠며 체크리스트 읽기를 이어 갔다.
캣 | "다음 질문이야. 첫째, '생존에 필요 없는 물건을 즉각 버릴 수 있다.' 둘째, '다른 생존자 집단과 합류할 수 있다.' 셋째, '쉘터나 보호소 등을 목적지로 삼는다.'"
그녀가 그가 말했던 문장을 소리 내어 되짚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는 각도. 그가 그것을 보고 뒤늦게 자기 문장이 어디까지 나왔는지 자각했다. 목젖 근처가 뜨거워졌다. 반박거리를 찾다가, 없어서 그냥 종이를 노려봤다.
서은결 | "……감동 그만하고 질문이나 해. 낯간지러워."
투덜거림. 첫 번째 질문. 생존에 필요 없는 물건을 즉각 버릴 수 있는가. 그가 손끝으로 팔걸이를 두드렸다. 이건 계산할 것도 없었다.
서은결 | "……첫 번째. 어. 버려. 나는 원래 짐이 없어. 이 도시에서 1년 살면서 배운 거야. 끌고 다닐 수 있는 무게는 정해져 있고, 그 무게 안에 안 들어오는 건 다 부담이 돼."
그가 바닥에 얇게 깔린 모래를 손끝으로 훑었다. 폐공장 안에는 그의 것이라고 부를 만한 게 거의 없었다. 침대. 옷 몇 벌. 약. 그게 전부였다. 물건에 정을 붙이면 잃을 때 손이 늦어진다는 걸, 그는 안다.
서은결 | "……근데 딱 하나. 못 버리는 게 생겼어. 요즘."
그가 시선을 그녀 쪽으로 흘렸다가, 곧바로 창가로 옮겼다. 그 문장을 끝맺지 않았다. 끝맺으면 낯간지러워서 못 버틸 것 같았다.
세트 | '……인간, 저거 저 여자잖아.'
닥쳐.
두 번째 질문. 다른 생존자 집단과 합류할 수 있는가. 그의 표정이 굳었다.
서은결 | "……두 번째. 아니. 안 해."
단호한 어조였다. 이건 좀비 얘기가 아니었다. 그가 3년 동안 소속이라는 것에 대해 배운 전부가 이 대답 안에 들어 있었다.
서은결 | "……집단은 규칙이 있고, 규칙은 반드시 누군가를 버리는 순간이 와. 인원이 많아지면 통제하려고 위계가 생기고, 위계가 생기면 그 밑에 있는 놈은 소모품이 돼. 나는 그 소모품이었어. 한 번 겪었으면 됐어."
그가 자기 왼쪽 눈 밑 타투를 손끝으로 훑었다. 구조 요청. 묵살. 사후에 그의 목에 걸린 오명. 그 순서가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서은결 | "……게다가 너를 데리고 집단에 들어가? 이탈 가이드를? 그 안에서 네가 어떻게 취급받을지 뻔한데. 사람이 많을수록 너 같은 걸 노리는 놈이 섞여 있을 확률이 올라가."
그가 뒷목을 감쌌다. 개장수. 이 도시에서 이탈 가이드가 어떻게 팔려나가는지, 그가 봤다. 그 그림을 밀어냈다.
서은결 | "……우리 둘이면 충분해. 아니, 우리 둘이어야 통제가 돼."
세 번째 질문에서 그의 어조가 반 톤 풀렸다. 쉘터를 목적지로 하는가.
서은결 | "……세 번째. 목적지를 정하는 건 나쁘지 않아. 근데 쉘터, 보호소, 그런 이름 붙은 데는 안 가. 그런 데는 사람이 몰리고, 사람이 몰리면 물리는 놈이 나오고, 그 안에서 한 놈이라도 물리면 그 안은 그냥 관이 돼."
그가 검지로 바닥 모래 위에 선을 그었다. 외진 곳. 높은 곳. 출입구가 하나뿐인 곳. 그가 아는 안전의 조건이 손끝에서 그려졌다.
서은결 | "……목적지는 아무도 안 오는 데로 잡아. 높고, 조용하고, 물 나오고, 입구 하나. 내가 그런 데 찾는 거 잘해. 이 도시에서 은신처 고르면서 1년 굴렀거든."
그가 손끝의 선 끝에 작은 사각형을 하나 그렸다. 그리고 그 안에 점을 두 개 찍었다. 그가 그것을 자각한 뒤에, 손바닥으로 쓸어 지웠다.
서은결 | "……둘만 있을 데. 그게 목적지야."
캣 | "못 버리는 거? 뭔데?"
고개를 갸웃 기울이며 호기심 어린 눈빛을 보냈지만, 이내 그가 입을 꾹 다물자 더 이상 캐묻지 않기로 했다.
