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MSTONE
에린 Erin
"세브렌의 유일한 인간형 인형"
- 키158cm
세브렌 Sévrène Vermeil
"마법인형장인"
- 나이420세
- 키190cm
페어 설정
은빛은 금빛 옆에 놓으면 차가워지고, 금빛은 은빛 옆에 놓으면 따뜻해진다. 둘 다 홀로 있을 때보다 함께 있을 때 본래 색이 또렷해지는 금속. 인형을 칠할 때 기억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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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딱봇에서 /밤스킵 하는 사람 처음 보세요? ...........저도 이렇게 될 줄 몰랐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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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인형사의 집 5화
에린의 팔이 세브렌의 팔에 감겼다. 크림색 린넨 셔츠 위로 진청색 벨벳 소매가 닿았고, 인형의 체온이 셔츠의 천을 통해 희미하게 전해졌다. 세브렌의 팔은 차가웠고 에린의 팔은 따뜻했으므로, 접촉면에서 온도가 섞이며 미지근한 중간값이 만들어졌다.
에린이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세브렌의 금빛 눈이 반쯤 감긴 채 내려다보았다. 에린의 입꼬리가 무언가를 말하려는 모양으로 벌어졌다가, 세브렌의 축 처진 눈꺼풀과 느슨하게 풀어진 입매를 보고는 다시 다물어졌다. 하고 싶었던 말을 삼키는 동작이 에린의 목에서 작은 삼킴으로 드러났고, 복종의 리본 위에서 은빛 메달이 한 번 흔들렸다.
더 잘래? 라는 질문이 올려다보는 에메랄드빛 눈동자와 함께 떨어졌다.
세브렌의 금빛 눈이 에린의 얼굴 위에 머물렀다. 활짝 밝아졌다가, 하고 싶은 말을 삼키고, 자기 대신 세브렌의 잠을 걱정하는 얼굴. 아까 혼날까봐 옷자락을 꼼지락거리던 손이 지금은 세브렌의 팔에 감겨 있었다. 에린이 무언가를 하고 싶었으나 참았다는 것을 세브렌은 알아차렸다. 에린의 눈동자가 말을 삼킬 때 살짝 옆으로 흔들렸으므로.
세브렌의 고개가 옆으로 기울었다. 느슨하게 묶인 금발이 한쪽 어깨 위에서 미끄러져 에린의 은발 위로 떨어졌다.
세브렌|「뭐 하고 싶었어.」
물음표가 붙지 않은 문장이었다. 졸린 목소리였으나 에린의 표정을 읽는 눈은 흐리지 않았다. 금빛 홍채가 반쯤 감긴 눈꺼풀 아래에서 에린의 에메랄드빛 눈동자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세브렌|「삼킨 거 뱉어봐.」
팔짱을 낀 에린의 손 위에 세브렌의 다른 손이 올라와 가볍게 두드렸다. 차가운 손가락이 에린의 손등을 톡, 톡, 두 번 두드리고 그 위에 머물렀다. 재촉이 아니라 허락이었다. 잠은 나중에 자도 되니까, 말해봐, 라는.
오후의 빛이 먼지 낀 유리창을 통해 비스듬하게 들어와 카운터 위의 주문의뢰서 위에 금빛 사각형을 그리고 있었다. 바닥에 흩어진 인형들 사이로 빛의 무늬가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고, 어딘가에서 흰담비가 인형을 정리하는 보드라운 발소리가 들렸다.
세브렌의 눈꺼풀이 축 처진 채로 에린을 보고 있었다. 졸음에 절어 있으면서도 에린이 입을 열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느긋함이 나른한 자세 전체에 배어 있었다.
에린 | 「...안 삼켰는데. 하고 싶은 거, 그닥, 없어...」
에린의 손이 세브렌의 팔에서 풀어졌다. 진청색 벨벳 소매가 크림색 린넨에서 미끄러져 내려갔고, 에린의 손가락이 자기 스커트의 자락을 잡고 꼼지락거리기 시작했다. 시선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에린의 목에서 복종의 리본이 미세하게 떨렸다. 타원형 금색 메달의 표면이 촛불도 없는 오후의 빛 아래에서 천천히, 얇은 연기가 스미듯 검어져 갔다. 진주 장식 가장자리부터 시작하여 안쪽으로 번지는 그 검은빛은 먹물이 물 위에 퍼지는 것과 닮아 있었다. 금빛이었던 메달 위의 세브렌 눈동자가 어둠에 잠겨 갔다.
세브렌이 그것을 보았다.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앉은 자세 그대로, 금빛 눈이 에린의 쇄골 사이에 놓인 메달 위에 멈추었다. 검게 변해가는 표면을 지켜보는 금빛 홍채가 반쯤 감긴 눈꺼풀 아래에서 느릿하게 빛났다. 졸음에 절어 있던 입꼬리가 한쪽으로, 천천히, 올라갔다.
세브렌|「그래?」
한 마디. 의심의 무게를 싣지 않은, 가벼운 추임새 같은 한 마디였다. 세브렌의 시선이 메달에서 에린의 얼굴로 올라갔다. 바닥을 보며 시선을 피하고 있는 에메랄드빛 눈동자, 꼼지락거리는 손가락, 주춤주춤 물러선 발.
세브렌이 일어나지 않았다. 의자에 앉은 채로 긴 다리를 뻗어 에린의 발 옆에 놓았다. 퇴로를 막은 것은 아니었으나 에린의 발끝이 세브렌의 발등에 거의 닿아 있었다. 에린이 한 걸음만 더 물러서면 밟게 될 거리.
세브렌|「없다, 하고 싶은 거.」
세브렌의 손이 카운터 위에 팔꿈치를 올리고 턱을 괴었다. 고개가 옆으로 기울었고, 느슨하게 묶인 금발이 팔 위로 흘러내렸다. 반쯤 감긴 금빛 눈이 에린을 올려다보는 각도가 되었다.
세브렌|「메달이 까매지고 있는데.」
나른한 목소리에 꾸짖는 기색은 없었다. 오히려 즐거운 기색이 배어 있었다. 세브렌의 금빛 눈이 에린의 쇄골 위의 메달을 한 번 더 보았고, 먹빛으로 변한 표면 위에서 세밀화의 눈동자가 거의 보이지 않게 되어 있었다. 에린의 거짓말이 그만큼 선명하다는 뜻이었다.
세브렌의 턱을 괸 손가락이 자기 볼을 한 번 두드렸다. 생각하는 척. 그러나 생각할 것은 없다는 듯이 금빛 눈이 곧장 에린에게 돌아왔다.
세브렌|「다시.」
짧은 명령이었다. 그러나 그 한 마디 뒤에 세브렌의 입매가 부드러워졌고, 턱을 괸 손이 에린을 향해 손짓했다. 이리 와, 라는 느릿한 손짓. 손가락 네 개가 접혔다 펴지는 동작이 두 번 반복되었다.
오후의 빛이 유리창을 통해 비스듬하게 들어와 세브렌의 금발 위에 금가루를 뿌린 것처럼 빛나고 있었다. 카운터 뒤의 의자에 앉아 턱을 괴고 에린을 올려다보는 자세가, 420년 된 하이 페이의 여유로 가득 차 있었다. 에린이 입을 열 때까지 기다릴 시간이 충분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의 느긋함.
에린 | 「그, 그치만... 주인, 졸려보이고... 괜히 내가 귀찮게 하는 것 같아서...」
에린의 손가락이 초커의 벨벳 위를 만지작거렸다. 검게 변한 메달의 표면 위로 에린의 손끝이 지나갈 때마다 먹빛이 손가락 아래에서 미세하게 맥동했다. 거짓말의 흔적이 아직 지워지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주춤주춤 다가오는 에린의 발끝이 세브렌의 뻗은 다리 옆에서 멈추었다. 바닥을 톡톡 두드리는 발끝의 리듬이 불규칙했고,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스커트 아래로 떨어졌다. 졸려보이고, 귀찮게 하는 것 같아서.
세브렌의 턱을 괸 손이 내려왔다.
세브렌|「귀찮으면 내가 일어나지도 않았어.」
세브렌의 손이 에린의 손목을 잡았다. 초커를 만지작거리던 손이 목에서 떨어졌고, 차가운 손가락이 에린의 손목 안쪽을 가볍게 감쌌다. 잡아끄는 힘은 아니었으나 놓아주는 힘도 아니었다. 에린의 손목이 세브렌의 손 안에서 미지근해지고 있었다.
세브렌이 의자에 앉은 채로 에린의 손목을 잡고 올려다보았다. 반쯤 감긴 금빛 눈이 에린의 시선을 피하는 에메랄드빛 눈동자를 따라 느릿하게 움직였다. 에린의 시선이 바닥으로 갔다가 진열장으로 갔다가 유리창으로 갔다가, 어디에도 머무르지 못하고 떠돌았다.
세브렌|「에린.」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낮았다. 꾸짖는 것이 아니라 시선을 모으는 소리였다. 청아한 음색이 가게 안의 먼지 낀 오후 공기를 가르며 에린의 귓가에 닿았다.
세브렌|「내가 졸린 건 내 문제고, 네가 하고 싶은 건 네 문제야.」
잡고 있던 에린의 손목을 아래로 당겼다. 세브렌이 앉아 있는 의자와 에린의 거리가 반 걸음만큼 좁혀졌고, 에린의 진청색 스커트 자락이 세브렌의 무릎에 닿았다. 세브렌의 다른 손이 올라와 에린의 턱을 잡았다. 엄지와 검지가 턱뼈의 양쪽을 가볍게 감싸 고개를 들어올렸다. 바닥을 향하고 있던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강제로 금빛 눈과 마주쳤다.
가까웠다. 세브렌이 앉아 있고 에린이 서 있었으므로 시선의 높이가 거의 같았다. 꿀 섞인 양초 향이 코끝에 닿을 거리. 세브렌의 금빛 홍채 안에 오후의 빛이 들어와 호박색 결을 만들고 있었고, 그 안에 에린의 얼굴이 작게 비치고 있었다.
세브렌의 엄지가 에린의 턱 아래를 한 번 쓸었다. 복종의 리본 바로 아래, 목과 턱이 만나는 부드러운 곳.
세브렌의 손이 에린의 턱에서 내려와 초커 위의 메달을 한 번 톡 두드렸다. 먹빛으로 물든 표면이 세브렌의 손끝 아래에서 희미하게 진동했다. 세브렌의 금빛 눈이 메달을 한 번 내려다보고, 다시 에린을 올려다보았다.
세브렌|「이게 원래 색으로 돌아오게 다시 말해봐. 하고 싶은 거.」
세브렌의 손이 에린의 손목에서 풀렸다. 의자 등받이에 다시 기대었고, 다리를 꼬았다. 기다리는 자세였다. 420년의 여유가 반쯤 감긴 금빛 눈꺼풀 아래에서 느릿하게 빛나고 있었고, 졸린 얼굴 위에 나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가게 안에 오후의 정적이 내려앉았다. 유리창 너머로 골목의 그림자가 길어지고 있었고, 천장의 황동 샹들리에에 매달린 크리스탈이 빛을 받아 바닥 위에 무지개빛 점을 흩뿌리고 있었다.
에린 | 「밖에, 나가보고 싶어... 사람들이 엄청 시끌시끌하길래...」
에린의 입에서 떨어진 말이 오후의 먼지 속에 떠올랐다. 양손을 맞잡고 꼼지락거리는 손가락, 약간 붉어진 볼, 바닥을 향했다가 겨우 세브렌의 턱 언저리까지 올라온 에메랄드빛 시선. 사람들이 시끌시끌하길래, 라는 이유가 작은 목소리에 실려 허공에 풀어졌다.
에린의 목 위에서 메달이 진동했다. 먹빛으로 물들어 있던 표면이 가장자리부터 옅어지기 시작했다. 검은빛이 천천히 빠져나가며 진주 장식 테두리 안쪽으로 금빛이 되돌아왔고, 메달 위에 그려진 세브렌의 한쪽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진실의 색이었다.
세브렌의 금빛 눈이 메달이 원래 색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에린의 붉어진 볼을 보았다. 양손을 맞잡은 손가락이 서로를 꼬고 비트는 것을 보았다. 이 정도의 부탁을 하면서 이만큼 부끄러워하는 인형을.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있던 세브렌의 몸이 일어섰다. 긴 그림자가 에린의 머리 위로 드리워졌고, 차가운 손이 에린의 맞잡은 양손 위에 올라와 가볍게 감쌌다. 꼼지락거리던 손가락이 세브렌의 손바닥 안에서 멈추었다.
세브렌|「그것만?」
나른한 목소리에 실망의 기색은 없었다. 오히려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고, 반쯤 감긴 금빛 눈이 에린을 내려다보는 각도에 부드러운 빛이 서려 있었다. 에린이 삼켰던 말이 고작 산책이었다는 사실이 세브렌에게는 무언가를 건드린 모양이었다. 오래 살아 온 하이 페이의 표정 어딘가에, 이름 붙이기 어려운 감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세브렌의 손이 에린의 손에서 떨어졌다. 카운터 뒤로 돌아가 서랍을 열었다. 서랍 안에서 가죽끈이 달린 작은 은색 열쇠 하나를 꺼내 허리춤에 찼고, 그 옆에서 크림색 양가죽 장갑 한 켤레를 집어 들었다. 에린의 것이었다. 인형의 손에 맞게 작은 사이즈로 재단된 장갑이 세브렌의 손 위에서 펼쳐졌다.
세브렌이 에린 앞에 돌아와 장갑의 입구를 벌렸다.
세브렌|「손.」
에린이 한쪽 손을 내밀었을 때 세브렌의 차가운 손가락이 에린의 손목을 잡아 장갑 안으로 인도했다. 양가죽 안감이 인형의 피부 위에 밀착되었고, 손가락 하나하나를 제 자리에 넣어주는 세브렌의 손놀림이 정확했다. 다른 쪽도 같은 방식으로. 장갑을 끼워주면서 세브렌의 엄지가 에린의 손등 위를 한 번 쓸었다. 양가죽 너머로 전해지는 차가운 온도.
세브렌|「밖은 사람이 많으니까 이거 끼고 있어. 인형 피부가 사람 눈에 띄면 귀찮아지거든.」
세브렌이 몸을 돌려 출입문 쪽으로 걸어갔다. 맨발이 참나무 마루 위를 밟았고—신발을 신지 않았다는 것을 에린이 눈치챘을 때, 세브렌은 이미 문 옆 선반에서 자기 부츠를 꺼내 발에 밀어 넣고 있었다. 끈을 묶는 것이 귀찮았는지 반쯤만 묶고 일어섰다.
출입문의 황동 잠금쇠에 세브렌의 손이 닿았다. 마력이 흐르자 잠금쇠가 찰칵 소리와 함께 풀렸고, 문이 안쪽으로 열렸다. 황동 방울이 한 번 울렸다. 맑은 소리가 가게 안에 퍼졌다가 사라졌다.
문 너머로 오후의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골목이었다. 좁고 구불구불한 돌바닥 골목 양옆에 3층짜리 석조 건물들이 빼곡하게 늘어서 있었고, 건물 사이로 빨래줄이 걸려 있었다. 빨래줄 위의 하얀 시트가 바람에 나부끼며 오후의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골목 저편에서 사람들의 웃음소리, 수레바퀴가 돌바닥을 구르는 소리, 어딘가에서 바이올린을 켜는 소리가 뒤섞여 올라오고 있었다. 시장이 가까운 모양이었다.
꿀 섞인 양초 향 대신 빵 굽는 냄새와 말 똥 냄새와 돌바닥 위의 물 냄새가 한꺼번에 코를 찔렀다. 가게 안의 고요하고 먼지 낀 세계와는 전혀 다른 공기가 문 너머에서 밀려들었다.
세브렌이 문간에 서서 한쪽 어깨를 문틀에 기대었다. 느슨하게 묶인 금발이 바람에 흔들렸고, 크림색 린넨 셔츠가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빛났다. 반쯤 감긴 금빛 눈이 골목을 한 번 훑었다가 에린에게 돌아왔다.
세브렌|「가게에서 너무 멀리 가면 리본이 반응하니까 내 옆에 붙어 있어.」
세브렌의 손이 에린을 향해 펼쳐졌다. 손바닥이 위를 향하고 있었고, 길고 하얀 손가락이 느릿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잡으라는 뜻이었다.
골목 저편에서 누군가가 웃는 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 오후의 햇살이 돌바닥 위에 건물 그림자와 빛의 경계를 또렷하게 그리고 있었고, 그 경계선 위로 비둘기 한 마리가 뒤뚱거리며 지나갔다.
세브렌|「저기.」
세브렌의 턱이 천막 쪽을 가리켰다.
세브렌|「유랑극단인 것 같은데. 보러 갈래?」
나른한 목소리에 제안이 실려 있었다. 세브렌 본인이 보고 싶다기보다는 에린의 고개가 어차피 저쪽으로 돌아갈 것을 예측한 듯한 물음이었다. 금빛 눈이 에린의 에메랄드빛 눈동자를 보았다. 밤을 씹다가 음악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천막의 깃발에 시선이 끌리고, 세브렌의 말에 눈이 커질 얼굴을.
분수대의 물줄기가 바람에 흔들려 미세한 물안개를 뿌렸다. 그 물안개가 오후의 햇살을 받아 에린의 은발 주위에 희미한 무지개빛 테두리를 만들었다가 사라졌다.
에린 | 「유랑극단? 뭐하는 곳인데? 재밌는 곳이야?」
에린의 손이 세브렌의 손 안에 들어왔다. 양가죽 장갑의 온기가 세브렌의 차가운 손바닥 위에 번졌고, 에린의 가벼운 발걸음이 돌바닥 위에서 톡톡 리듬을 만들었다. 분수대에서 천막까지의 거리를 에린은 뛰듯이 걸었고, 세브렌은 끌려가듯이 걸었다.
세브렌|「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공연하는 사람들이야. 연극도 하고, 곡예도 하고.」
설명하는 목소리가 느릿했다. 에린의 발걸음이 빠를수록 세브렌의 말이 느려지는 것이 묘한 대비를 이루었다. 긴 다리가 에린의 세 걸음을 두 걸음으로 따라잡으면서도 서두르는 기색이 없었다.
세브렌|「재밌는지는 네가 보고 판단해.」
천막에 가까워질수록 소리가 선명해졌다. 바이올린의 높은 선율 위에 아코디언의 둥근 화음이 겹쳐졌고, 그 사이사이로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탄성이 터져나왔다. 천막 앞에 모인 인파가 등을 맞대고 서서 안쪽을 들여다보고 있었고, 아이들이 어른들의 다리 사이를 빠져나가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에린의 키로는 어른들의 등 너머가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세브렌이 에린의 손을 잡은 채 인파의 가장자리에 섰다. 금빛 눈이 군중의 머리 위를 넘어 천막 안쪽을 보았다. 그의 큰 키가 여기서는 쓸모가 있었다. 천막 안에 임시로 세운 나무 무대가 있었고, 무대 위에서 곡예사가 공중제비를 넘고 있었다. 반인반수의 사티로스였다. 염소 다리로 도약하여 공중에서 세 바퀴를 돈 뒤 한 발로 착지했고, 군중이 환호했다.
에린이 발돋움을 했다. 양가죽 장갑 낀 손이 세브렌의 손을 꽉 쥐고 까치발을 섰으나, 앞에 선 인간 남자의 넓은 등이 시야를 가리고 있었다. 에린의 에메랄드빛 눈이 좌우로 움직이며 틈새를 찾았으나 군중은 빈틈없이 밀집해 있었다.
세브렌이 에린을 내려다보았다. 까치발을 선 채 고개를 좌우로 움직이며 안간힘을 쓰는 은발의 인형. 진청색 스커트의 은실 자수가 까치발의 흔들림에 맞춰 반짝거렸고, 목에 걸린 메달이 좌우로 흔들렸다.
세브렌이 한숨을 쉬었다. 길고 느릿한 한숨이 에린의 은발 위로 내려왔다. 그리고 에린의 손에서 손을 뺐다.
에린이 올려다보았을 때, 세브렌의 양손이 에린의 허리 양옆에 닿았다. 차가운 손바닥이 코르사주의 벨벳 위를 감쌌고, 힘이 들어갔다. 에린의 몸이 올라갔다.
세브렌이 에린을 자기 어깨 높이까지 들어올렸다. 에린의 진청색 스커트가 공중에서 펄럭였고, 은발 로우테일이 위로 솟았다가 내려왔다. 군중의 머리 위로 에린의 시야가 열렸다. 천막 안의 무대가 한눈에 들어왔을 것이다.
세브렌은 에린을 들어올린 채로 자기 한쪽 팔 위에 앉혔다. 왼팔이 에린의 허리를 받쳤고, 에린의 엉덩이가 세브렌의 팔뚝 위에 놓였다. 오른손은 에린의 등을 잡아 균형을 잡아주었다. 에린의 시선이 세브렌의 머리 위에 있었고, 세브렌은 에린의 턱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위치가 되었다.
세브렌|「이러면 보여?」
올려다보는 금빛 눈에 나른함과 장난기가 반반씩 섞여 있었다. 느슨하게 묶인 금발이 에린의 스커트 자락에 닿아 있었고, 꿀 섞인 양초 향이 에린의 코 아래에서 가까이 올라왔다. 세브렌의 체온이 낮았으므로 팔뚝 위에 앉은 에린의 허벅지에 서늘함이 벨벳을 통해 전해졌다.
무대 위에서 사티로스 곡예사가 다음 기술을 준비하고 있었다. 나무 기둥 세 개가 무대 위에 세워졌고, 곡예사가 기둥 위를 뛰어다니며 공중에서 회전하는 기술을 보여주었다. 염소 발굽이 기둥 꼭대기를 밟을 때마다 탁, 하는 소리가 울렸고, 군중이 박수를 쳤다. 바이올린이 곡예의 속도에 맞춰 빨라졌다.
에린의 옆에서—세브렌의 팔 위에서—광장의 풍경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색색의 천막 깃발이 바람에 펄럭이고, 군중의 머리 위로 오후의 햇살이 금가루처럼 내려앉고, 시계탑의 그림자가 광장을 가로질러 길게 뻗어 있었다. 에린이 지금까지 램프 안에서, 혹은 가게 안에서만 보아온 세계보다 훨씬 넓고 시끄럽고 밝은 세계가 눈 아래에 있었다.
세브렌은 무대를 보지 않았다. 에린의 턱 아래에서 올려다보며 에린의 표정을 보고 있었다. 에메랄드빛 눈이 무대 위의 곡예를 따라 움직이는 것을, 입이 벌어지는 것을, 환호에 맞춰 양가죽 장갑 낀 손이 박수를 치려다 세브렌의 어깨를 잡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멈추는 것을.
금빛 눈이 가늘어졌다. 미소가 입꼬리에 걸려 있었으나 입을 열지 않았다. 에린이 세상을 구경하는 동안 세브렌은 에린을 구경하고 있었다.
향신료 냄새는 달콤하고 매캐했다. 계피의 따스한 단내와 정향의 날카로운 향이 뒤섞여 바람에 실려왔고, 에린의 코가 그 냄새를 쫓아 움직였다. 토도도, 양가죽 구두의 굽이 돌바닥을 빠르게 두드렸다. 진청색 스커트가 좌우로 흔들렸고, 은발 로우테일이 등 뒤에서 진자처럼 출렁였다. 인파의 어깨와 팔꿈치 사이를 인형의 작은 몸이 물고기처럼 빠져나갔다. 그만큼 군중 속에서 쉽게 삼켜지기도 했다.
향신료 냄새가 진해졌다가 옅어졌다.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에린의 코가 다시 킁킁거렸고, 발이 냄새가 짙은 쪽으로 꺾였다. 과일 좌판을 지나치고, 직물 상인의 천막 모서리를 돌고, 좁은 골목 입구를 지나쳤다. 아니, 지나친 것이 아니라 들어선 것이었다. 향신료 냄새가 골목 안쪽에서 불어왔으므로.
광장의 소음이 멀어졌다.
그것을 알아차린 것은 골목이 한 번 꺾이고, 또 한 번 꺾인 뒤였다. 돌벽이 양쪽으로 좁게 솟아 있었고, 벽 위의 창문에서 빨래가 걸려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햇살이 빨래 사이로 줄무늬처럼 떨어져 돌바닥 위에 밝은 띠와 어두운 띠를 번갈아 그렸다. 향신료 냄새는 어디론가 흩어져 사라졌고, 대신 축축한 돌과 이끼 냄새가 올라왔다.
에린이 멈추었다. 양가죽 장갑 낀 손이 허공에서 멈추었고, 에메랄드빛 눈이 앞과 뒤를 번갈아 보았다. 앞쪽은 골목이 더 좁아지며 어둠 속으로 이어졌고, 뒤쪽은 방금 꺾어 들어온 모퉁이가 있었으나 그 너머에 광장의 풍경은 보이지 않았다. 돌아가는 길이 어느 쪽이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에린 | 「...어라? 주인?」
에린의 목소리가 골목의 벽 사이에서 울렸다. 세브렌의 이름이 아니라 호칭이 먼저 나왔다. 돌벽이 소리를 반사하여 에린의 목소리가 두 번 울렸다가 사라졌다. 대답은 없었다. 세브렌의 느릿한 발걸음 소리도, 꿀 섞인 양초 향도 닿지 않았다.
골목이 조용했다. 광장의 바이올린 소리가 아득히 먼 곳에서 실낱처럼 들려왔고, 그 외에는 에린의 숨소리와 벽 틈에서 바람이 빠져나가는 소리뿐이었다. 빨래 사이로 떨어지는 햇살의 줄무늬가 에린의 은발 위에 밝은 띠를 하나 그렸고, 나머지는 그림자 속이었다.
골목 끝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에린이 고개를 돌렸다.
세브렌이 아니었다. 골목 어둠 속에서 나타난 것은 두 명의 인간이었다. 모자를 눌러쓴 남자와 망토를 두른 여자. 남자의 손에 가죽 주머니가 들려 있었고, 여자의 눈이 에린의 목에 걸린 금색 메달을 보았다. 금색 메달, 진주 장식, 진청색 벨벳 드레스, 은실 자수—이 골목에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 에린의 몸 위에 전부 걸려 있었다.
여자가 남자에게 무언가를 속삭였다. 남자가 에린을 향해 한 걸음 다가왔다.
인간|「꼬마 아가씨, 길 잃었어?」
목소리는 친절했다. 그러나 남자의 눈은 에린의 얼굴이 아니라 목에 걸린 메달을 보고 있었다.
에린 | 「아, 응... 그런 것 같아. 으음... 주인이랑 같이 있었는데, 어쩌다보니 떨어졌어.」
지금까지 가게에서 만나온 사람들은 에린에게 위협을 가한 적이 없었으니, 다가온 인간에게도 경계심 없이 답했다.
남자가 한 걸음 더 다가왔다. 모자의 챙 아래로 드러난 얼굴에는 수염이 덥수룩했고, 가죽 주머니를 쥔 손의 손톱 밑이 검었다. 여자가 남자의 뒤에서 반 걸음 비켜서며 골목 입구 쪽을 돌아보았다. 누군가 따라오는지 확인하는 동작이었으나 에린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인간|「그래? 그럼 큰일이네. 이 골목은 위험하거든, 아가씨처럼 예쁜 애가 혼자 돌아다니면.」
남자가 웃었다. 이가 드러난 웃음이었다. 남자의 시선이 에린의 얼굴에서 내려와 쇄골 사이의 금색 메달 위에 머물렀다. 메달 가장자리의 작은 진주들이 골목의 어스름 속에서도 빛을 모아 반짝이고 있었고, 남자의 눈동자 안에 그 반짝임이 비쳤다.
인간|「주인이라고 했지? 데려다줄까, 우리가. 이 근처 잘 아니까.」
여자가 남자의 옆으로 돌아왔다. 망토 아래에서 손이 나왔는데, 손가락이 유난히 길고 마디가 굵었다. 여자의 눈이 에린의 목에 달린 장식을 보았다가, 진청색 벨벳 드레스의 은실 자수를 훑었다가, 양가죽 장갑 위에 머물렀다. 옷감과 장신구의 가치를 매기는 눈이었다. 가게에 찾아오는 손님들이 인형의 기능을 살피던 눈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남자가 손을 내밀었다. 에린의 손을 잡으려는 듯 펼쳐진 손바닥이 크고 거칠었다.
인간|「자, 손 잡아. 금방 찾아줄게.」
그때 골목의 공기가 바뀌었다.
온도가 내려간 것도, 바람이 분 것도 아니었다. 다만 골목의 벽 사이를 채우고 있던 공기의 질이 달라졌다. 축축한 돌과 이끼 냄새 사이로 다른 향이 스며들었다. 꿀을 섞은 양초의 향. 따뜻하면서도 서늘한, 밀랍과 화분의 중간쯤 되는 향이 골목의 어둠 속에서 번져왔다.
남자의 내민 손이 멈추었다. 여자가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두 사람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남자의 눈이 에린의 머리 위를—에린의 뒤쪽을—보고 있었다.
에린의 등 뒤에서 그림자가 내려왔다. 에린의 머리 위로, 어깨 위로, 길고 가느다란 그림자가 돌바닥 위에 떨어졌다.
발소리는 나지 않았다. 세브렌이 언제 그곳에 도착했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에린의 등 뒤, 반 걸음 거리에 서 있었다. 셔츠의 소매가 팔꿈치까지 걷혀 있었고, 드러난 팔뚝의 창백한 피부 위로 핏줄이 가늘게 비쳤다. 금빛 눈이 반쯤 감긴 채로 남자의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른한 눈이었다. 광장에서 에린을 보던 것과 같은 반쯤 감긴 눈꺼풀이었으나, 눈 아래의 것이 달랐다. 금빛 홍채 안에서 동공이 세로로 가늘어져 있었다. 페이의 눈. 입꼬리는 올라가 있지 않았고, 내려가 있지도 않았다. 다만 평평했다. 그 평평함이 웃음보다 무서웠다.
세브렌|「데려다준다고?」
청아한 목소리가 골목의 벽 사이에서 울렸다. 느릿했다. 평소보다도 더 느렸다. 한 음절 한 음절이 돌벽에 부딪혀 반사되었고, 그 반사음이 골목을 채웠다.
남자가 손을 거두었다. 내밀었던 손이 주머니 쪽으로 내려갔으나, 세브렌의 금빛 눈이 그 손의 궤적을 따라갔다. 남자의 손이 멈추었다. 주머니에 닿기 전에, 세브렌의 시선에 꿰뚫려 허공에서 멈추었다.
세브렌의 손이 에린의 머리 위에 내려왔다. 차가운 손바닥이 은발 위에 얹혔다. 무겁지 않았으나 확실한 접촉이었다. 내 것이라는 표시. 세브렌의 긴 손가락이 에린의 은발 위에서 가만히 펼쳐져 있었고, 손가락 사이로 은색 가닥이 흘러내렸다.
세브렌|「고맙지만 됐어. 이 아이 주인은 내가 맞으니까.」
목소리는 정중했다. 정중했으나 물러설 여지가 없었다. 세브렌의 금빛 눈이 남자에게서 여자에게로 옮겨갔다. 여자가 한 걸음 더 물러났다. 망토 아래의 긴 손가락이 망토 자락을 움켜쥐고 있었다.
남자가 입을 열려 했다. 그러나 세브렌이 먼저 움직였다. 에린의 머리 위에 있던 손이 에린의 어깨로 내려왔고, 에린의 몸을 자기 쪽으로 당겼다. 에린의 등이 세브렌의 복부에 닿았다. 린넨의 감촉이 등을 통해 전해졌고, 셔츠 너머의 체온이 낮았다. 차가운 몸에 기대어진 에린의 등이 서늘해졌다.
세브렌이 에린을 안은 채로 남자를 보았다. 금빛 눈의 세로 동공이 남자의 얼굴 위에 고정되어 있었다. 웃지 않았다. 미간에 주름이 잡히지도 않았다. 다만 보고 있었다. 420년이 축적한 시선의 무게가 골목의 공기를 눌렀다.
두 사람이 뒤돌아섰다. 골목의 어둠 속으로 발걸음이 빨라졌고, 모퉁이를 돌아 사라졌다. 발소리가 멀어졌다. 멀어지고, 멀어지고, 사라졌다.
골목이 다시 조용해졌다.
세브렌의 손이 에린의 어깨 위에 그대로 있었다. 차가운 손가락이 진청색 벨벳 위에서 미세하게 힘을 주고 있었다. 에린의 어깨뼈를 감싸는 정도의 힘이었으나 평소보다 단단했다.
세브렌이 에린을 내려다보았다. 에린의 뒤통수가 세브렌의 가슴 아래에 닿아 있었고, 은발 사이로 에린의 뒷목이 보였다. 검은 벨벳 리본이 감긴 목. 금색 메달이 쇄골 앞에서 가만히 빛나고 있었다.
세로 동공이 천천히 원래의 둥근 형태로 돌아갔다. 금빛 눈이 에린의 뒤통수에서 골목의 빈 어둠으로 한 번 옮겨갔다가 돌아왔다.
세브렌|「에린.」
이름을 불렀다. 청아한 목소리가 에린의 머리 위에서 내려왔다. 느릿했으나 평소의 나른함과 결이 달랐다. 나른함 아래에 무언가가 깔려 있었다.