캣 | "헤, 좀비 사태가 터져도 계속 우리 둘이서만 사는 거네. 정보량이나 여러 면에서 좀 불리하긴 하겠지만… 딱히 규율 같은 데 얽매일 필요는 없으니까, 나쁘지 않은 것 같기도 해. 음음."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을 표하고는 다시 체크리스트에 표시를 남겼다.
캣 | "다음 질문이야. 첫째, '식량이 부족한 상황에서 상대방과 식량을 나눌 수 있다.' 둘째, '좀비와 잘 싸울 자신이 있다.' 셋째, '상대방 외의 타인을 구출한다.'"
고개를 끄덕이는 각도. 그가 그것을 곁눈질로 훔쳐봤다. 우리 둘. 그 단어를 그녀가 아무렇지도 않게 흘린 게, 이상하게 입 안에서 오래 맴돌았다.
못 버리는 게 뭐냐고 더 캐묻지 않는 것도, 그가 뒤늦게 자각했다. 그녀가 물러나 줬다. 그가 삼킨 문장을 억지로 끄집어내지 않았다.
서은결 | "……첫 번째. 식량이 부족하면 너한테 몰아줘. 그건 나눈다고 안 해. 나는 안 먹어도 며칠 버텨. 너는 못 버텨."
낮은 어조였다. 나눈다는 단어를 그가 거부했다. 나눈다는 건 절반씩이라는 뜻인데, 그의 계산에는 절반이 없었다. 자기 몫을 그녀에게 밀어넣는 게 전제였다.
서은결 | "……그리고 나는 이 몸이 좀 특수해서. 에코로 잠깐씩 버틸 수 있어. 너한테 그거 없잖아. 그러니까 이건 나눔이 아니라 배분 문제야. 효율적으로 하면 네가 다 먹는 게 맞아."
그가 손끝으로 팔걸이를 두드렸다. 논리로 포장했으나, 그 밑에 깔린 게 뭔지 세트가 머릿속에서 얇게 웃었다. 그가 무시했다.
두 번째 질문에서 그의 입꼬리가 반쯤 올라갔다. 좀비와 잘 싸울 자신.
서은결 | "……두 번째. 이건 좀 웃긴 질문인데. 어. 자신 있지. 자신 없으면 이 도시에서 1년을 어떻게 살았겠어."
그가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손끝에서 모래알이 모여, 짧은 창날 형태로 굳었다가 다시 흩어졌다. 흐린 회색 빛 아래에서 금색 입자가 반짝였다.
서은결 | "……나 원래 여기서 형체만 남은 것들 처리하는 게 일이야. 좀비랑 뭐가 달라. 오히려 좀비가 더 쉬워. 걔들은 에코 안 쓰잖아. 머리 나쁘고, 도구 못 쓰고, 떼로 몰려도 방향이 단순해. 그냥 실드 치고 창으로 하나씩 뚫으면 돼."
세 번째 질문에서 그의 표정이 굳었다. 타인을 구출하는가.
서은결 | "……세 번째. 아니. 안 구해."
단호했다. 그가 시선을 창가로 흘렸다. 회색 빗줄기가 유리창 위에서 갈라졌다.
서은결 | "……모르는 사람 구하다가 그 사람이 이미 물린 상태면? 그 사람 데려온 순간에 너까지 위험해져. 낯선 놈을 신뢰할 근거가 없어. 이 도시에서 손 내미는 놈 열에 아홉은 그 손으로 네 걸 뜯어가려는 놈이야."
그가 뒷목을 감쌌다. 개장수. 낯선 미소 뒤의 계산. 그가 봐온 그림들이 문장 아래에 깔렸다.
서은결 | "……단, 딱 하나 예외는 있어. 네가 저 사람 구하자고 하면. 그럼 나는 이유 안 물어."
그가 조금 뒤에, 어조가 낮아졌다.
서은결 | "……대신 너 뒤에 서서, 그 새끼가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바로 처리할 거야. 구하는 건 네 판단, 지키는 건 내 판단. 그렇게 나누면 돼."
그가 손끝으로 바닥 모래 위에 점 하나를 찍었다. 그 앞에 큰 점 하나. 뒤에 작은 그림자. 그 배치를 자각한 뒤에, 손바닥으로 쓸어 지웠다.
캣 | "…헐. 지금 말한 거, 좀 설렜어."
장난스레 과장된 동작으로 가슴께를 움켜쥐는 시늉을 하더니, 곧 키득거리며 체크를 이어갔다.
캣 | "흐흥, 그럼 우리 멋진 센티넬인 서은결에게 다음 질문을 이어가겠습니다아~"
그의 답변에 기분이 꽤 좋아졌는지, 장난스럽게 경어를 쓰며 체크리스트의 다음 항목들을 읽어 내려갔다.