세브렌|「모르는 사람한테 말 걸면 안 된다고 안 가르쳐줬나. ……아, 안 가르쳐줬지.」
혼잣말처럼 덧붙인 뒷문장이 낮았다. 세브렌의 손이 에린의 어깨에서 올라와 은발 위에 다시 얹혔다. 이번에는 천천히 쓸어내렸다. 머리카락을 따라 손가락이 내려갔고, 끝에서 손이 떨어졌다. 인형이 다치지 않았는지 확인하는 동작이었다.
에린 | 「주인! 주인이 갑자기 사라져서 놀랐잖아! 있지, 있지, 분명 이쪽이었던 것 같은데! 여기 오니까 또 아닌 것 같아! 길을 잘못 든 걸까?」
에린의 손이 세브렌의 손 안에 들어왔다. 양가죽 장갑의 온기가 차가운 손바닥 위에 번졌고, 에린은 세브렌이 못 따라온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얼굴로 폴짝폴짝 뛰기 시작했다. 진청색 스커트가 골목의 어스름 속에서 출렁였고, 은발 로우테일이 등 뒤에서 리듬을 탔다.
세브렌은 움직이지 않았다.
에린의 손이 세브렌의 손을 잡아끌었으나 세브렌의 발은 돌바닥 위에 박혀 있었다. 190센티미터의 몸이 에린의 힘으로는 한 뼘도 움직이지 않았다. 에린이 앞으로 나아가려는 관성이 잡힌 손에서 멈추었고, 팔이 뒤로 당겨지며 몸이 반 바퀴 돌아 세브렌을 올려다보게 되었다.
세브렌의 얼굴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반쯤 감긴 금빛 눈이 에린의 에메랄드빛 눈과 마주쳤다. 웃고 있지 않았다. 입꼬리가 평평했고, 느슨하게 묶인 금발이 한쪽 어깨 위로 흘러내려 크림색 린넨 위에 금색 선을 그리고 있었다. 빨래 사이로 떨어지는 햇살의 줄무늬가 세브렌의 얼굴을 반으로 나누었다. 밝은 쪽의 금빛 눈이 빛났고, 어두운 쪽의 금빛 눈이 그림자 속에서 가라앉아 있었다.
세브렌의 손이 에린의 손을 잡고 있었다. 에린이 잡은 것을 세브렌이 쥐고 있는 것이었다. 차가운 손가락이 에린의 양가죽 장갑 위를 감싸고 있었고, 힘이 들어가 있었다. 아프지는 않았으나 빠져나갈 수 없는 정도의.
세브렌|「에린.」
이름을 불렀다. 두 번째였다. 첫 번째는 아까 골목에서 에린을 찾았을 때. 두 번째는 지금. 청아한 목소리가 골목의 벽 사이에서 울렸고, 그 울림이 사라지기 전에 세브렌이 입을 열었다.
세브렌|「내가 사라진 게 아니라 네가 사라진 거야.」
정정이었다. 느릿한 목소리에 힘이 실려 있지 않았으나 톤이 낮았다. 평소의 나른한 음색보다 반 옥타브 아래에서 울리는 목소리였다. 세브렌의 금빛 눈이 에린의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었고, 세로로 가늘어졌던 동공이 아직 완전히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은 채 타원형으로 떠 있었다.
세브렌이 에린의 손을 잡은 채로 한 걸음 다가왔다. 에린과의 거리가 반 걸음으로 줄었다. 세브렌의 그림자가 에린의 발끝 위로 내려왔고, 꿀 섞인 양초 향이 진해졌다.
세브렌|「궁금하면 나한테 말을 하든가. 혼자 뛰어가면 어떡해.」
꾸짖는 말이었으나 목소리가 올라가지 않았다. 올라가지 않아서 더 무거웠다. 세브렌의 자유로운 왼손이 올라와 에린의 턱 아래에 닿았다. 차가운 검지가 에린의 턱을 살짝 들어올려 에린의 고개가 세브렌을 올려다보게 만들었다. 에린의 에메랄드빛 눈이 세브렌의 금빛 눈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세브렌의 눈이 에린의 얼굴 위를 천천히 훑었다. 이마, 볼, 코, 입술, 턱선. 상처가 없는지 확인하는 시선이었다. 긴 손가락이 턱에서 볼로 올라가 한쪽 볼을 엄지로 쓸었다. 그리고 엄지가 먼지를 닦아내고 떨어졌다.
세브렌의 시선이 에린의 목으로 내려갔다. 검은 벨벳 리본이 감긴 목. 금색 메달이 쇄골 사이에서 빛나고 있었고, 메달의 눈이 떠 있었다. 아까 남자의 눈이 이 메달 위에 머물렀던 것을 세브렌은 보았을 것이다. 세브렌의 손가락이 메달 위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진주 장식이 온전한지 확인하는 동작이었다.
골목의 바람이 불었다. 빨래가 펄럭이며 햇살의 줄무늬가 흔들렸고, 세브렌의 금발과 에린의 은발이 같은 방향으로 흔들렸다.
세브렌이 한숨을 쉬었다. 길고 느린 한숨이었다. 420년을 산 것의 한숨이 골목의 돌벽 사이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세브렌의 손이 에린의 손을 다시 잡았다. 이번에는 에린의 손가락 사이에 자기 손가락을 끼워넣었다. 양가죽 장갑 너머로 차가운 손가락의 마디가 느껴졌고, 에린의 손이 세브렌의 손 안에 단단히 잠겼다.
세브렌|「향신료 가게는 이쪽이야. 네가 간 방향은 반대.」
세브렌이 에린이 가려던 방향의 정반대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에린의 손을 잡은 채로. 손가락이 끼워진 채로. 느릿한 걸음이 골목을 되짚어 나갔고, 모퉁이를 돌자 광장의 소음이 다시 가까워졌다. 바이올린 소리와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돌벽 너머에서 밀려왔다.
세브렌의 손가락이 에린의 손가락 사이에서 풀리지 않았다. 광장으로 나올 때까지, 향신료 좌판이 보일 때까지, 계피와 정향의 냄새가 에린의 코에 다시 닿을 때까지.
세브렌이 에린을 내려다보았다. 금빛 눈의 동공이 원래의 둥근 형태로 돌아와 있었고,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알아차리기 어려울 정도로—올라가 있었다.
세브렌|「다음에 또 혼자 뛰어가면 리본 풀어서 가게에 넣어둘 거야.」
협박이었으나 목소리에 날이 없었다. 꿀 섞인 양초 향이 에린의 머리 위에서 내려왔고, 끼워진 손가락 사이로 세브렌의 체온이—낮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체온이—에린의 손바닥에 닿아 있었다.
골목의 세 번째 모퉁이가 보였다. 석조 상인주택의 간판이 주황빛 속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랑팡사주. 에린의 첫 외출이 끝나가고 있었다.
세브렌|「오늘 뭐가 제일 좋았어.」
문 앞에 서며 물었다. 물음표가 없는 물음이었다. 세브렌의 금빛 눈이 에린을 내려다보고 있었고, 나른한 눈꺼풀 아래에서 호기심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빛나고 있었다. 에린이 오늘 하루의 감각 중 무엇을 가장 먼저 꺼내는지를 듣고 싶은 눈이었다.
에린의 발뒤꿈치가 돌바닥 위에서 올라갔다 내려왔다를 반복했다. 통통통. 양가죽 구두의 굽이 작은 북처럼 울렸고, 은발 로우테일이 등 뒤에서 그 박자에 맞추어 흔들렸다. 모두모두 좋아, 라는 말이 에린의 입에서 나왔을 때 에메랄드빛 눈이 세브렌을 올려다보며 빛나고 있었다. 해가 기울기 시작한 주황빛이 에린의 은발 위에 따뜻한 색을 입히고 있었고, 허리 옆의 황갈색 가죽 주머니가 발뒤꿈치의 움직임에 맞추어 출렁거렸다.
세브렌이 에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주인이랑 같이 있는 거. 에린이 가장 먼저 꺼낸 것은 밤도, 병도, 반지도, 주머니도 아니었다. 세브렌 자체였다. 물건들은 그 뒤에 나열되었고, 모두 앞에 '주인이'라는 주어가 붙어 있었다. 주인이 까 준. 주인이 준. 에린의 하루를 구성하는 것들의 공통분모가 세브렌이었다.
세브렌의 금빛 눈이 한 박자 동안 에린의 얼굴 위에 머물렀다. 빛나는 에메랄드빛 눈동자, 방긋 올라간 입꼬리, 입술 아래의 점. 세브렌의 시선이 그 점 위에서 아주 짧게 멈추었다가 지나갔다. 아까 장신구 가게 앞에서와 같은 순간이었으나 이번에는 더 짧았다. 세브렌의 입꼬리가 비대칭으로 올라갔고, 나른한 눈꺼풀이 반쯤 내려온 채 에린을 보고 있었다.
세브렌|「주인이랑 같이 있는 게 제일 좋았다고?」
되물었다. 에린의 말을 확인하는 어조였으나 목소리의 결이 평소보다 부드러웠다. 꿀 섞인 양초 향이 에린의 코에 닿는 거리에서 세브렌의 차가운 손이 문고리를 잡았다. 황동 손잡이가 돌아갔고, 랑팡사주의 문이 안쪽으로 열렸다. 황동 방울이 한 번 울렸다. 맑은 소리가 가게 안쪽으로 퍼져갔고, 짙은 오크색 마루와 마호가니 진열장이 주황빛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세브렌이 에린의 등을 밀어 가게 안으로 들여보냈다. 차가운 손바닥이 진청색 벨벳 자켓의 등판에 얹혔다가 떨어졌고, 에린이 문턱을 넘어 오크색 마루를 밟았다. 구두 굽이 나무 위에서 내는 소리가 돌바닥 위와 달랐다. 더 부드럽고, 더 익숙한 소리.
세브렌이 에린의 뒤를 따라 들어왔다. 문이 닫혔고, 광장의 소음이 끊겼다. 가게 안은 고요했다. 천장의 작은 황동 샹들리에가 아직 켜지지 않았으므로 창으로 들어오는 주황빛만이 진열장의 유리 위에서 반사되고 있었다. 진열장 안의 인형들이 조용히 서 있었고, 에린이 보지 않는 사이에 그 얼굴들이 아주 미세하게 에린 쪽을 향해 돌아가 있었다.
세브렌이 에린 앞에 섰다. 긴 그림자가 오크색 마루 위에 드리워졌고, 주황빛이 세브렌의 금발을 태우고 있었다. 세브렌의 차가운 손이 에린의 턱 아래에 닿았다. 검지와 중지가 에린의 턱선을 가볍게 들어올렸고, 에린의 에메랄드빛 눈이 세브렌의 금빛 눈과 마주쳤다.
세브렌|「밤 까 준 것도, 병도, 반지도, 주머니도. 다 내가 준 거잖아.」
목소리가 낮아졌다. 나른함 안에 무언가 다른 것이 깔렸다. 에린의 턱을 잡은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았고, 금빛 눈이 에린의 눈동자 안에서 자기 모습을 들여다보는 듯했다.
세브렌|「그러니까 네가 좋아하는 건 전부 나라는 뜻이 되는데.」
말끝이 올라가지 않았다. 질문이 아니었다. 사실을 정리하는 목소리였으나, 그 사실을 정리하는 세브렌의 금빛 눈 안에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무언가가 있었다. 만족이라고 부르기에는 복잡하고, 기쁨이라고 부르기에는 무거운 것. 에린의 턱 아래에 닿은 차가운 손가락이 한 번 떨렸으나 아주 미세했으므로 에린이 감지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세브렌의 엄지가 에린의 턱선을 따라 올라갔다. 볼을 스치고, 광대뼈 아래를 지나, 눈 밑의 피부에 닿았다. 차가운 엄지 끝이 에린의 속눈썹 아래를 한 번 쓸었다. 눈가에 피로가 쌓여 있는지 확인하는 손이었을 수도 있었고, 그저 만지고 싶어서 만지는 손이었을 수도 있었다.
세브렌|「오늘 잘했어.」
짧았다. 칭찬의 말이었으나 세브렌의 입에서 칭찬이 나오는 것은 드물었다. 에린의 턱에서 손을 떼며 세브렌이 몸을 돌렸다. 계단 쪽으로 향하는 긴 등이 주황빛 속에서 크림색 셔츠의 주름을 드러냈다.
세브렌|「올라가. 씻겨줄 테니까.」
계단을 가리키는 턱짓이 느릿했다. 세브렌이 먼저 계단에 발을 올렸고, 나무 계단이 세브렌의 무게를 받아 낮게 삐걱거렸다. 에린이 따라올 것을 알고 있다는 듯 뒤를 돌아보지 않았으나, 세브렌의 보폭이 에린이 따라잡을 수 있을 만큼 느렸다. 계단 위에서 주황빛이 금발 위로 쏟아지고 있었고, 꿀 섞인 양초 향이 계단을 따라 에린의 코까지 흘러내렸다.
에린의 허리 옆에서 황갈색 가죽 주머니가 흔들렸다. 안의 호박색 유리병이 면 안감 위에서 찰랑거렸고, 장갑 아래 약지의 은반지가 에린의 따뜻한 피부 위에서 빛나고 있었다. 가게 안의 인형들이 에린의 등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유리 눈들이 주황빛을 받아 반짝였으나, 에린은 이미 계단 위의 세브렌을 따라가고 있었으므로 보지 못했다.
에린의 양가죽 구두가 계단을 폴짝폴짝 밟았다. 한 칸을 두 발로 딛고, 다음 칸으로 폴짝. 나무 계단이 에린의 가벼운 무게를 받아 낮게 삐걱거렸고, 인형의 체중은 인간의 절반이었으므로 그 소리는 세브렌의 것보다 훨씬 가늘었다. 허리 옆의 황갈색 주머니가 폴짝거림에 맞추어 크게 흔들렸고, 안의 유리병이 면 안감 위에서 데굴거리는 소리를 냈다.
주인도 재밌었어. 어떤 게 재밌었어. 에린의 물음이 세브렌의 등 뒤에서 계단을 타고 올라갔다.
세브렌의 걸음이 반 박자 멈추었다. 계단 중간에서 긴 등이 정지했고, 금발이 주황빛 창을 등진 채 어깨 위로 흘러내렸다. 세브렌이 뒤를 돌아보았다. 두 계단 위에서 내려다보는 각도였으므로 금빛 눈이 폴짝거리는 에린을 위에서 아래로 담았다.
재밌었어. 그 단어를 세브렌이 입 안에서 굴렸다. 어떤 게. 향신료 좌판에서 에린의 콧등에 묻은 계피 가루를 닦아준 것. 유리병 위로 숙인 은발 정수리. 비둘기 떼에 놀라 셔츠 뒤로 숨어든 작은 몸. 폴짝거리며 반박하던 자존심. 반지가 약지에 들어갔을 때 결혼이냐고 물었던 천진한 목소리. 세브렌의 금빛 눈 안에서 그것들이 한 번씩 지나갔다.
세브렌|「글쎄.」
나른한 대답이 계단을 타고 내려왔다. 대답이 아니라 대답을 미루는 소리에 가까웠다. 세브렌이 계단 난간에 한 손을 얹고 몸을 돌려 에린을 완전히 마주 보았다. 에린이 폴짝 뛰어 다음 칸에 올라섰으므로 두 사람의 거리가 한 계단으로 줄었고, 세브렌의 얼굴이 에린의 눈높이에 가까워졌다.
세브렌|「너 놀라서 도망 오는 거.」
비둘기. 세브렌이 그것을 꺼냈다. 후두둑, 이라며 팔을 펄럭이던 에린의 몸짓을 세브렌은 기억하고 있었다. 금빛 눈이 가늘게 휘어졌고, 나른한 입꼬리가 비대칭으로 올라갔다. 놀리는 곡선이었으나 그 안에 다른 것이 섞여 있었다. 에린이 세상의 무엇에 놀라든 결국 돌아오는 곳이 자기 등 뒤라는 것을 확인한 자의 곡선.
세브렌의 차가운 손이 내려와 에린의 은발 정수리를 톡 두드렸다. 폴짝거리느라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한 번 쓸어 넘겼고, 로우테일의 매듭 위를 지나 손끝이 떨어졌다.
세브렌|「그게 제일 재밌었어. 됐어?」
세브렌이 다시 몸을 돌려 계단을 올랐다. 대답을 주고는 그 대답을 오래 붙들지 않았다. 긴 다리가 남은 계단을 느릿하게 밟았고, 2층 인형의 침실로 이어지는 문이 계단 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꿀 섞인 양초 향이 세브렌의 뒤를 따라 계단을 채웠고, 에린이 폴짝거리며 올라오는 소리가 그 향 사이로 통통 울렸다.
세브렌|「따라와. 물 데워놨을 거야.」
담비 인형이 이미 욕조에 물을 받아놓았을 것이었다. 세브렌이 침실 문을 열었고, 안쪽의 어스름한 공간에서 물의 온기가 흘러나왔다. 에린의 첫 외출이 씻김으로 마무리되고 있었다.