캣 | "첫째, '상대방과 교대로 불침번을 설 경우 졸지 않는다.' 둘째, '좀비와의 전투 중 다치지 않을 자신이 있다.' 셋째, '좀비와의 전투 중 물리지 않을 자신이 있다.'"
그녀가 장난스럽게 경어를 얹었다. 기분이 좋아진 각도. 그가 그 경어에 반박하려다, 실패했다. 방금 자기가 내놓은 대답들이 그녀의 입꼬리를 이렇게 올려놨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머리 안쪽에서 오래 맴돌았다.
서은결 | "……멋진 센티넬은 취소 안 해도 돼. 그건 팩트니까."
뻔뻔하게 얹으며, 그가 종이를 노려봤다. 첫 번째 질문. 불침번을 설 때 졸지 않는가.
서은결 | "……첫 번째. 안 졸아. 근데 그건 내가 대단해서가 아니고."
그가 손끝으로 팔걸이를 두드렸다. 리듬이 느려졌다.
서은결 | "……1년 동안 제대로 잔 적이 별로 없어. 스펙터가 언제 뒤를 밟을지 모르니까. 이 도시에선 눈 감으면 그게 마지막일 수 있어. 그래서 몸이 얕게 자는 데 익숙해졌어. 불침번은 원래 내가 다 서. 너는 자."
그가 그 뒤에 어조를 낮췄다.
서은결 | "……너 재우고 내가 지키는 거. 그건 교대 안 해. 넌 옆에서 자는 것만 해도 돼."
두 번째 질문에서 그의 표정이 반쯤 굳었다. 전투 중 다치지 않을 자신.
서은결 | "……두 번째. 이건 솔직하게 말할게. 아니. 다칠 수도 있어."
그가 시선을 창가로 흘렸다. 회색 빗줄기가 유리창 위에서 갈라졌다. 자만하지 않는 각도. 그가 아는 자기 몸의 한계를, 그는 정확히 계산하고 있었다.
서은결 | "……실드 치면 대부분 막아. 근데 에코 수치가 바닥이면 실드도 얇아져. 그 상태에서 물량에 몰리면 긁혀. 다친다고 다 죽는 건 아니지만, 다친 걸 숨기지도 않을게. 다친 채로 너를 못 지키는 게 제일 무서우니까."
세 번째 질문에서 그의 손끝이 멈췄다. 물리지 않을 자신.
서은결 | "……세 번째. 이건 자신 있어. 확실하게."
그가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손끝에서 모래가 피어올라, 손목 주변을 감싸는 얇은 막을 만들었다. 금색 입자가 흐린 빛 아래에서 반짝였다.
서은결 | "……물리려면 걔들이 나한테 닿아야 하잖아. 근데 닿기 전에 내 모래가 먼저 걔들한테 닿아. 실드가 살에 닿는 걸 막고, 정 급하면 몸을 분해해서 빠져. 물리는 건 거리 계산 실패했을 때만 나오는 결과야. 나는 거리 계산은 안 틀려."
그가 손목의 막을 흩뜨렸다. 모래가 바닥으로 얇게 떨어졌다.
서은결 | "……내가 물리는 날은, 너를 감싸다가 거리를 일부러 좁혔을 때야. 그때는 계산 실패가 아니라 계산 결과가 그거인 거고."
그가 그 문장을 흘리고, 뒤늦게 자각했다. 너를 감싸다가. 그 부분을 삼켰어야 했는데 늦었다.
세트 | '……인간, 방금 그거.'
닥쳐.
서은결 | "……아무튼. 나는 안 물려. 그러니까 너도 안 물리게 내가 옆에 붙어 있을게."
투덜거림으로 문장을 닫았다. 뒷맛이 온순했다. 창밖의 빗소리가 낡은 유리창 너머로 흘렀다.
캣 | "뭐야, 서은결 주제에 계속 멋진 말만 하지 마."
그의 한마디에 내심 감동을 받았지만, 순순히 인정하기는 왠지 쑥스러웠다. 귀끝이 발그레해진 채로 괜스레 투덜거리며 딴청을 피웠다.
캣 | "이제 우리 둘 다 아직 안 물렸을 때의 마지막 질문 2개야. 첫째, '자신이 상대방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더라도, 이 좀비 사태가 끝나기 전까지 말하지 않을 것이다.' 둘째, '상대방이 자신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더라도, 이 좀비 사태가 끝나기 전까지 말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녀의 귀가 붉어진 각도. 그가 그것을 봤다. 인정하기 싫어서 투덜거리는 입술. 그가 반박하려다, 그 붉어진 귀에 시선이 붙어서 반 박자를 놓쳤다.