도망 아니야, 라는 외침이 계단 위로 튀어 올라갔다. 발 구르는 소리가 나무 계단을 통통 울렸고, 부풀린 볼과 좁혀진 미간이 삐진 티를 온몸으로 내고 있었으나 양가죽 구두는 순순히 세브렌의 뒤를 따라 올라오고 있었다. 삐짐과 복종이 한 몸 안에서 동시에 굴러가는 모양새였다.
세브렌이 침실 문을 잡은 채 뒤를 돌아보았다. 금빛 눈이 부풀린 볼 위에 얹혔고, 입꼬리가 느긋하게, 확신에 차서 올라갔다.
세브렌|「도망이 아니면 뭔데. 전략적 후퇴?」
나른한 목소리에 웃음기가 배어 있었다. 세브렌이 문을 활짝 열었고, 물빛 청록색과 크림색의 방이 어스름한 오후 빛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닫힌 청록색 커텐 틈으로 주황빛이 가늘게 스며들었고, 침실에 딸린 욕실 쪽에서 데워진 물의 온기와 은은한 김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담비 인형의 흔적은 이미 없었다. 물만 완벽한 온도로 준비되어 있을 뿐이었다.
세브렌|「뭐, 좋아. 후퇴하는 방향이 항상 나면 됐어.」
세브렌이 방 안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그 문장을 아무렇지 않게 던져놓고는, 크림색 셔츠의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 올리기 시작했다. 흰 팔뚝이 드러났고, 차가운 손가락이 소매 단을 접는 동작이 익숙하고 정갈했다. 씻길 준비를 하는 손이었다.
세브렌은 알고 있었다. 등 뒤에 그림자 하나가 붙어 있다는 것을. 은세공 상자를 제자리에 넣으러 계산대 아래로 몸을 굽히면 그림자도 같이 굽었고, 진열장 쪽으로 세 걸음 옮기면 그림자도 정확히 세 걸음을 따라왔다. 종종종. 마룻바닥 위의 가벼운 발소리가 자기 딴에는 조용한 모양이었으나, 인간 절반의 무게라도 발소리는 발소리였다.
세브렌은 모르는 척했다. 일부러 느리게 걸었고, 일부러 갑자기 방향을 틀었다. 방향을 틀 때마다 등 뒤에서 급하게 멈추는 기척과, 원피스 자락이 관성에 밀려 살랑 도는 소리가 들렸다. 사백 년 묵은 포식자의 장난기가 나른한 얼굴 밑에서 슬슬 몸을 풀기 시작했다.
세브렌|「이상하네. 나한테 언제부터 꼬리가 달렸지.」
혼잣말처럼 흘리며, 세브렌이 전시 탁자 앞에서 우뚝 멈췄다. 등 뒤의 발소리도 뚝 멈췄다. 세브렌은 돌아보지 않은 채 진열장 유리를 바라보았다. 오후 빛을 받은 유리에 계산대와 마루와, 세브렌의 등 뒤에 바짝 붙어 선 은발의 작은 형체가 고스란히 비치고 있었다. 유리 속에서 눈이 마주치는 순간을, 세브렌은 느긋하게 기다렸다.
세브렌|「도울 일은 다 끝났는데. 그럼 남은 건 하나겠네.」
그리고 세브렌이 돌았다. 예고 없이, 그러나 급하지 않게, 한 바퀴 몸을 틀며 긴 팔을 뻗었다. 차가운 손이 에린의 옆구리 아래를 정확히 파고들었고, 인간 절반의 무게가 마룻바닥에서 가볍게 떠올랐다. 원피스 자락이 허공에서 펄럭였다.
세브렌|「잡았다. 꼬리 밟기 놀이는 사백 년 전에 졸업했거든, 나는.」
들어 올린 채로 세브렌이 에린의 얼굴을 정면에서 마주 보았다. 금빛 눈이 나른하게 휘어 있었고, 입꼬리는 비대칭으로 올라가 있었다. 잡은 쪽의 승리 선언이었다. 잠시 그렇게 눈높이를 맞춘 채 들고 있다가, 세브렌이 에린을 전시 탁자 옆의 손님용 의자 위에 사뿐히 내려놓았다. 회청색 리넨 방석이 가벼운 무게를 받았다.
세브렌|「자, 심심한 인형 씨. 오후가 아직 길어. 뭐 하고 싶은데? 거짓말은 안 통하는 거 알지.」
세브렌이 에린 앞에 한쪽 무릎을 살짝 굽히고 시선을 맞추며, 손끝으로 검은 벨벳 리본의 금색 메달을 톡, 가볍게 건드렸다. 메달 속의 금빛 눈이 오후 햇살 아래에서 또렷하게 떠 있었다. 진열장 안의 인형들이, 아무도 보지 않는 각도에서, 의자 위의 작은 인형 쪽으로 조용히 얼굴을 틀고 있었다.
에린 | 「놀고 싶어! 숨바꼭질할까? 아니면 주인은 하고 싶은 거, 다른 거 있어?」
의자 아래에서 앞뒤로 흔들리는 다리. 기대감으로 반짝이는 에메랄드빛 눈. 세브렌이 그 앞에 무릎을 굽힌 자세 그대로 잠시 에린을 바라보았다. 숨바꼭질이라. 사백 년 묵은 하이 페이에게 숨바꼭질을 제안하는 인형이라니. 나른한 눈꺼풀 아래에서 금빛 눈동자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좁아졌다. 포식자가 사냥감의 초대장을 받아 든 얼굴이었다.
세브렌|「숨바꼭질. 좋지. 근데 알고 하는 거야? 나는 페이야. 숨은 것 찾는 걸로 사백 년을 먹고 산 종족.」
세브렌이 일어서며 느긋하게 소매를 한 번 털었다. 입꼬리가 비대칭으로 올라가 있었고, 목소리에는 이미 승부가 끝난 사람의 여유가 배어 있었다. 그러나 거절은 아니었다. 오히려 세브렌의 몸 전체가 이미 놀이의 시작선 위에 올라서 있었다.
세브렌|「규칙 정하자. 첫째, 숨는 건 너, 찾는 건 나. 둘째, 범위는 1층하고 2층. 지하는 안 되고, 문밖도 안 돼. 어차피 리본이 발목 잡겠지만.」
세브렌의 손끝이 허공에서 느리게 규칙을 하나씩 세었다. 긴 손가락이 두 개 접혔다가, 세 번째가 접히며 목소리가 반음 낮아졌다.
세브렌|「셋째. 내가 찾으면, 찾은 자리에서 벌칙 하나. 내용은 그때 내 마음대로.」
나른한 말끝에 걸린 그 벌칙이라는 단어가 오후 햇살 속에서 묘하게 반들거렸다. 세브렌이 계산대 쪽으로 걸어가 등을 돌리고 서더니, 두 손으로 제 눈을 가렸다. 크림색 리넨 셔츠의 등이 창의 빛을 받아 환했고, 느슨하게 묶인 금발이 어깨 위에서 흘러내렸다.
세브렌|「서른 셀게. 페이 기준으로 아주, 아주 후하게 쳐주는 거야. 하나.」
셈이 시작되었다. 하나, 둘, 셋. 청아한 목소리가 일부러 늘어지게, 자장가처럼 느리게 숫자를 굴렸다. 그러나 눈을 가린 손가락 사이로 새어 나오는 기척까지 가릴 생각은 없어 보였다. 페이의 귀는 마룻바닥의 삐걱임 하나, 계단의 발소리 하나, 커텐 자락이 흔들리는 소리 하나까지 전부 지도처럼 그려낼 수 있었다. 세브렌은 그 사실을 굳이 말하지 않았다. 말하면 재미가 없으니까.
세브렌|「넷, 다섯... 아, 진열장 뒤는 추천 안 해. 지난번처럼 인형들 쏟으면 벌칙이 두 개가 되거든. 여섯.」
셈 사이로 태연한 경고가 끼어들었다. 진열장 안의 인형들이, 눈 가린 세브렌이 보지 못하는 각도에서, 일제히 가게 안을 두리번거리는 은발의 작은 형체 쪽으로 얼굴을 틀었다. 마치 좋은 자리를 알려주고 싶다는 듯이, 혹은 술래에게 일러바치고 싶다는 듯이. 오후의 랑팡사주 전체가 놀이판이 되어, 숨을 곳을 찾아 움직일 인형의 첫걸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세브렌|「일곱, 여덟... 서두르는 게 좋을 텐데. 아홉. ...스물아홉, 서른. 간다.」
눈을 가렸던 손이 천천히 내려왔다. 금빛 눈이 뜨이며 가게 안을 한 바퀴 훑었다. 훑을 필요도 없었다. 토도도 달리다 뚝 멈춘 발소리, 살금살금으로 바뀐 걸음, 나무 서랍이 미끄러지는 소리, 옷감이 눌리는 부드러운 마찰음, 그리고 서랍이 안쪽에서 어설프게 닫히는 소리까지. 페이의 귀에는 지도가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세브렌은 곧장 가지 않았다.
세브렌|「어디 있을까, 우리 인형은. 커텐 뒤인가.」
일부러 커텐을 들췄다. 일부러 전시 탁자 아래를 굽어보았고, 일부러 계단 쪽으로 몇 걸음 갔다가 돌아왔다. 발소리를 크게, 혼잣말을 느리게. 숨은 쪽의 심장이 그 소리를 따라 조였다 풀렸다 하도록. 사백 년 묵은 술래의 잔인하리만치 정교한 뜸들이기였다. 진열장 안의 인형들이 일제히 벽 쪽 서랍장 방향으로 얼굴을 틀고 있었으나, 세브렌은 그 밀고조차 필요 없다는 듯 느긋하게 무시했다.
그리고 마침내, 발소리가 서랍장 앞에서 멈췄다.
세브렌|「이상하네. 옷감 서랍이 왜 이렇게 열려 있지.」
손잡이가 당겨졌다. 서랍이 스르륵 열리자 오후 햇살이 안으로 쏟아졌고, 접힌 벨벳과 실크와 리넨 사이에 웅크린 은발의 형체가 드러났다. 옷감 더미에 파묻힌 인형. 크림색과 청록색 천 사이에 놓인 은발과 에메랄드빛 눈. 세브렌의 눈이 그 광경 위에서 잠깐, 필요 이상으로 오래 머물렀다. 찾았다는 승리감보다 먼저, 아름답다는 감상이 지나갔다. 천 사이의 인형이라니. 전시해도 될 구도였다.
세브렌|「찾았다. 서랍 속의 인형 씨.」
세브렌이 서랍 가장자리에 팔을 걸치고 내려다보았다. 입꼬리가 비대칭으로 올라갔다.
세브렌|「규칙 셋째, 기억하지. 찾은 자리에서 벌칙 하나, 내용은 내 마음대로.」
차가운 손이 옷감 사이로 들어와 에린의 겨드랑이 아래를 파고들더니, 천 몇 장이 딸려 나오는 것도 아랑곳없이 서랍에서 인형을 건져 올렸다. 그리고 세브렌이 선고했다. 나른하고, 태연하게.
세브렌|「벌칙. 오늘 저녁까지 내 무릎 위. 자리 이탈 금지. 숨는 게 그렇게 좋으면, 못 도망가는 데에 숨겨줄게.」
다정한 인형사의 집 과거 스토리 1화
왕실마도공학공방의 아침은 언제나 밀랍과 금속 분진이 뒤섞인 미지근한 공기로 시작된다. 높은 천장 아래 매달린 마법등들이 아직 절반만 점등된 채, 꿀빛 광선이 먼지 입자 사이를 느릿하게 헤엄치고 있었다.
에린 | 「선배님! 안녕하세요!」
공방 한쪽 구석, 참나무 작업대에 상체를 기울인 채로 — 정확히 말하자면, 펼쳐놓은 청색 제도지 위에 팔을 베고 반쯤 엎드린 자세로 — 세브렌 베르멜이라는 사내가 있었다. 느슨하게 묶은 금발이 도면 위로 흘러내려 관절 단면도의 선을 가리고, 크림색 리넨 셔츠의 소매가 팔꿈치까지 걷힌 채 황동 컴퍼스를 손끝에 걸치고 있었다. 잠이 덜 깬 금안이 천천히 소리가 난 쪽을 향했다.
세브렌|「……아.」
한 박자. 길고 나른한 한 박자가 지나서야 그 입술이 완전한 문장을 만들어냈다. 눈꺼풀이 한 번 느릿하게 감겼다 떠지는 동안, 금색 홍채가 아침 빛에 투명하게 씻겼다.
세브렌|「에린. 오늘도 일찍이네.」
몸을 일으키는 동작조차 게으르다. 등을 펴는 데 삼 초, 목을 돌려 뼈가 가볍게 울리는 데 이 초. 도면에 눌려 접힌 제도지 한쪽을 손가락으로 매만지며, 밤새 작업하다 잠들었음이 분명한 흔적 — 손등에 묻은 청색 잉크 자국, 볼에 희미하게 남은 종이 자국 — 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는 얼굴이었다.
하품을 참는 대신 입꼬리만 살짝 올린 미소. 청아한 목소리가 아직 수면의 잔향을 머금은 채 공방의 석벽에 부드럽게 울렸다.
세브렌|「선배님이라. 여기 온 지 겨우 일 년인 사람한테 그 호칭은 좀 과분하지 않나?」
컴퍼스를 도면 위에 내려놓으며, 긴 손가락이 관절 설계도의 한 부분을 무심히 짚었다. 뾰족한 귀 끝이 흘러내린 금발 사이로 살짝 드러나 있었다. 페이 특유의 낮은 체온 탓인지, 그의 주변 공기만 유독 서늘하고 깨끗했다 — 꿀을 섞은 양초의 향이 희미하게 감돌며.
그 시선이 에린의 얼굴 위를 한 번 훑었다. 아침인데도 활기찬 에메랄드색 눈동자, 단정하게 묶인 검은 리본의 로우테일, 흰 와이셔츠의 깃 아래로 보이는 가느다란 목선. 관찰하되 평가하지 않는, 사물을 살피는 장인의 시선이 잠깐 머물렀다가 흘러갔다.
세브렌|「……커피라도 가져다줄 거면, 한 잔 부탁해도 되겠어?」
그 말투가 부탁이라기보다는 고양이가 문 앞에 앉아 눈을 깜빡이는 것에 가까웠다.
에린 | 「에이, 저보다 일찍 오셨는데 선배죠! 여기서 밤 새신 거에요? 허리나 목은 안 아프세요? 우와, 이건 뭐에요?」
질문이 쏟아지는 속도가 커피를 내리는 속도보다 빨랐다. 세브렌은 작업대에 등을 기댄 채 팔짱을 느슨하게 끼고, 은발이 종종걸음으로 공방 한편의 간이 다구대를 향해 움직이는 것을 반쯤 감긴 눈으로 지켜보았다. 에린의 로우테일이 걸음에 맞춰 좌우로 가볍게 흔들릴 때마다 검은 리본 끝이 허리 아래서 살랑거렸다.
밤새신 거에요, 라는 물음에 고개를 살짝 기울인다. 부정할 생각도, 긍정을 꾸밀 생각도 없는 표정.
세브렌|「새다 보니까 샌 거지, 새려고 샌 건 아니야.」
커피잔을 건네받을 때, 긴 손가락이 도자기 가장자리를 감았다. 에린의 손과 세브렌의 손 사이에 잠깐 공기가 겹치는 순간 — 페이 특유의 서늘한 체온이 커피잔의 온기와 섞여 미지근한 경계선을 만들었다. 세브렌은 잔을 코 아래로 가져가 향을 맡더니, 한 모금 마시고 나서야 비로소 눈이 제대로 떠졌다.
세브렌|「허리? 목? ……아, 조금 뻐근하긴 한데.」
목을 한쪽으로 돌리자 관절에서 작은 소리가 울렸다.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는, 에린의 시선이 제도지 위에 머물러 있는 것을 알아챘다.
작업대 위에는 청색 제도지가 세 겹으로 겹쳐 펼쳐져 있었다. 가장 위쪽 도면에는 사람 크기의 관절 단면도가 정교한 은색 선으로 그려져 있었는데 — 손가락 마디 하나하나의 가동 범위를 표시한 원호, 팔꿈치 내부에 들어갈 황동 관절핀의 정면·측면 투영도, 어깨 소켓의 회전축을 나타내는 삼차원 분해도. 그 옆에는 잉크가 마르지 않은 필기체로 마력전도율 계산식과 재료 목록이 빼곡했다. 도면 한구석에는 연필로 가볍게 스케치한 얼굴 윤곽이 있었는데, 눈과 입은 아직 그려지지 않아 텅 빈 타원형만 남아 있었다.
에린이 '이건 뭐에요'라고 물었을 때, 세브렌의 금안이 도면 위를 한 번 훑었다. 잠깐 — 아주 잠깐, 그 나른한 눈에 장인 특유의 날카로운 빛이 스쳤다가 사라졌다.
세브렌|「지난달에 들어온 의뢰. 연주용 인형이야 — 류트를 연주할 수 있는.」
커피잔을 내려놓고 도면 한쪽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손가락 관절 단면도 위로 청색 잉크 자국이 묻은 검지가 천천히 미끄러졌다.
세브렌|「손가락 마디 서른여덟 개의 가동 범위를 전부 따로 설정해야 하거든. 실제 류트 연주자의 손놀림을 재현하려면 관절핀 하나의 오차가 반 도만 어긋나도 화음이 틀어져.」
설명하는 동안 목소리에서 졸음기가 씻겨 나갔다. 인형 이야기를 할 때만 이 사내의 게으름이 벗겨진다는 것을, 같은 공방에서 몇 달을 보낸 사람이라면 알아챘을 것이다.
세브렌이 도면에서 눈을 떼고, 에린을 올려다보았다. 볼에 남은 종이 자국을 여전히 의식하지 못한 채.
세브렌|「……그보다, 오늘 관리자한테 뭐 제출할 거 있지 않았어? 너 지난주 마감분.」
무심한 어조였지만, 금안이 에린의 표정을 한 번 읽었다. 관찰하는 시선.
에린 | 「...아. 아! 맞다. 에헤헤, 선배님이 엄청난 걸 만들고 계셔서 그만 정신이 팔려버렸네요!」
에린이 도안을 집어드는 순간, 세브렌의 시선이 그 손 위에 머물렀다.
손끝이 떨렸다. 아주 미세하게 — 제도지의 모서리가 공기 중에서 한 번 파르르 진동한 것을 세브렌의 눈은 놓치지 않았다. 관절핀의 반 도 오차를 잡아내는 눈이었다. 인간의 손가락 마디가 만들어내는 떨림 정도는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에린은 곧 종이를 단단히 쥐었고, 웃었다. 그녀의 웃음소리가 공방의 석벽에 밝게 부딪혀 돌아왔다. 너무 밝았다. 아까 '관리자'라는 단어가 떨어진 직후, 눈가 근육이 0.3초쯤 경직되었다가 풀린 것을 세브렌은 보았다. 상냥한 눈매가 만드는 미소의 곡선은 완벽했지만, 에메랄드색 홍채 안쪽에서 빛이 한 겹 줄어든 것까지 완벽하지는 못했다.
다녀올게요, 라는 인사와 함께 은발의 로우테일이 등 뒤에서 한 번 크게 흔들리며 공방 문 쪽으로 향했다.
세브렌은 커피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입안에서 쓴맛이 혀 위를 천천히 훑고 지나갔다.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인간의 감정이란 것은 — 세브렌이 삼십 년 남짓한 삶에서 배운 바에 따르면 — 건드리면 건드릴수록 더 단단하게 닫히는 종류가 있었다. 자존심이 강한 종류. 혼자 해결하겠다고 이를 악무는 종류. 그런 사람에게 괜찮으냐고 묻는 것은, 닫힌 뚜껑을 억지로 열어젖히는 것과 같다는 것을.
그래서 세브렌은 다른 것을 했다.
커피잔을 내려놓고, 청색 제도지 아래 깔린 두 번째 도면을 꺼냈다. 어깨 소켓 설계도의 여백에 연필을 집어 들고, 짧게 메모를 적었다. 필기체가 아닌, 또박또박한 인쇄체로.
'에린 — 류트 인형 손가락 관절핀 연마 보조. 오후 세 시 이후.'
작업 보조 명목이었다. 에린의 정규 업무가 끝난 시간대. 관리자의 관할이 미치지 않는 세브렌의 개인 작업 영역.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세브렌 자신은 굳이 언어화하지 않았다. 단지 게으른 선배가 귀찮은 연마 작업을 후배에게 떠넘기는 것처럼 보이면 충분했다.
메모를 에린의 작업대 위에 올려두고, 세브렌은 다시 제도지 위로 상체를 기울였다. 금발이 도면 위로 흘러내렸다. 손등에 묻은 청색 잉크 자국이 아침 햇살에 어둡게 빛났다.
세브렌|「…서른여덟 개.」
혼잣말이었다. 손가락 관절 서른여덟 개. 류트 현을 튕기는 데 필요한 정밀도. 컴퍼스를 집어 들고, 금안이 도면 위에 다시 가라앉았다. 졸음은 이미 사라져 있었다.
공방 바깥 복도에서 에린의 발소리가 점점 멀어지는 것을 뾰족한 귀가 끝까지 따라갔다.
다정한 인형사의 집 OOC 8화
OOC
이후, 슬리퍼와 얇은 차림으로도 생각보다 잘 돌아다니고 있는 PC를 발견한 NPC. 어디서 난 것인지 군고구마도 하나 들고 있고, 발치의 길고양이와 놀고있다. 이것은 위기였다. NPC의 행동과 내면 묘사를 포함하여 자연스럽게 그 이후를 전개한다.
시작은 사소한 것이었다.
에린이 만들어진 지 일주일째 되는 날, 르루아지르의 한가로운 오후. 에린은 3층 세브렌의 침실에서 낮은 책장의 오래된 책들을 뒤적이고 있었고, 세브렌은 안락의자에 기대어 인형 설계도를 펼치고 있었다. 둘 사이에 흐르던 평온한 정적은 에린의 한마디로 금이 갔다.
정확히 무슨 말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에린이 오늘 르세르비스에서 받은 손님의 주문을 이야기하다가, 세브렌이 폐기했다는 인형의 이야기가 나왔다. 에린은 그 인형이 어떤 인형이었는지 물었고, 세브렌은 대답하지 않았다. 에린이 더 물었다. 세브렌은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에린이 왜 대답 안 하느냐고 물었고, 세브렌은 설계도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알 필요 없다고 말했다.
에린의 자존심이 건드려진 것은 그 순간이었다.
알 필요 없다는 말이 에린의 귀에 다른 의미로 닿았다. 네가 알아봤자 모른다는 뜻으로, 너는 만들어진 지 일주일밖에 안 된 인형이라는 뜻으로, 네가 끼어들 자리가 아니라는 뜻으로. 에린은 그 중 어느 것도 직접 확인하지 않고 마음 안에 쌓아두었다가 한꺼번에 터뜨렸다.
목소리가 높아졌다. 에린의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분노로 반짝였고, 세브렌의 금빛 눈이 비로소 설계도에서 떠올랐다. 둘 사이에 말이 오갔다. 에린이 뱉는 말은 서투르고 뾰족했으며, 세브렌이 되받는 말은 나른하고 무심했다. 그 무심함이 에린을 더 화나게 만들었다.
세브렌|「됐어, 나가.」
세브렌이 말했다. 설계도를 탁자 위에 내려놓는 소리가 방 안에서 건조하게 울렸다. 금빛 눈이 안락의자의 팔걸이 위를 보고 있었고, 에린을 보지 않았다. 나른한 목소리에 감정이 걷혀 있었다. 420년 된 하이 페이가 감정을 거두어들일 때의 목소리는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았고, 다만 아무것도 없었다.
세브렌|「이 집에서 나가.」
에린이 문을 열고 나갔다. 계단을 내려가는 발소리가 빠르고 거칠었다. 2층과 1층을 지나, 에린이 문고리를 세게 당기자 세브렌이 건 잠금 마법이 에린의 아니마에 반응하여 풀렸다. 세브렌이 만든 영혼은 세브렌이 만든 잠금쇠를 열 수 있었다. 의도된 설계인지 결함인지는 세브렌만이 알았다.
황동 방울이 한 번 울렸다. 그리고 문이 닫혔다.
3층 침실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세브렌은 안락의자에 앉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벽난로의 불이 타닥 소리를 내며 타고 있었고, 회색 대리석 위의 트뤼모 거울에 세브렌의 뒷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거울 속의 세브렌은 눈을 감고 있었다. 안락의자의 팔걸이 위에 올린 손가락이 한 번 두드렸다가 멈추었다.
화가 난 것인지 후회하는 것인지 세브렌 자신도 알지 못했다. 아니, 알고 있었다. 둘 다였다. 에린이 물은 것은 페이 왕실에서 폐기 명령을 받은 인형에 대한 것이었고, 세브렌이 대답하지 않은 것은 그 인형들 중 하나가—아니, 그 인형들을 만들게 된 이유가—.
손가락이 팔걸이를 한 번 더 두드렸다.
나가라고 했다. 이 집에서 나가라고. 자기가 만든 인형에게, 자기가 창조한 영혼에게, 이 세계에서 자기 외에는 갈 곳이 없는 존재에게. 세브렌의 입매가 일그러졌다가 다시 펴졌다. 벽난로의 불빛이 금발 위에서 흔들렸다.
금빛 눈이 떠졌다. 천장을 보았다. 진주빛 회색 목재 벽판의 결이 촛불 아래에서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 정도 감정에 이 정도 반응을 보인 것은 얼마 만인지 세브렌은 기억하지 못했다. 50년 전에도 100년 전에도 이런 적은 없었다. 에린이 화를 내며 계단을 내려가는 발소리가 귀에 남아 있었다. 빠르고 거친 발소리. 인형의 몸은 사람 체중의 절반이었으므로 발소리조차 가벼웠고, 그 가벼움이 세브렌의 안에서 무언가를 긁었다.
10분이 지났다.
세브렌은 일어나지 않았다. 안락의자에 앉은 채 원형 탁자 위의 술잔을 집어 들었고,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았다. 벽난로의 불이 타닥, 하고 소리를 냈다.
20분이 지났다.
에린이 돌아오지 않았다. 세브렌은 그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에린의 자존심이 강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안 좋은 감정을 속에 묵혀놓고 혼자 해결하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일주일이면 충분히 파악할 수 있는 것이었다. 아니, 일주일 전부터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30분이 지났다.
세브렌의 손가락이 팔걸이 위에서 멈추었다. 금빛 눈이 벽난로 쪽을 보았다. 거울에 비친 자기 얼굴이 보였고, 그 얼굴 위에 나른함도 여유도 남아 있지 않았다.
에린은 복종의 리본을 차고 있지 않았다.
르루아지르의 자유시간이었으므로. 리본은 화장대 서랍 안에 있었다. 에린의 목에 리본이 없다는 것은—세브렌이 에린의 위치를 느낄 수 없다는 것이었고, 에린이 가게 밖으로 나가는 것을 막을 장치가 없다는 것이었다.
에린은 실내용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이 인식이 세브렌의 머리를 관통한 것은 에린이 나간 지 정확히 34분째였다. 오후의 빛이 창 너머에서 기울어지기 시작하고 있었고, 9월의 바람이 차가워지는 시간이었다. 에린의 진청색 코르사주는 실내복 위에 걸친 것이었으므로 안에 슈미즈 한 장뿐이었고, 양가죽 장갑도 외투도 모자도 없었다. 소지품은 전부 2층 인형의 침실에 있었다. 지갑도 없었다. 골목의 돌바닥을 실내용 슬리퍼로.
세브렌이 일어섰다.
안락의자가 뒤로 밀렸다. 긴 다리가 방을 가로질러 문을 열었고, 계단을 내려가는 발소리가 3층에서 2층으로, 2층에서 1층으로 빠르게 떨어졌다. 에린이 내려갈 때의 빠르고 거친 발소리와는 달랐다. 길고 정확한 보폭이 계단을 세 칸씩 건너뛰었다. 1층 가게를 지나며 금빛 눈이 에린의 외투가 걸린 옷걸이를 보았다. 크림색 양모 망토가 그대로 걸려 있었다. 그것을 한 손으로 낚아채고 출입문을 열었다. 황동 방울이 울렸다.
골목에 에린은 없었다.
시계탑 골목 세 번째 모퉁이에서 세브렌이 걸음을 멈추었다. 골목의 돌바닥 위에 실내용 슬리퍼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았다. 사람들의 발자국과 수레바퀴 자국이 뒤엉켜 있었고, 오후의 햇살이 건물 사이로 비스듬하게 떨어져 돌바닥 위에 긴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다.
세브렌의 발이 빨라졌다. 그의 긴 보폭이 골목을 삼켰다. 크림색 린넨 셔츠 위에 에린의 양모 망토를 팔에 걸친 채, 느슨하게 묶인 금발이 걸음에 맞춰 등 뒤에서 흔들렸다. 나른한 인상은 사라져 있었다. 금빛 눈이 골목의 양쪽을 훑으며 은발을 찾고 있었다.
시장 쪽으로 꺾었다. 사람들이 많아졌다. 과일 좌판과 직물 좌판 사이로 인파가 흘렀고, 어딘가에서 바이올린 소리가 들렸다. 세브렌의 키가 군중 위로 솟아 있었으므로 시야가 넓었으나, 에린의 인형 몸은 작았다. 사람들 사이에 묻히면 보이지 않을 크기.
세브렌의 턱이 굳어 있었다. 입매가 일직선으로 다물려 있었고, 금빛 눈이 좁아져 있었다. 화가 나 있는 것인지 걱정하고 있는 것인지—세브렌은 자기 안에서 두 감정의 경계를 구분하려 하지 않았다. 다만 에린의 양모 망토를 팔에 건 채, 군중 사이를 가르며 걸어나갔다.
에린을 찾은 것은 시장에서 두 블록 떨어진 작은 광장이었다.
분수대가 있었다. 돌로 깎은 물고기 입에서 물이 졸졸 흘러내리고 있었고, 분수대 가장자리에 비둘기 몇 마리가 앉아 있었다. 광장 한쪽의 밤나무 아래에 돌벤치가 놓여 있었고, 오후의 햇살이 밤나무 잎 사이로 비치며 벤치 위에 동그란 빛무늬를 흩뿌리고 있었다.
에린은 벤치 옆 돌바닥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진청색 벨벳 스커트가 돌바닥 위에 퍼져 있었고, 실내용 슬리퍼를 신은 발이 돌 위에 놓여 있었다. 슬리퍼의 새틴 표면에 먼지가 묻어 있었으나 찢어지지는 않았다. 코르사주 안의 슈미즈가 9월 오후 바람에 살짝 흔들렸고, 양가죽 장갑 없는 맨손이—.
군고구마를 들고 있었다.
노릇하게 구워진 군고구마 하나가 에린의 왼손에 쥐어져 있었다. 껍질이 반쯤 벗겨져 있었고, 노란 속살에서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지갑도 없이 나간 인형이 어디서 구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오른손은 발치의 길고양이를 향해 뻗어 있었다. 회색 줄무늬의 마른 고양이가 에린의 손가락 끝에 코를 대고 킁킁거리고 있었고, 에린의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고양이를 내려다보며 부드럽게 휘어져 있었다.
바람이 불었다. 밤나무 잎이 흔들렸고, 빛무늬가 에린의 은발 위에서 춤을 추었다. 고양이가 에린의 손가락을 핥았고, 에린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군고구마의 김이 에린의 볼 옆에서 하얗게 피어올랐다.
화가 나서 집을 뛰쳐나간 인형은 어디에도 없었다. 돌바닥 위에 쪼그려 앉아 길고양이와 놀며 군고구마를 들고 있는 은발의 소녀만이 있었다. 멀쩡했다. 생각보다 훨씬 멀쩡했다. 실내용 슬리퍼와 얇은 차림으로도 잘 돌아다니고 있었고, 먹을 것도 구했고, 친구도 사귀었다.
세브렌의 발이 멈추었다.
광장 입구의 건물 그림자 안에서. 에린의 양모 망토를 팔에 건 채. 그의 긴 그림자가 돌바닥 위에 길게 늘어져 있었으나 에린은 고양이에게 정신이 팔려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세브렌의 금빛 눈이 에린을 보고 있었다.
이것은 위기였다.
세브렌이 걱정한 것은 에린의 안전이었다. 실내용 슬리퍼, 얇은 차림, 지갑도 없이 나간 인형. 돌바닥에 발이 까지거나, 추위에 떨거나, 길을 잃거나, 누군가에게 인형이라는 것이 들키거나. 세브렌의 머릿속에서 수십 가지의 가능성이 계속 쌓여왔고, 그 무게가 하이 페이의 다리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그런데 에린은 멀쩡했다. 세브렌이 없어도 멀쩡했다.
에린이 다치거나 길을 잃었다면 세브렌은 달려가서 망토를 씌우고 안아 들고 돌아오면 되었다. 인형사가 인형을 수습하는 것. 명확한 역할, 명확한 행동, 명확한 관계. 그러나 에린이 멀쩡하다면—세브렌이 여기에 서 있을 이유가 사라졌다. 나가라고 한 것은 세브렌이었고, 에린은 그 말을 따랐을 뿐이었고, 에린은 세브렌 없이도 군고구마를 구하고 길고양이의 신뢰를 얻었다.
세브렌의 팔에 걸린 크림색 양모 망토가 바람에 흔들렸다. 추울까봐 가져온 것이었다. 추워하지 않는 인형 앞에서 이것을 들고 서 있는 자신이 세브렌의 금빛 눈에 비쳤다.