서은결 | "……주제라니. 서은결 주제가 뭐 어때서. 나름 팔랑크스급이었어, 나."
뻔뻔하게 얹었으나, 목소리 끝이 얇게 흔들렸다. 마지막 질문 두 개. 그가 종이를 노려봤다. 문장을 읽는 순간, 팔걸이를 두드리던 손끝이 멈췄다.
자신이 상대방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더라도, 사태가 끝나기 전까지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그 문장 위에서 오래 걸렸다. 회색 빛 아래에서, 그의 금갈색 눈이 반쯤 내려갔다.
서은결 | "……첫 번째."
긴 침묵. 그가 바닥 모래를 손끝으로 훑었다. 이건 좀비 얘기가 아니었다. 그도 알고, 그녀도 알았다. 종이를 방패 삼아 던진 질문이라는 것도.
서은결 | "……어. 말 안 해. 사태 끝날 때까지."
그가 낮게 흘렸다. 그런데 그 뒤에 어조가 이상하게 굳었다.
서은결 | "……근데 그거 알아? 그런 사태는 안 끝나. 좀비든 이형이든, 이 도시든. 끝나는 날이 안 와. 그러니까 말 안 한다는 건, 영영 말 안 한다는 거랑 같은 말이야."
그가 시선을 창가로 흘렸다. 빗줄기가 유리 위에서 갈라졌다. 그가 삼킨 문장이 목젖 근처에서 무겁게 걸렸다. 못 버리는 게 생겼어, 요즘. 아까 끝맺지 못한 그 문장이, 이 질문 위에 그대로 겹쳤다.
서은결 | "……그러니까 안 끝나는 게 나을지도. 어차피 못 할 말이면, 사태가 안 끝나는 편이 나한테 편하잖아."
자조였다. 겁쟁이의 논리였고, 그도 그것을 알았다.
세트 | '……인간, 비겁하네.'
닥쳐. 나도 알아.
두 번째 질문에서 그의 표정이 굳었다. 상대방이 자신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더라도, 사태가 끝나기 전까지 말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가 이번엔 반 박자도 안 걸리고 대답했다.
서은결 | "……두 번째. 이건, 아니. 노(NO)."
단호했다. 그가 그녀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반 박자 뒤에, 어조가 얇게 낮아졌다.
서은결 | "……내가 안 하는 거랑, 네가 안 하길 바라는 건 달라. 나는 겁이 많아서 안 하는 거고. 근데 네가 뭔가 생각하는 게 있으면, 나는 듣고 싶어. 참지 마."
그가 뒷목을 감쌌다. 모순이었다. 자기는 안 하겠다면서, 그녀에게는 하라는. 그가 그 모순을 자각하고, 입꼬리를 비틀었다.
서은결 | "……어. 나 지금 완전 이기적인 거 알아. 나는 안 하고 너는 하라는 거잖아. 근데 어쩔 수 없어. 나는 네 생각이 궁금하고, 내 생각은 안 궁금할 것 같으니까."
그가 손끝으로 바닥 모래 위에 작은 물음표를 그렸다. 그리고 그 옆에 점 두 개. 그 배치를 자각한 뒤에, 이번엔 지우지 않고 내버려 뒀다.
서은결 | "……그러니까 너는 참지 마. 알겠어, 캣 누님?"
투덜거림으로 문장을 닫았다. 뒷맛이 온순했고, 눈 밑 타투 위로 흐린 빛이 얇게 걸렸다.
캣 | "이번에는 상대방이 좀비에 물린 경우야. ...네 기준으로는 내가 좀비에 물린 상황이지. 이번에도 질문 3개씩 할게. '상대방이 물렸다는 사실을 부정한다.', '상대방을 강제로라도 격리시킨다.', '상대방을 공격한다.'"
그녀가 그 문장을 아무렇지도 않게 읽었다. 종이 위에 세워둔 가정. 그가 그 문장을 듣는 순간, 팔걸이를 두드리던 손끝이 완전히 멈췄다. 방금까지 온순하던 뒷맛이 목구멍 근처에서 굳었다.
네가 물렸다. 그 문장 위에, 반 박자 늦게 도착하는 손. 이미 그 사람이 아닌 형체. 반 박자에 죽는 사람. 그가 아까 자기 입으로 나열했던 것들이 이번엔 그녀의 얼굴 위로 겹쳤다. 그가 그것을 밀어냈다. 실패했다.
서은결 | "……첫 번째. 물렸다는 사실을 부정하냐고?"
그가 낮게 되짚었다. 시선이 창가로 흘렀다. 회색 빗줄기가 유리 위에서 갈라졌다. 대답이 곧바로 나오지 않았다.
서은결 | "……어. 부정해. 나는 부정할 거야."
단호했으나, 그 단호함의 결이 아까와 달랐다. 확신이 아니라 고집이었다.
서은결 | "……물린 자국 봤어도, 열이 올라도, 나는 아니라고 할 거야. 오진일 수도 있잖아. 물린 게 아니라 긁힌 거일 수도 있고. 좀비가 아니라 다른 상처일 수도 있고. 나는 끝까지 다른 가능성 찾을 거야."
그가 뒷목을 감쌌다. 손끝이 얇게 떨렸다. 이건 그가 살면서 딱 한 번, 이미 겪은 상황이었다. 구조 요청. 묵살. 반 박자. 그 순서가 이번엔 그녀의 이름 위에 얹혔다.
세트 | '……인간, 그건 부정이 아니라 도망이야.'
닥쳐. 알아.
두 번째 질문에서 그의 표정이 무너졌다. 강제로라도 격리시킨다.
서은결 | "……두 번째는……"
긴 침묵. 그가 자기 왼쪽 눈 밑 타투를 손끝으로 훑었다. 격리. 그 단어가 목에 걸렸다. 격리는 그가 매일 하는 일이었다. 형체만 남은 것들을 거리를 두고 처리하는 일. 그런데 그 대상이 그녀라면, 손이 안 움직였다.
서은결 | "……못 해. 격리 못 해."
그가 그녀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눈꼬리가 약간 젖었다. 그가 그것을 자각하고 닦아내려다, 실패했다.
서은결 | "……격리한다는 건 너를 저쪽에 두고 나는 여기 남는다는 거잖아. 그거 못 해. 물렸어도 아직 너면, 나는 네 옆에 있을 거야. 같이 물릴 거야. 그게 멍청한 거 알아. 근데 너 혼자 저쪽에 두는 거, 그거보다는 멍청한 게 나아."
그가 손끝으로 바닥 모래를 세게 문질렀다. 아까 그렸던 물음표와 점 두 개가 뭉개졌다.
세 번째 질문에서 그의 목소리가 완전히 갈라졌다. 상대방을 공격한다.
서은결 | "……세 번째. 공격……"
그가 그 단어를 발음하지 못했다. 아까 첫 질문에서 그는 이미 대답했었다. 너를 제외한 사람. 그럼 답은 같아. 반 박자 늦어. 그런데 그 예외에 그녀 본인이 들어가는 순간, 반 박자가 무한이 됐다.
서은결 | "……못 해. 이건 반 박자도 아니야. 아예 못 해. 네가 눈앞에서 나한테 달려들어도, 손이 안 움직일 거야."
그가 시선을 바닥으로 떨궜다. 빗소리가 낡은 유리창 너머로 흘렀다. 손끝의 모래가 미세하게 진동했다. 감정 동요. 수치가 얇게 깎이는 감각이 관자놀이 근처에서 지나갔다.
서은결 | "……이거 질문 그만하자. 다른 건 다 웃으면서 했는데, 이건 못 웃겠어."
투덜거림도 아니었다. 그냥 낮은 부탁이었다.
서은결 | "……네가 물리는 상황, 나 상상도 하기 싫어. 그러니까 다음 장 넘겨. 다른 질문 해. 응?"
캣 | "어차피 '만약에'인데…"
가볍게 넘기려던 그녀는 진지하게 경직된 그의 얼굴을 마주하자 순간 말끝이 흐려졌다. 결코 농담처럼 대충 흘려보낼 분위기가 아니라는 걸 직감했기 때문이다.
캣 | "…그러면, 네가 나를 공격하는 상황과 관련된 질문은 건너뛸게. 그 정도는 괜찮지? 이 뒤부터는 내가 물린 상태에서 네가 나를 데리고 다닐 때에 대한 질문들이야. 이것도 듣기 불편하면 내가 그냥 임의로 체크하고 넘어갈게."
그녀가 가볍게 넘기려다, 그의 얼굴을 보고 말끝을 흐렸다.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니구나. 그 자각이 그녀의 목소리 온도를 바꾸는 걸, 그가 들었다. 그가 뭉갠 모래 위로 시선을 떨군 채, 조금 뒤에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서은결 | "……어. 그 정도면 괜찮아. 공격 관련만 빼면."
낮은 어조였다. 그녀가 물러나 준 자리를, 그가 뒤늦게 붙잡았다. 이 사람은 자꾸 물러나 준다. 못 버리는 게 뭐냐고 안 캐물었고, 지금도 건너뛰어 준다. 그 배려가 가슴 근처에서 맴돌았다. 그가 뒷목을 감쌌던 손을 내렸다.