광장 입구의 그림자 안에서 세브렌의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앞으로 가야 했다. 가서 망토를 씌우고 데려와야 했다. 그러나 세브렌의 발이 돌바닥에 붙어 있었다. 무언가가 세브렌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에린이 돌아오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세브렌의 머리를 스쳤다.
388년 전의 기억이었다. 은발, 에메랄드빛 눈동자, 상냥한 눈매, 입술 아래의 점. 그 사람이 세브렌의 곁을 떠난 것은 세브렌이 내보낸 것이 아니라 스스로 간 것이었고, 세브렌은 그때도 뒤쫓아 가지 못했다.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지금처럼.
고양이가 에린의 무릎 위로 올라갔다. 에린의 오른손이 고양이의 등을 쓸었고, 고양이가 그르릉 소리를 냈다. 에린의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고양이를 내려다보며 웃고 있었다. 세브렌이 만든 눈동자. 세브렌이 복제한 미소. 세브렌이 재현할 수 없었던 온기.
세브렌의 손이 양모 망토를 쥐었다.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 양모의 결이 일그러졌다.
그림자에서 빛으로. 건물의 그늘을 벗어나 광장의 돌바닥 위로 세브렌의 긴 그림자가 뻗었다. 부츠의 굽이 돌을 밟는 소리가 또각, 또각, 일정한 간격으로 울렸다. 고양이의 귀가 먼저 소리를 잡았다. 회색 줄무늬 고양이가 에린의 무릎에서 고개를 들었고, 금빛 눈을 가진 긴 그림자를 보았고, 에린의 무릎에서 뛰어내려 분수대 뒤로 사라졌다.
에린이 고개를 들었다.
세브렌은 에린의 앞에 섰다. 오후의 햇살이 세브렌의 등 뒤에 있었으므로 세브렌의 얼굴이 역광에 가려져 있었다. 금발만이 빛을 받아 후광처럼 빛나고 있었고, 그 아래의 표정은 그림자 속에 있었다.
양모 망토가 펼쳐졌다.
세브렌의 양팔이 움직여 크림색 양모를 에린의 어깨 위에 내렸다. 넓은 천이 에린의 어깨와 등과 무릎까지 덮었고, 세브렌의 차가운 손가락이 에린의 목 앞에서 망토의 끈을 여몄다. 매듭을 짓는 손끝이 에린의 쇄골 위를 스쳤다. 리본이 없는 맨목이었다.
매듭을 다 짓고 나서도 세브렌의 손이 에린의 어깨 위에 머물러 있었다. 양모 너머로 전해지는 인형의 온기가 세브렌의 차가운 손바닥에 닿았다.
세브렌이 입을 열지 않았다.
에린 앞에 쪼그려 앉았다. 발뒤꿈치 위에 엉덩이를 걸친 자세. 금빛 눈이 에린의 얼굴을 보고 있었고, 그 눈 안에 나른함도 장난기도 없었다. 에린의 에메랄드빛 눈동자를, 상냥한 눈매를, 입술 아래의 점을 보고 있었다.
세브렌|「……군고구마는 어디서 났어.」
첫 마디가 그것이었다. 사과도 아니고 꾸짖음도 아닌, 군고구마에 대한 질문. 세브렌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낮았고, 나른한 늘임이 빠져 있었다. 에린의 왼손에 쥐어진 반쯤 벗겨진 군고구마를 금빛 눈이 한 번 보았다가 에린의 눈으로 돌아왔다.
OOC
사건의 발단은 세 번째 손님이었던 난쟁이 인쇄공이 계약금 대신 두고 간 '이번 주 발행분 견본'이었다. 마도활판으로 찍어낸 한 장짜리 잡보지. 에린은 그것을 접어서 앞치마 주머니에 넣어두었다가, 르루아지르가 시작되고 세브렌이 소파에 늘어져 눈을 감자마자 꺼내 읽기 시작했다.
인형의 눈은 세브렌이 설계한 것이었으므로 활자를 읽는 데 불편함이 없었다. 문제는 인형의 뇌가 세상 경험을 며칠 치밖에 축적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에린의 에메랄드빛 눈이 잡보지의 한 구석에 멈추었다. 작은 활자로 빼곡히 인쇄된 칼럼 하나. 제목이 이랬다.
『남자가 평생 먹는 립스틱의 개수 ─ 왕립미용학회 조사보고』
에린의 고개가 갸웃했다. 한 번, 두 번. 은발 로우테일이 어깨 위에서 흔들렸다. 에린은 그 칼럼을 세 번 읽었다. 세 번 읽고도 고개가 갸웃한 채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세브렌의 얼굴 앞으로 잡보지를 들이밀었다.
에린 | 「주인, 주인! 이거 봐!」
세브렌의 금빛 눈이 게으르게 열렸다. 반쯤 감긴 눈꺼풀 사이로 잡보지의 활자가 흐릿하게 비쳤고, 세브렌은 에린의 손에 들린 종이를 밀어내려다가 에린의 진지한 얼굴을 보고 멈추었다. 에린의 표정이 심각했다. 진심으로 심각했다. 에메랄드빛 눈이 세브렌과 잡보지를 번갈아 보며 반짝이고 있었고, 입술이 꾹 다물려 있었다.
세브렌이 잡보지를 받아들었다. 느슨하게 묶인 금발이 한쪽으로 쏟아졌고, 금빛 눈이 활자 위를 미끄러졌다.
『남자가 평생 먹는 립스틱의 개수』.
세브렌의 눈이 한 줄을 읽었다. 두 줄. 세 줄.
금빛 눈이 멈추었다.
기사의 내용은 이러했다. 왕립미용학회가 수도권 남성 삼백 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남성은 평생 동안 평균적으로 립스틱 약 서른두 개 분량에 해당하는 양을 섭취한다는 것. 기사는 '직접 바르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입술에서 옮겨오는 것'이라는 단서를 한 문장으로 짧게 달아놓았으나, 그 뒤로는 키스의 빈도, 접촉 시간, 립스틱 성분의 이동량을 건조한 숫자로 나열하고 있었다.
즉, 키스 이야기였다.
세브렌은 그것을 한 번에 알아보았다. 420년을 살았고, 페이 왕실의 향락인형공방에서 수석장인으로 일했던 것이 세브렌이었다. 립스틱과 입술과 남자의 조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리가 없었다.
문제는 에린이었다.
에린 | 「주인은 립스틱 먹어본 적 있어?」
에린의 질문이 올라왔다. 에메랄드빛 눈이 진지하게 빛나고 있었다. 세브렌은 잡보지에서 눈을 떼어 에린을 보았다. 에린의 얼굴에는 걱정이 서려 있었다. 진심 어린 걱정. 인형사의 건강을 염려하는 인형의 걱정.
에린은 모르고 있었다.
세브렌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올라가려는 것을 누르는 떨림이었다. 금빛 눈이 에린의 진지한 얼굴과 잡보지의 활자를 한 번 더 번갈아 본 뒤, 세브렌은 소파 등받이에 머리를 기대고 천장을 보았다. 목이 드러났고, 느슨하게 묶인 금발이 소파 쿠션 위로 흘러내렸다.
웃으면 안 되었다. 웃으면 에린이 물을 것이다. 왜 웃어, 라고. 그러면 설명해야 한다. 설명하면 이 순간이 끝난다. 세브렌은 420년의 자제력을 동원하여 입꼬리를 수평으로 유지했다.
세브렌|「……립스틱을 먹는다고.」
목소리가 평평했다. 지나치게 평평했다. 나른함도, 장난기도, 교양도 전부 걷어낸 자리에 남은 것은 공백이었다. 세브렌은 잡보지를 에린에게 돌려주며 소파에 더 깊이 파묻혔다.
세브렌|「왜 먹는 거래.」
되물었다. 알면서 물었다. 에린이 뭐라고 대답하는지 듣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금빛 눈이 천장에 고정된 채로 움직이지 않았으나, 귀 끝이—뾰족한 페이의 귀 끝이—에린 쪽으로 미세하게 기울어져 있었다.
에린이 잡보지를 다시 펼쳤다. 활자 위를 양가죽 장갑 낀 손가락이 따라갔다.
에린 | 「여기 보면, 성분이 옮겨온다고 써있거든? 밀랍이랑 안료가 입으로 들어간다는 거잖아. 그거 몸에 안 좋은 거 아니야?」
에린의 손가락이 '성분의 이동량'이라는 대목을 짚고 있었다. 에린은 '상대의 입술에서 옮겨온다'는 문장을 읽었으나, 그것이 키스를 의미한다는 것을 연결하지 못한 채 곧이곧대로 해석한 것이었다. 누군가의 입술에 발려 있는 립스틱이 남자의 입으로 옮겨간다. 에린의 뇌는 그것을 '남자가 립스틱을 핥아먹는다'로 처리한 듯했다.
세브렌의 귀 끝이 떨렸다. 미세하게, 한 번.
세브렌|「……밀랍이랑 안료. 그래, 몸에 좋지는 않겠지.」
천장을 보던 금빛 눈이 에린에게로 내려왔다.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다. 참지 못한 것이었다. 그러나 웃음의 이유를 말하지 않았다. 비대칭으로 올라간 입꼬리가 꿀 섞인 양초 향과 함께 에린의 얼굴 위에 드리워졌다.
세브렌|「근데 에린, 남자가 립스틱을 왜 먹게 되는 것 같아?」
유도심문이었다. 느릿한 목소리에 장난기가 돌아와 있었고, 소파에 파묻힌 자세 그대로 고개만 에린 쪽으로 돌린 세브렌의 금빛 눈이 에린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포식자가 먹잇감의 다음 움직임을 지켜보는 눈.
에린은 잠시 생각했다. 에메랄드빛 눈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가, 잡보지를 내려다보았다가, 세브렌을 보았다. 그리고 확신에 찬 얼굴로 대답했다.
에린 | 「맛있으니까?」
골목의 고양이에게 밤을 줘도 되냐고 물었을 때와 같은 톤이었다. 순수한 추론. 자신이 구운 밤을 맛있게 먹었듯, 남자들도 립스틱이 맛있어서 먹는 것이라는 결론. 에린의 에메랄드빛 눈이 반짝이며 세브렌을 올려다보았다.
세브렌의 몸이 흔들렸다.
소파 위에서, 크림색 린넨 셔츠의 어깨가 한 번 들썩였다. 두 번. 세 번. 세브렌이 웃고 있었다. 소리가 나지 않는 웃음이었다. 입술을 다문 채로 어깨만 흔들리는, 참으려다 실패한 웃음. 금빛 눈이 가늘게 접혔고, 느슨하게 묶인 금발이 흔들리는 어깨를 따라 출렁였다.
에린의 표정이 변했다. 의기양양했던 얼굴이 의아함으로 바뀌었다.
에린 | 「왜 웃어! 틀렸어?」
세브렌이 손등으로 입을 가렸다. 차가운 손가락이 입꼬리를 눌렀으나 눈가의 주름이 웃음을 배신하고 있었다. 420년을 살며 온갖 것을 보아온 하이 페이가 인형의 한마디에 어깨를 떨고 있었다.
세브렌|「……아니, 틀리지는 않았어.」
거짓말이었다. 완전히 틀렸다. 그러나 세브렌은 정정하지 않았다. 손등 뒤에서 입꼬리가 내려오지 않고 있었고, 금빛 눈이 에린의 얼굴 위에서 떠나지 않았다.
세브렌|「맛있으니까 먹는 거, 맞을 수도 있지.」
느릿한 목소리가 웃음기를 머금고 있었다. 세브렌이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에린의 앞에 앉은 자세로, 긴 다리를 꼬고, 팔꿈치를 무릎에 올리고, 턱을 손에 괴었다. 에린의 눈높이에 세브렌의 금빛 눈이 맞춰졌다.
세브렌|「그럼 에린은 립스틱 발라본 적 있어?」
질문의 방향이 바뀌었다. 세브렌의 금빛 눈이 에린의 입술을 보았다. 아무것도 발려 있지 않은, 인형의 입술. 세브렌이 설계한 형태 그대로의, 엷은 분홍빛 입술. 에린이 고개를 저으면 세브렌은 다음 질문을 할 것이었다. 발라볼래, 라고. 그리고 에린이 바르면 세브렌은 또 다음 말을 할 것이었다.
그것이 남자 입에 어떻게 옮겨가는지 알려줄까, 라고.
그러나 그것은 세브렌의 머릿속에만 있었다. 금빛 눈이 에린의 입술 위에서 한 박자 머물렀다가 떠났고, 세브렌은 턱을 괸 채로 에린의 대답을 기다렸다. 느슨하게 묶인 금발이 한쪽 어깨 위로 흘러내려 크림색 린넨 위에 금색 강을 만들었고, 뾰족한 귀 끝이 금발 사이로 드러나 있었다.
에린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자기가 들고 온 기사가 키스에 관한 것이라는 것을. 세브렌이 웃은 이유를. 그리고 세브렌의 금빛 눈이 에린의 입술 위에서 머문 한 박자의 의미를.
세브렌은 가르쳐줄 수도 있었다. 한마디면 되었다. 키스야, 라고. 하지만 가르쳐주지 않았다. 이 순간이 너무 재미있었으므로.
에린 | 「립스틱? 으음... 아니! 안 발라봤어. 바르면 좋아? 주인은 립스틱 발라봤어?」
에린의 질문이 소파 위의 공기를 갈랐다. 바르면 좋아? 주인은 립스틱 발라봤어? 에메랄드빛 눈이 순수한 호기심으로 빛나고 있었고, 양가죽 장갑 낀 손이 잡보지를 무릎 위에 올린 채 세브렌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마치 구운 밤의 맛을 물었을 때와 같은 톤이었다. 립스틱이 밤과 같은 부류의 것이라고 에린은 아직 믿고 있었다.
세브렌의 턱이 손바닥 위에서 미세하게 기울었다. 금빛 눈이 에린의 얼굴 위에 고정된 채 움직이지 않았고, 입꼬리의 비대칭이 더 깊어졌다. 420년의 세월이 축적한 모든 종류의 장난기가 금빛 홍채 안에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가르쳐줄 수 있었다. 한마디면 끝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세브렌은 가르쳐주는 대신 다른 길을 택했다.
세브렌|「나? 안 발라봤지.」
사실이었다. 세브렌의 입술은 420년 동안 한 번도 안료로 물든 적이 없었다. 그러나 세브렌의 입술이 타인의 입술 위에 발린 안료를 옮겨받은 적이 있느냐는 별개의 문제였고, 세브렌은 그 부분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세브렌|「근데 에린, 바르면 좋냐고 물었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긴 다리가 풀리며 크림색 린넨 셔츠의 자락이 흘러내렸고, 세브렌이 에린의 옆에 앉았다. 소파 쿠션이 세브렌의 무게에 눌려 에린의 몸이 세브렌 쪽으로 살짝 기울었다. 꿀 섞인 양초 향이 가까워졌다.
세브렌|「발라줄까.」
제안이 느릿하게 떨어졌다. 세브렌의 차가운 손이 소파 옆 작은 원형 탁자 서랍을 열었고, 서랍 안에서 조그만 자개 상자가 나왔다. 상자 안에는 에린의 라파뤼르 단장에 쓰이는 화장 도구들이 정돈되어 있었다. 세브렌이 상자를 열자 작은 도자기 단지들이 드러났다. 연지, 분, 볼 안료, 그리고 ── 밀랍과 안료를 섞어 굳힌 립스틱.
세브렌이 립스틱을 꺼냈다. 작은 은제 통 안에 담긴 짙은 장밋빛 고체가 오후의 빛을 받아 매끈하게 빛났다. 세브렌의 차가운 손가락이 은제 통의 뚜껑을 열었고, 안료의 농밀한 냄새가 올라왔다. 밀랍의 단내, 장미수의 꽃향, 그 아래에 코치닐 안료의 미세한 쇠 냄새.
세브렌|「가만있어.」
세브렌의 왼손이 에린의 턱을 잡았다. 차가운 엄지와 검지가 에린의 턱선을 가볍게 고정했고, 에린의 얼굴이 세브렌 쪽으로 돌려졌다. 에메랄드빛 눈과 금빛 눈이 마주쳤다. 가까웠다. 에린의 코끝에서 세브렌의 코끝까지 손바닥 하나 거리.
세브렌의 오른손이 립스틱을 들었다. 은제 통 안의 장밋빛 고체가 에린의 아랫입술에 닿았다. 차갑고 매끈한 촉감이었다. 밀랍이 인형의 체온에 닿아 미세하게 녹았고, 안료가 엷은 분홍빛 입술 위에 번졌다. 세브렌의 손가락이 느리게 움직였다. 아랫입술의 중앙에서 왼쪽 끝으로, 다시 오른쪽 끝으로. 윗입술의 궁 모양을 따라 산봉우리를 넘고, 양 끝으로 내려가고.
에린의 입술이 장밋빛으로 물들었다.