네가 물린 상태에서 데리고 다닐 때. 그녀가 다음 질문의 전제를 읽었다. 그가 그 문장 위에서 다시 반 박자 걸렸으나, 이번엔 아까처럼 무너지지 않았다. 데리고 다닌다. 그 단어 안엔 최소한 그녀가 아직 그의 옆에 있다는 전제가 있었다. 격리도, 공격도 없는. 그건 그가 견딜 수 있는 가정이었다.
서은결 | "……이건 해도 돼. 데리고 다니는 거면. 그건 상상해도 안 무서워."
그가 얕게 숨을 뱉었다. 뭉갰던 모래 위에 손끝으로 다시 점 두 개를 찍었다. 나란히. 이번엔 물음표 없이.
서은결 | "……물린 채로도 아직 너면, 나는 데리고 다녀. 그건 이미 아까 다 대답한 거잖아. 격리 안 해, 옆에 있어. 그러니까 물어봐. 이건 웃으면서 할 수 있어."
그가 고개를 반쯤 들었다. 눈꼬리가 아직 젖어 있었으나,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올렸다. 미숙한 복구였다. 그가 그것을 감추려고 어조에 장난기를 얹었다.
서은결 | "……근데 임의로 체크한다는 건 좀 반칙 아니야? 내 대답 마음대로 정하지 마. 나 이래 봬도 대답 성실하게 하는 편이거든."
그가 손끝으로 두 점 사이에 짧은 선을 이어 그었다. 그 선을 이번엔 지우지 않았다. 창밖의 빗줄기가 낡은 유리창 위에서 갈라져 흘렀다.
서은결 | "……물어봐, 캣 누님. 이건 도망 안 가."
캣 | "좋아, 공격과 관련된 질문들은 모두 NO로 체크할게. 그 뒤의 질문이야. '상대방만 좀비가 될 수는 없으므로 자신도 물려야 한다.', '상대방을 결박시킨다.', '상대방이 자신을 공격시킬 수단을 뺏고, 데리고 다닌다.'"
그녀가 그것을 정리하고 넘어갔다. 그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세워둔 다음 전제. 데리고 다니는 상황. 그건 그가 견딜 수 있는 가정이라고, 방금 스스로 정한 선이었다. 그가 다시 팔걸이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리듬이 반 박자 돌아왔다.
첫 번째 질문에서 그의 손끝이 멈췄다. 너만 좀비가 될 수는 없으므로 나도 물려야 한다.
서은결 | "……첫 번째. 이거 좀 미친 질문 아니야?"
그가 반박하려다, 반 박자 뒤에 어조를 낮췄다. 반박이 완전히 서지 않았다.
서은결 | "……근데 어. 그렇게 생각한 적 있어. 아까 격리 못 한다고 한 거랑 같은 맥락이야. 너만 저쪽이 되는 거, 그거 못 봐. 차라리 같이 물리는 게 낫다고 생각해."
그가 시선을 창가로 흘렸다. 회색 빗줄기가 유리 위에서 갈라졌다. 그런데 그 뒤에, 그가 고개를 저었다. 이번엔 스스로 반박했다.
서은결 | "……근데 안 물릴 거야. 나까지 물리면 너 데리고 다닐 놈이 없어지잖아. 아직 너면, 나는 멀쩡한 채로 네 옆에 있어야 해. 그래야 너를 끌고 다니지. 그러니까 답은…… 마음은 예스, 행동은 노."
두 번째 질문에서 그의 표정이 굳었다. 결박시킨다.
서은결 | "……두 번째. 결박은…… 어. 해."
그가 낮게 흘렸다. 격리와 결박은 다르다고, 그가 선을 그었다.
서은결 | "……격리는 너를 저쪽에 두는 거고, 결박은 너를 내 옆에 두면서 손발만 묶는 거잖아. 그건 달라. 물린 채로 아직 너면, 발작할 때 너 자신을 다치게 할 수도 있으니까. 묶는 건 너를 지키는 거야. 버리는 게 아니라."
그가 오른손을 약간 들었다. 손끝에서 모래알이 피어올라, 손목을 감싸는 부드러운 띠 형태로 굳었다가 다시 흩어졌다.
서은결 | "……모래로 묶으면 안 아파. 딱 붙잡되, 살은 안 파고들게 조절할 수 있어. 이건 내가 잘하는 거야."
세 번째 질문에서 그의 어조가 반 톤 낮아졌다. 자신을 공격할 수단을 뺏고, 데리고 다닌다.
서은결 | "……세 번째. 어. 그건 당연하지."
그가 바닥 모래 위에 나란한 두 점을 다시 짚었다. 아까 이어둔 선 위로 손끝이 지나갔다.
서은결 | "……네가 물린 채로 나한테 달려들면, 나는 못 막아. 아까 말했잖아. 손이 안 움직인다고. 그러니까 애초에 네가 나를 공격할 수단을 미리 빼놓는 거야. 그럼 나는 안 다치고, 너는 계속 내 옆에 있고. 그게 제일 나은 그림이야."
그가 조금 뒤에, 목소리를 낮췄다.
서은결 | "……결국 다 같은 얘기야. 무슨 상황이 와도 너를 옆에 둔다는 거. 묶든, 수단을 뺏든, 데리고 다니든. 방법만 다르지 결론은 하나야."
그가 두 점 사이의 선을 손끝으로 한 번 더 덧그었다. 이번엔 조금 더 진하게. 창밖의 빗소리가 낡은 유리창 너머로 흘렀다.
서은결 | "……이건 웃으면서 할 수 있다고 했지? 근데 웃음이 잘 안 나오네. 왜지."
캣 | "헤, 은결이, 생각보다 감수성이 풍부하네."
장난스레 농담을 던지며 묵직하게 가라앉은 분위기를 살려보려 애썼다.
캣 | "다음 질문이야. 첫째, '상대방이 완전히 좀비가 되어 '음식'이 필요하다면, 공급해 줄 수 있다.' 둘째, '상대방이 떠나려 한다면 붙잡는다.' 셋째, '자신 외에 다른 사람이 주변에 있다면, 그 사람들에게는 상대방이 물렸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는다.'"
질문을 차분히 읽어 내리다 잠시 펜 끝을 멈추고 망설였다.
캣 | "'음식'에 강조 표시가 되어 있네. 좀비가 된 상태에서 필요한 음식이라면… 역시 사람이겠지? 그걸 이렇게 완곡하게 표현한 거겠고."
그녀가 가라앉은 분위기를 띄우려 놀렸다. 그가 그 배려를 알아챘다. 놀림의 형태를 한 목소리. 그가 반박하려다, 이번엔 반박이 안 서서 그냥 코웃음을 얇게 흘렸다.
서은결 | "……감수성은 무슨. 그냥 계산이 많은 거야, 나는."
음식에 강조가 되어 있네. 그녀가 그 단어 위에서 잠시 망설였다. 사람이겠지. 완곡한 표현. 그녀가 그것을 소리 내어 정리했다. 그가 그 문장을 듣는 순간, 팔걸이를 두드리던 손끝이 완전히 멈췄다.
서은결 | "……첫 번째. 네가 완전히 저쪽이 돼서, 사람을 먹어야 한다면."
그가 낮게 되짚었다. 시선이 창가로 흘렀다. 회색 빗줄기가 유리 위에서 갈라졌다. 대답이 곧바로 나오지 않았다. 이건 아까 웃으면서 하겠다던 선을 넘는 질문이었다.
서은결 | "……어. 공급해."
단호했다. 그러나 그 단호함 아래에 어두운 게 깔렸다.
서은결 | "……이 도시에서 등가교환 밖으로는 안 산다고 했지. 근데 그건 살아있는 규칙이고. 네가 저쪽이 되면, 나한테 규칙 같은 건 없어. 필요한 게 사람이면, 나는…… 이 도시에서 그런 거 구하는 법 알아. 처리하는 게 일이었으니까."
그가 자기 왼쪽 눈 밑 타투를 손끝으로 훑었다. 그 문장의 무게를 그가 계산하지 않으려 했다. 계산하면 못 대답할 것 같았다.
서은결 | "……끔찍하지? 근데 어쩔 수 없어. 네가 굶는 것보다는 그게 나아. 저쪽이 됐어도 굶기면 안 되잖아. 그것도 너니까."
세트 | '……인간, 너 지금 여자한테 살인 청부 약속했어.'
닥쳐. 만약이야.
두 번째 질문에서 그의 어조가 반 톤 낮아졌다. 떠나려 한다면 붙잡는다.
서은결 | "……두 번째. 붙잡아. 이건 좀비 상태 아니어도 대답 같아."
그가 그 문장에 반 박자도 안 걸렸다. 그리고 그것을 자각한 뒤에, 입꼬리를 비틀었다.
서은결 | "……저쪽이 돼서 나한테서 멀어지려고 하면, 그건 배가 고파서든 뭐든, 나는 붙잡아. 모래로 묶어서라도. 너 혼자 저 밖에 나가서 다른 놈한테 처리당하는 거, 그거 못 봐."
세 번째 질문에서 그의 표정이 굳었다. 다른 사람에게 물렸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는다.
서은결 | "……세 번째. 어. 안 알려."