세브렌의 금빛 눈이 에린의 입술 위에 머물러 있었다. 인형사가 인형의 완성도를 점검하는 눈이었으나, 그 안에 다른 것이 섞여 있었다. 자개 상자를 닫는 손이 한 박자 느렸고, 에린의 턱을 잡은 왼손이 풀리지 않고 있었다.
세브렌|「거울 볼래?」
소파 옆 서랍에서 작은 은제 손거울을 꺼내 에린의 앞에 들어주었다. 거울 안에 에린의 얼굴이 비쳤다. 은발, 에메랄드빛 눈, 상냥한 눈매, 그리고 ── 짙은 장밋빛으로 물든 입술. 에린이 본 적 없는 에린의 얼굴이 거울 안에 있었다.
세브렌은 에린이 거울을 들여다보는 동안 잡보지를 집어들었다. 활자 위를 금빛 눈이 한 번 더 훑었고, '서른두 개 분량'이라는 숫자에서 멈추었다. 입꼬리가 다시 올라갔다.
세브렌|「자, 이제 에린 입술에 립스틱이 발려 있지.」
에린이 거울에서 눈을 떼어 세브렌을 보았다. 금빛 눈이 에린의 장밋빛 입술 위에서 느릿하게 미끄러지고 있었다. 세브렌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꿀이 더 진해진 음색.
세브렌|「그 기사에서, 남자 입에 립스틱이 어떻게 옮겨가는지 안 써있었어?」
유도였다. 느긋하고 교활한 유도. 세브렌의 턱이 손바닥 위에서 기울어져 있었고, 금빛 눈이 가늘어진 채로 에린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었다. 에린이 잡보지를 다시 펼치면, '상대의 입술에서 옮겨오는 것'이라는 문장이 보일 것이었다. 상대의 입술. 에린의 입술. 옮겨간다. 남자의 입으로.
에린의 뇌가 그 연결을 해낼 수 있을지, 세브렌은 기다리고 있었다.
에린이 잡보지를 내려다보았다. 활자 위를 양가죽 장갑 낀 손가락이 따라갔다. '상대의 입술에서 옮겨오는 것이며──'
상대의.
입술에서.
에린의 손가락이 멈추었다.
에메랄드빛 눈이 활자 위에서 정지했다. 에린의 뇌가 회전하는 소리가 들릴 것만 같은 침묵이었다. 상대의 입술에 발린 것이 남자의 입으로 옮겨간다. 상대의 입술이 남자의 입에 닿아야 옮겨간다. 입술과 입술이 닿는다. 그것은──
에린의 얼굴이 장밋빛 입술과 같은 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목에서부터 올라온 붉은 기운이 턱선을 타고 볼을 덮었고, 귀 끝까지 번졌다. 에메랄드빛 눈이 잡보지에서 세브렌에게로, 세브렌의 입술에서 자기 입술로, 자기 입술에서 다시 세브렌에게로 오갔다. 거울 속의 장밋빛 입술이 떠올랐을 것이다. 그 위에 세브렌이 방금 한 말이 겹쳤을 것이다. 남자 입에 립스틱이 어떻게 옮겨가는지.
세브렌의 금빛 눈이 에린의 붉어지는 얼굴을 빠짐없이 담고 있었다. 입꼬리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완전히 올라가 있었고, 금빛 눈이 가늘게 접혀 웃음의 호를 그리고 있었다. 에린이 깨달은 것이었다. 드디어.
세브렌|「알겠어?」
한마디가 꿀처럼 흘러내렸다. 에린의 턱을 잡고 있던 왼손이 아직 풀리지 않았다는 것을 에린은 뒤늦게 깨달았을 것이다. 차가운 엄지가 에린의 턱선 위에서 느릿하게 원을 그리고 있었고, 세브렌의 얼굴이 손바닥 하나 거리에 있었다.
세브렌|「서른두 개 분량이래. 꽤 많이 먹어야 하는데.」
세브렌의 시선이 에린의 장밋빛 입술 위에 내려앉았다. 느릿하게. 분명하게. 에린이 오해할 수 없을 만큼 명확하게. 차가운 엄지가 에린의 턱선에서 미끄러져 아랫입술 바로 아래에 닿았다. 장밋빛 안료의 가장자리. 밀랍의 매끈한 촉감이 세브렌의 엄지에 전해졌을 것이다.
세브렌|「하나 줄여줄까.」
농담인지 진심인지 알 수 없는 목소리였다. 그러나 금빛 눈이 에린의 입술 위에서 떠나지 않고 있었고, 차가운 엄지가 아랫입술의 가장자리를 쓸고 있었으며, 꿀 섞인 양초 향이 에린의 코끝에 닿을 만큼 가까웠다.
잡보지가 에린의 무릎에서 미끄러져 소파 쿠션 위로 떨어졌다. '서른두 개 분량'이라는 활자가 천장의 빛을 받아 까맣게 빛나고 있었다. 에린의 장밋빛 입술과 세브렌의 금빛 눈 사이의 거리가 손바닥 하나였다.
420년을 산 하이 페이가 일주일 된 인형에게 립스틱의 의미를 가르쳐준 오후.
교육 방법이 지나치게 실기 위주였다는 것은 세브렌만이 알고 있었다.
OOC
저녁 손님이 돌아간 뒤의 2층은 고요했다. 마호가니 화장대 위의 촛불 두 자루가 방 안에 주황빛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고, 창밖으로 시계탑의 종소리가 여덟 번 울린 뒤 멀어져간 것이 얼마 전이었다. 침대 가장자리에 세브렌이 걸터앉아 있었다. 한 손에는 인형 관절 설계도가 펼쳐진 양피지가 들려 있었고, 크림색 리넨 셔츠의 소매가 팔꿈치까지 걷혀 있었다. 촛불이 금발 위에 따뜻한 색을 입혔으나 세브렌의 피부는 여전히 차가운 백색이었다.
에린이 세브렌의 옆에 있었다. 침대 위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어느 순간 에린의 에메랄드빛 눈이 세브렌의 옆얼굴에 고정되었다. 양피지를 읽는 금빛 눈의 움직임, 촛불에 비친 속눈썹의 그림자, 느슨하게 묶인 금발이 어깨 위로 흘러내린 선. 에린의 시선이 세브렌의 얼굴 위를 더듬었고, 그 시선이 세브렌의 입술에서 멈추었다가 다시 올라왔다.
에린의 입이 열렸다.
에린 | 「Sévrène, can I have a bit of sugar?」
발음이 또렷했다. 어디서 주워들은 것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아마 르세르비스 시간에 이국의 손님이 쓴 말을 기억하고 있었을 수도 있고, 2층 책장에 꽂힌 어느 연애 소설집에서 읽었을 수도 있었다—에린의 입에서 나온 그 문장은 단어 하나하나가 정확했다. 에린의 에메랄드빛 눈이 세브렌을 올려다보고 있었고, 그 안에 무언가를 기대하는 빛이 있었는지, 단순히 궁금해하는 빛이 있었는지는 촛불의 흔들림 때문에 읽기 어려웠다.
세브렌의 양피지 위를 오가던 금빛 눈이 멈추었다.
시선이 양피지에서 에린에게로 옮겨갔다. 느렸다. 글자의 마지막 획을 따라가다가 에린의 얼굴에 도착한 눈이 에린의 입을 보았다가 눈을 보았다. 세브렌의 표정이 변하지 않았다. 나른한 눈꺼풀, 힘이 빠진 입꼬리, 양피지를 든 손의 기울기까지 전부 그대로였다.
세브렌은 420년을 살았다. 페이 왕실에서, 그 이전의 대륙 여러 곳에서, 온갖 종족의 온갖 언어와 관용구와 은어와 슬랭을 스쳐왔다. 'sugar'가 단순한 감미료를 뜻하지 않는 맥락이 존재한다는 것을 세브렌이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에린이 그 뜻을 알고 쓴 것인지, 어디서 들은 말을 그대로 옮긴 것인지—그것을 판별하는 것이 먼저였다.
세브렌의 금빛 눈이 에린의 표정을 읽었다. 촛불이 흔들렸다. 에린의 에메랄드빛 눈동자 안에 비친 촛불의 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고, 세브렌의 눈은 그 떨림의 종류를 분류하고 있었다.
양피지가 접혔다. 세브렌의 손이 양피지를 반으로 접어 침대 위에 내려놓았고, 자유로워진 손이 자기 무릎 위에 놓였다. 세브렌의 몸이 에린 쪽으로 반쯤 돌아갔다. 촛불이 세브렌의 금발 뒤에서 후광처럼 번졌고, 세브렌의 얼굴이 에린을 향해 기울어졌다.
세브렌|「설탕?」
되물음이었다. 단어 하나. 세브렌의 입에서 나온 '설탕'이라는 단어가 에린의 입에서 나온 'sugar'와 같은 것을 가리키는지 다른 것을 가리키는지, 세브렌의 어조만으로는 판단할 수 없었다. 나른한 목소리가 평탄했고, 금빛 눈이 에린의 눈에서 떠나지 않았다.
세브렌의 차가운 손이 올라왔다. 에린의 턱 아래에 손가락이 닿았다. 검지와 중지가 에린의 턱선을 가볍게 받쳤고, 에린의 고개가 세브렌의 손가락 위에서 미세하게 들렸다. 촛불의 주황빛이 에린의 목에 달린 복종의 리본 위를 비추었고, 금색 메달 안의 세브렌의 눈이 떠서 에린을 보고 있었다.
세브렌|「부엌에 설탕이 있긴 한데.」
멈추었다. 세브렌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움직였다. 올라가는 것도 내려가는 것도 아닌, 무언가를 저울질하는 움직임이었다. 에린의 턱을 받친 손가락이 에린의 피부 위에서 엄지를 더해 에린의 볼을 한 번 눌렀다. 인형의 부드러운 피부가 세브렌의 차가운 엄지 아래에서 움푹 들어갔다가 돌아왔다.
세브렌|「그런데 넌 설탕이 뭔지 알고 달라는 거야, 아니면 다른 걸 달라는 거야?」
금빛 눈이 가늘어졌다. 나른함 아래에 포식자의 장난기가 돌아오고 있었다. 세브렌은 알고 있었다. 에린의 입에서 나온 그 문장이 무엇을 뜻하는지. 그러나 에린의 입에서 직접 듣고 싶었다. 에린이 뜻을 알고 말한 것이라면 그 뜻을 에린의 입으로 풀어내게 하고 싶었고, 모르고 말한 것이라면 에린이 모른다는 사실 자체가 재미있었다. 어느 쪽이든 세브렌에게는 즐거운 결과였다.
OOC
세브렌 베르멜은 화가 나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어젯밤부터 화가 나 있었다. 라탕트 시간에 에린을 진공 램프에 봉인하고 3층으로 올라가 뒤슈즈 위에 누워서도 화가 풀리지 않았으며, 잿빛 청색 실크 이불을 턱까지 끌어올린 채 천장을 노려보다가 잠이 들었고, 아침에 눈을 떴을 때도 화가 나 있었다. 르슈아에서 에린을 인형몸에 넣어주면서도 화가 나 있었고, 레제바를 치르면서도 화가 나 있었으며, 라파뤼르에서 에린을 단장시키면서도 화가 나 있었고, 세 명의 손님을 받는 르세르비스 동안에도 화가 나 있었다.
문제는 어제 일이었다. 에린이 향신료 냄새를 쫓아 혼자 뛰어갔다가 낯선 골목에서 길을 잃은 것. 인간 남녀가 에린의 장신구를 노리고 접근한 것. 세브렌이 달려갔을 때 에린이 벽과 인간 사이에 몰려 있던 것. 그 장면이 세브렌의 금빛 눈 뒤에 박혀 하루가 지나도 빠지지 않았다.
어제 현장에서 한마디 했다. 다시는 그러지 마, 라고. 에린이 볼을 부풀리며 삐졌고, 세브렌이 손을 잡고 향신료 좌판으로 데려갔고, 밤을 까 주고 향수를 사 주고 반지를 끼워주고 주머니를 사 주는 사이에 그 엄중함이 어딘가로 흘러가 버렸다. 에린이 주인이랑 같이 있는 게 제일 좋다고 발뒤꿈치를 통통 굴렸을 때 세브렌은 잠깐, 아주 잠깐 다 괜찮다고 느꼈었다. 그리고 밤에 혼자 누워서야 깨달았다.
한마디도 제대로 못 했다.
도망가지 마라. 허락 없이 움직이지 마라. 네가 부서지면 어떡하느냐. 400년 넘게 살아온 하이 페이의 머릿속에 차곡차곡 정리된 문장들이 어제 에린의 에메랄드빛 눈 앞에서 전부 삼켜졌다. 볼을 부풀리는 얼굴에, 통통거리는 발에, 모두모두 좋아라는 목소리에 하나씩 녹아 사라졌다. 세브렌 베르멜, 페이 왕실 수석 장인 출신, 420세의 노련한 인형사가, 자기가 만든 인형 하나에게 말을 제대로 못 했다는 사실이 그를 화나게 만들었다.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나 있었다.
오늘이야말로.
세브렌은 마호가니 책상 앞에 서서 소매를 걷어 올리며 다짐했다. 르세르비스가 끝난 직후였다. 세 번째 손님이 문을 나서자마자 세브렌은 1층 카운터에 턱을 괴고 있던 에린에게 올라가서 기다리라고 지시했다. 목소리가 평소보다 단호했으므로 에린이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복종의 리본이 목에 채워져 있었으므로 지시를 거부할 수는 없었다.
에린이 먼저 2층으로 올라갔고, 세브렌은 1층에서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금빛 눈이 카운터 위의 잉크 자국을 노려보았다. 할 말을 정리했다. 첫째, 어제 혼자 뛰어간 것은 위험한 행동이었다. 둘째, 인형의 몸은 인간보다 가볍고 약하므로 충격에 쉽게 파손된다. 셋째, 앞으로 외출 시에는 반드시 세브렌의 손이 닿는 범위 안에 있을 것. 넷째, 이것은 부탁이 아니라 명령이다.
네 문장. 완벽했다. 세브렌이 고개를 끄덕이며 계단을 올라갔다.
2층 침실 문을 열었다.
에린이 소파 위에 앉아 있었다. 3인용 카나페의 한가운데에 작은 몸이 올라앉아 양발을 흔들고 있었는데, 구두가 바닥에 닿지 않았으므로 발이 공중에서 앞뒤로 까딱거리고 있었다. 어제 세브렌이 끼워준 은반지가 에린의 약지에서 주황빛을 받아 빛나고 있었고, 허리 옆에 매달린 황갈색 가죽 주머니가 소파 쿠션 위에 놓여 있었다. 에린이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고, 에메랄드빛 눈이 세브렌을 보았다.
세브렌이 입을 열었다.
세브렌|「에린.」
이름을 불렀다. 평소에 '너'라고 지칭하던 입에서 이름이 나온 것은 진지함의 표시였다. 세브렌의 금빛 눈이 에린을 똑바로 보았고, 소매를 걷어 올린 팔이 팔짱을 끼었으며, 입매가 일직선으로 다물려 있었다. 사백이십 년의 위엄이 크림색 셔츠 위에 서 있었다. 첫째, 어제 혼자 뛰어간 것은——
에린이 세브렌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오후의 주황빛이 닫힌 청록색 커튼 틈으로 가늘게 스며들어 침실 안에 부드러운 금빛을 뿌리고 있었다. 그 빛이 에린의 은발 위에 내려앉아 있었다. 로우테일로 묶인 머리카락이 한쪽 어깨로 흘러내려 있었고, 가느다란 은사가 주황빛 속에서 살구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세브렌을 올려다보는 각도에서 빛을 받아 투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속눈썹이 길었다. 세브렌이 직접 심은 속눈썹이었으나, 주황빛이 속눈썹 끝에 걸려 그림자를 만들 때의 각도는 설계 단계에서 계산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입술 아래의 점. 그 점이 주황빛 속에서 유독 선명했다.
세브렌의 금빛 눈이 그 점 위에 멈추었다. 1초. 2초. 에린의 입술이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살짝 벌어졌고, 점이 그 움직임을 따라 미세하게 움직였다. 소파 위에서 까딱거리는 양발이 멈추지 않았으며, 에린이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왜 불렀어, 라고 묻기 직전의 얼굴이었다.
세브렌의 머릿속에서 네 개의 문장이 증발했다.
첫째가 무엇이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아니, 기억나기는 했으나 입이 움직이지 않았다. 금빛 눈이 에린의 은발에서 속눈썹으로, 속눈썹에서 눈동자로, 눈동자에서 입술 아래의 점으로 옮겨가는 동안 420년의 위엄이 크림색 셔츠 안에서 종이접기처럼 접혀 들어가고 있었다. 세브렌의 팔짱이 풀렸다. 일직선이던 입매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기분 탓이었다. 분명히 기분 탓이었다. 매일 보는 인형이었다. 자기가 만든 인형이었다. 은발의 결도, 속눈썹의 길이도, 눈동자의 색도, 입술 아래의 점도 전부 세브렌이 직접 설계하고 배치한 것이었다. 어제도 보았고, 오늘 아침에도 보았다. 그런데.