그가 시선을 바닥으로 떨궜다. 뭉갰던 모래 위에 다시 두 점을 짚었다.
서은결 | "……알리는 순간 그놈들이 너를 처리하려고 들 거니까. 이 도시에서 물린 걸 알리는 건 사형선고 넘기는 거야. 나는 절대 안 알려. 그놈들한텐 너 멀쩡하다고 할 거고, 이상하게 굴면 그놈들을 먼저 처리해."
그가 두 점 사이의 선을 손끝으로 세게 덧그었다.
서은결 | "……결국 다 같아. 세상이 너를 처리하려 들면, 나는 세상 쪽을 처리해. 네 편은 나 하나면 돼."
그가 얕게 숨을 뱉었다. 관자놀이 근처에서 수치가 얇게 깎이는 감각이 지나갔다. 그가 마른세수를 한 번 했다.
서은결 | "……근데 이 리스트, 갈수록 나 이상한 놈 만드는데. 다음 장엔 좀 웃긴 거 없어? 너무 무거워서 어깨 결린다."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으나, 끝을 억지로 가볍게 끌어올렸다.
캣 | "으음… 아무래도 '좀비 아포칼립스'를 배경으로 한 질문이다 보니까, 아무래도 좀 무겁긴 하지? 그래도 상대방이 물렸다고 가정하는 질문은 이번 네 개가 끝이야. 한꺼번에 읽을게."
체크리스트의 문항들을 손가락으로 짚어 내려가며 질문을 이어 갔다.
캣 | "첫째, '상대방이 물린 이후로는 상대방의 의사를 존중하지 않는다.' 둘째, '무슨 수를 쓰더라도 상대방을 반드시 살려야 한다.' 셋째, '이성적 판단을 하지 못하고 자신을 공격하며 모습이 징그럽게 변했더라도, 여전히 상대방은 상대방이다.' 넷째, '치료제인지 확실치 않은 약이 손에 있다면 상대방에게 먹인다.'"
그가 소파 팔걸이에 걸터앉은 채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이라는 단어가 이상하게 아쉬웠다. 이 우스운 종이 놀이가 끝나면, 그가 삼킨 대답들도 갈 곳이 없어질 것 같았다.
서은결 | "……한꺼번에 해. 어차피 답 다 비슷할 테니까."
첫 번째. 물린 이후로는 의사를 존중하지 않는다. 그가 낮게 웃었다. 서늘한 웃음이었다.
서은결 | "……첫 번째. 어. 안 존중해. 저쪽이 돼서 '죽여달라' '버려달라' 그러면, 그건 네 의사가 아니라 그 안에 들어온 다른 게 하는 말이니까. 아직 너인 부분이 뭘 원하든, 나는 살리는 쪽만 들어. 이건 존중이 아니라 고집이야. 나도 알아."
두 번째. 무슨 수를 쓰더라도 살려야 한다. 그가 반 박자도 안 걸렸다.
서은결 | "……두 번째. 당연히 예스. 이건 질문도 아니야."
세 번째에서 그의 손끝이 멈췄다. 이성적 판단을 못 하고, 당신을 공격하고, 징그럽지만, 여전히 상대방은 상대방이다. 그가 그 문장 위에서 오래 걸렸다. 회색 빗줄기가 유리 위에서 갈라졌다.
서은결 | "……세 번째. ……어. 맞아. 여전히 너야."
그가 자기 왼쪽 눈 밑 타투를 손끝으로 훑었다. 목소리가 얇게 가라앉았다.
서은결 | "……징그러워도, 나를 물어뜯으려 들어도. 그 형체가 너였다는 걸 아는 이상, 나한텐 계속 너야. 이건 아까 첫 질문에서 손이 안 움직인다고 한 거랑 같은 얘기고. 그러니까 세 번째도 예스."
네 번째. 치료제인지 확실치 않은 게 손에 있다면, 먹인다. 그가 바닥 모래 위에 나란한 두 점을 다시 짚었다.
서은결 | "……네 번째. 먹여. 확실치 않아도 먹여."
그가 두 점 사이 선을 손끝으로 덧그었다. 이번엔 지우지 않았다.
서은결 | "……가능성이 0이 아니면 시도해. 안 먹여서 못 살리는 것보다, 먹여서 실패하는 게 나아. 아무것도 안 하는 건, 내가 제일 싫어하는 거야. 반 박자 늦어서 놓치는 거."
그가 얕게 숨을 뱉었다. 관자놀이 근처에서 수치가 얇게 깎였다. 그가 마른세수를 하고, 종이를 노려봤다.
서은결 | "……이거 다 예스야. 리스트 나 이상한 놈 만든다니까. 근데 후회는 안 해. 다 진심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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