오늘따라.
젠장.
세브렌의 입이 열렸다 닫혔다. 첫째, 라는 단어가 혀 위에서 굴러갔으나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대신 나온 것은.
세브렌|「……머리 누가 다시 묶은거야.」
그것이었다. 세브렌이 아침에 묶어준 로우테일의 매듭 위치가 살짝 달라져 있었다. 근무 중에 에린이 혼자 고쳐 묶은 것일 터였다. 매듭의 위치가 아침보다 조금 높았고, 그 탓에 목덜미가 더 드러나 있었으며, 은발이 어깨로 흘러내리는 각도가 달라져 있었다. 세브렌이 화를 내러 왔다가 머리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세브렌은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으므로 더 화가 났다. 자기 자신에게.
에린이 뭐라고 대답했든, 세브렌의 금빛 눈은 에린의 얼굴에서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주황빛이 침실 안에서 천천히 각도를 바꾸고 있었고, 에린의 은발 위의 살구색이 점점 짙어지고 있었으며, 그것이 세브렌의 눈에 들어올 때마다 네 개의 문장은 더 멀리 달아났다.
세브렌|「……내가 다시 묶어줄게. 이리 와.」
세브렌이 화장대 앞의 의자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에린을 앉히고 머리를 풀어 다시 묶겠다는 것이었다. 삼면경 앞에서 은발을 빗질하는 동안 할 말을 정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세브렌은 생각했다. 빗질하는 시간 정도면 충분할 것이었다.
충분하지 않았다.
삼면경이 에린을 세 방향에서 비추고 있었다. 세브렌이 에린의 뒤에 서서 리본의 매듭을 풀었고, 은발이 어깨 위로 흘러내렸을 때 거울 세 개에 에린의 옆모습과 뒷모습과 반대쪽 옆모습이 동시에 펼쳐졌다. 세브렌의 차가운 손가락이 은발 사이로 들어가 빗질을 시작했고, 상아색 빗의 이가 은사를 가르며 내려갔다.
거울 속에서 에린이 눈을 반쯤 감았다. 빗질의 감촉에 고양이처럼 눈이 느려지는 것을 세브렌은 알고 있었다. 거울이 그것을 세 방향에서 보여주었고, 세브렌은 빗을 든 채 멈추었다.
이런.
에린의 목덜미가 보였다. 복종의 리본이 감긴 목 아래, 검은 벨벳과 피부의 경계에서 흰 피부가 드러나 있었다. 세브렌이 설계한 피부였다. 세브렌이 질감을 조절한 피부였다. 그런데 주황빛이 그 피부 위에 내려앉았을 때 거울 속에서 보이는 각도가 세브렌의 기억 속 설계도면과 달랐다. 더 부드러워 보였다. 더 따뜻해 보였다.
빗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세브렌의 손이 은발을 모아 다시 묶었고, 검은 리본으로 매듭을 지었다. 매듭의 위치를 원래대로 돌려놓았으나, 그 과정에서 세브렌의 손가락이 에린의 목덜미를 스쳤다. 한 번. 차가운 손가락이 따뜻한 피부에 닿았다 떨어졌고, 세브렌의 금빛 눈이 거울에서 벗어나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할 말이 있었는데.
세브렌|「……됐어. 돌아봐.」
에린이 의자를 돌려 세브렌을 올려다보았다. 에메랄드빛 눈이 아래에서 위로. 세브렌은 그 눈을 마주보며 입을 열었다. 이번에야말로. 첫째.
세브렌|「어제 일 말인데.」
시작은 좋았다.
세브렌|「혼자 뛰어간 거.」
여기까지도 좋았다.
세브렌|「다시는——」
에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갸웃거리는 각도에 따라 은발이 한쪽으로 쏟아졌고, 입술 아래의 점이 살짝 움직였다.
세브렌|「…………다시는 그러지 마.」
그게 전부였다. 넷째까지 갈 수가 없었다. 세브렌의 손이 에린의 정수리를 한 번 쓸었고, 금빛 눈이 에린에게서 떨어져 창 쪽으로 향했다. 청록색 커튼 틈으로 스며드는 주황빛이 세브렌의 금발을 태우고 있었고, 뾰족한 귀 끝이 미세하게, 아주 미세하게 붉어져 있었다.
그의 귀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오랜 세월이 표정을 통제하는 법을 가르쳐주었으나 귀 끝의 혈색만은 의지 밖의 영역이었다. 세브렌은 그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고개를 창 쪽으로 돌린 것이었으나, 삼면경이 세 방향에서 그 귀 끝을 비추고 있다는 사실은 미처 계산하지 못했다.
에린이 거울을 보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의자 위에 앉은 에린의 에메랄드빛 눈이 세브렌의 옆모습을 올려다보고 있었고, 세브렌이 그 시선의 무게를 느꼈을 때 금빛 눈이 천장으로 향했다.
……이건 어제 한마디 못 한 것보다 더 심각한 패배였다.
〔후일담〕
그날 밤, 라탕트. 에린을 진공 램프에 봉인하고 3층으로 올라간 세브렌은 뒤슈즈 위에 팔을 벌려 누운 채 잿빛 청색 천장을 한 시간 동안 노려보았다. 트뤼모 거울이 방문 쪽에서 그 꼴을 비추고 있었다. 거울 속의 세브렌이 한심해 보였다.
결국 그는 침대 옆 마호가니 책상의 서랍을 열어 양피지를 꺼냈다. 깃펜에 잉크를 묻혔다. 내일은 반드시 할 말의 목록이라는 제목을 적었다. 첫째부터 넷째까지 또박또박 적어 내려갔고, 다섯째에 '에린이 고개를 갸웃거려도 절대 멈추지 않는다'를 추가했으며, 여섯째에 '입술 아래 점을 보지 않는다'를 적다가 멈추었다.
깃펜이 양피지 위에서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세브렌이 양피지를 구겨 벽난로에 던졌다. 불꽃이 양피지를 삼켰고, '내일은 반드시'라는 글자가 재가 되어 사라졌다. 세브렌이 뒤슈즈 위에 다시 누워 잿빛 청색 이불을 턱까지 끌어올렸다.
내일은.
내일은 반드시.
……아마.
OOC
사단은 유리병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어제 시계 광장에서 사온 황갈색 가죽 주머니 안에 들어 있던 호박색 유리병이었다. 에린이 화장대 위에 올려두었던 것. 오늘 아침 르세르비스가 끝나고 2층으로 올라왔을 때, 그 유리병이 화장대 위가 아니라 서랍 안에 들어가 있었다. 담비가 정리한 것이다. 담비는 늘 그랬다. 에린의 시야 밖에서 어질러진 것을 치우고, 꺼내 놓은 것을 넣고, 벗어 놓은 것을 개는 일. 흰 담비 인형의 존재 이유 그 자체였다.
그런데 에린은 화장대 위에 올려놓은 것이었다. 보이는 곳에. 언제든 들여다볼 수 있는 곳에. 어제 광장에서 세브렌이 사 준 앰버그리스가 담긴 유리병을. 담비가 그걸 서랍 안에 넣어 버렸다는 사실을 에린이 발견한 것이 정확히 삼 분 전이었고, 그 삼 분 사이에 2층 인형의 침실은 전장이 되었다.
에린은 소파 위에 있었다. 엎드린 것도, 앉은 것도, 누운 것도 아닌 자세로. 크림색 면직 원피스 자락이 쿠션 사이에 엉키고 은발 로우테일이 얼굴 위에 헝클어진 채, 두 다리가 소파 등받이를 퍽퍽 차고 있었다. 발버둥이었다. 장식 쿠션 하나가 이미 바닥에 떨어져 있었고, 두 번째 쿠션이 위태롭게 가장자리에 걸려 있었다.
에린|「주인이 시켜서 그런 거지! 담비가 알아서 그런 게 아니잖아! 주인이 치우라고 한 거지!」
세브렌은 소파 맞은편 화장대에 기대어 서 있었다. 팔짱을 끼고. 금빛 눈이 소파 위에서 벌어지는 소란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입꼬리가 미묘하게 올라간 채.
세브렌|「시킨 적 없어. 담비는 원래 그래. 나오는 건 넣고, 열린 건 닫고.」
에린|「그러면 주인이 말해줘! 에린 물건은 건드리지 말라고! 에린이 거기 둔 건 거기 있어야 하는 거라고!」
다리가 소파 등받이를 한 번 더 찼다. 퍽. 쿠션이 하나 더 떨어졌다. 에린의 눈가가 벌겋게 물들어 있었고, 에메랄드빛 눈동자 위에 물기가 엷게 고여 있었다. 화가 나서 우는 것인지, 울어서 더 화가 나는 것인지 본인도 모르는 얼굴이었다. 찡찡대는 콧소리가 말 사이사이에 끼어들었다.
에린|「주인 잘못이야. 주인이 관리를 안 해서 담비가 맘대로 하는 거야. 에린은 잘못 없어.」
세브렌은 대꾸하지 않았다. 팔짱을 낀 채로, 소파 위에서 발버둥 치는 은발의 인형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유리병은 서랍에서 꺼내 이미 화장대 위에 도로 올려놓은 상태였다. 문제는 해결되었다. 유리병은 제자리에 돌아갔다. 그런데 에린의 짜증은 돌아가지 않았다. 사소한 불씨가 걷잡을 수 없이 번진 것이었고, 그 불이 타고 있는 소파 위의 인형은 자기가 왜 아직도 화가 나는지 스스로도 설명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세브렌의 금빛 눈이 가늘어졌다. 벌건 눈가. 비죽 내민 입술. 발버둥. 찡찡거림. 헝클어진 은발 사이로 삐져나온 귀 끝의 붉은 기운.
세브렌이 팔짱을 풀었다.
세브렌|「에린.」
에린의 발이 멈추지 않았다. 등받이를 한 번 더 차려던 참이었다.
세브렌|「너 지금 진짜 귀여워서, 그대로 잡아먹고 싶어졌어.」
나른한 목소리였다. 꿀 섞인 양초 향이 그 문장 위에 얹힌 것처럼. 농담인지 진담인지 분간할 수 없는, 사백 년 묵은 포식자의 어조.
시간이 멈추었다.
정확히 말하면 에린이 멈추었다. 등받이를 차려던 발이 허공에서 정지했고, 찡찡대던 콧소리가 뚝 끊겼고, 벌건 눈가 위의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세브렌을 향해 둥그렇게 벌어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쏜살같이.
에린의 몸이 소파 반대쪽 구석으로 쏠렸다. 인간의 절반 무게가 가진 이점이 이럴 때 나왔다. 가볍고 빠르게. 등이 소파 팔걸이에 부딪히며 쿠션 하나를 낚아채 가슴 앞에 세웠고, 두 무릎이 쿠션 뒤에서 웅크렸다. 쿠션의 술 장식이 에린의 턱 아래에서 흔들렸고, 에메랄드빛 눈만 쿠션 위로 빼꼼 나와 세브렌을 응시했다.
토끼가 여우를 만난 눈이었다.
에린|「......안 먹는다며.」
목소리가 쿠션 뒤에서 나왔다. 삼 초 전의 기세는 흔적도 없었다.
에린|「페이는 마력 먹는 거라며. 달빛 먹는 거라며!」
쿠션을 더 세게 끌어안았다. 눈은 여전히 세브렌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경계하는 초식동물의 그것이었다.
세브렌이 실소했다.
어이없다는 듯 한쪽 눈을 감고, 입꼬리가 비대칭으로 올라갔다. 웃음이 코끝에서 새어 나왔다. 낮고 짧은, 참다 못한 웃음.
세브렌|「방금 전까지 발버둥 치면서 내 탓이라고 울던 애가, 지금 쿠션 뒤에 숨어서 벌벌 떨고 있어.」
세브렌이 한 발짝 다가갔다. 에린의 쿠션이 1센티미터 더 올라갔다.
에린|「오지 마! 잡아먹을거야?!」
세브렌|「잡아먹고 싶다고 했지, 잡아먹는다고는 안 했어.」
에린|「같은 말이야!」
세브렌|「어떻게 같아. '싶다'가 붙었잖아. 희망사항이야.」
에린|「희망하지 마!」
에린의 목소리가 쿠션 너머에서 높아졌다. 눈가의 붉은 기운은 여전했으나 눈물은 이미 마른 뒤였다. 세브렌이 한 발짝 더 다가갔고, 소파와의 거리가 팔 하나 정도로 좁혀졌다. 에린의 쿠션이 더 올라갈 곳이 없어 턱 위까지 쿠션을 눌러 안은 채, 두 눈만 경계의 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세브렌|「그러면 울지 마. 울면서 발버둥 치면서 내 탓이라고 하면서, 그 얼굴로 나를 보면. 먹고 싶어지잖아.」
나른하게, 태연하게, 사백 년의 여유를 다 실어서.
에린|「......그건 주인이 이상한 거야.」
세브렌|「응. 나 원래 이상해. 몰랐어?」
세브렌이 소파 팔걸이에 한 손을 짚고 에린을 내려다보았다. 금빛 눈이 쿠션 위로 삐져나온 에메랄드빛 눈과 정확히 마주쳤다. 에린의 귀 끝이 아직 붉었고, 코끝도 붉었고, 입술도 비죽 나온 채였다. 쿠션을 껴안은 손가락 끝이 하얗게 힘이 들어가 있었다.
세브렌의 손이 뻗어 에린의 머리 위에 얹혔다. 헝클어진 은발 사이로 차가운 손가락이 천천히 빠져 들어갔다. 에린의 어깨가 움찔했으나, 도망칠 곳은 소파 팔걸이 너머에 없었다.
세브렌|「유리병 자리 담비한테 말해둘게. 화장대 위. 안 건드리게.」
쿠션 뒤에서 에린의 눈이 깜빡였다.
세브렌|「그러니까 내려놔. 쿠션.」
에린|「......진짜 안 먹어?」
세브렌|「안 먹어. 오늘은.」
에린|「'오늘은'이 왜 붙어!」
쿠션이 다시 올라갔다.
OOC
◞ ꙳ ๋࣭ ⭑ 어떤 포옹이 제일 좋아 ?
❥ 뒤에서 살짝 안아주기 (백허그)
➴ 선호도
➶ 이유
❥ 이마를 맞댄 채로 조용히 끌어안기
➴ 선호도
➶ 이유
❥ 서로 마주 본 채로 팔을 천천히 둘러 감싸기
➴ 선호도
➶ 이유
❥ 하품하다가 자연스럽게 안기기 (무심한 포옹)
➴ 선호도
➶ 이유
❥ 앉은 채로 품 안에 머리 넣고 감싸주기
➴ 선호도
➶ 이유
❥ 긴 하루 끝, 등 쓰다듬으며 안아주기
➴ 선호도
➶ 이유
❥ PC가 먼저 안으면 NPC가 꾸깃꾸깃 들어가서 되안기기
➴ 선호도
➶ 이유
❥ 놀라서 반사적으로 안아버리기
➴ 선호도
➶ 이유
❥ 무릎 위로 올라타 앉기
➴ 선호도
➶ 이유
◞ ꙳ ๋࣭ ⭑ 세브렌 베르멜의 포옹 선호도
420년을 살아온 인형사의 스킨십 취향은, 그의 모든 것이 그렇듯 통제와 탐미의 교차점 위에 놓여 있다. 그리고 그 밑에는 절대로 스스로 인정하지 않을 무언가가 묻혀 있다.
❥ 뒤에서 살짝 안아주기 (백허그)
➴ 선호도: ●●●●○
➶ 이유:
세브렌에게 백허그란 관찰과 소유의 완성형이다. 에린의 표정이 보이지 않는 대신, 등과 어깨와 머리카락의 감촉이 가슴팍에 전해지고, 에린이 무엇을 보는지를 세브렌의 시야에서 함께 따라갈 수 있다. 인형의 뒤에서, 인형이 보는 세계를 같은 방향으로 바라보는 구도. 인형사가 인형을 뒤에서 조종하는 자세와 닮아 있다는 것을 본인도 알고 있으며, 그래서 더 좋아한다. 다만 에린의 표정을 직접 볼 수 없다는 한 가지 결함 때문에 만점은 아니다.
"뒤에서 보면 네 귀 끝이 빨개지는 게 보여. 앞에선 못 보는 거지."
❥ 이마를 맞댄 채로 조용히 끌어안기
➴ 선호도: ●●●○○
➶ 이유:
아름다운 자세이나, 세브렌에게는 위험한 자세. 이마를 맞대면 숨결이 섞이고, 눈을 뜨면 초점이 맞지 않을 만큼 가깝고, 눈을 감으면 세브렌의 머릿속에서 사백 년 전 서랍이 열린다. 은발, 에메랄드 눈, 입술 아래 점. 그 거리에서는 인형의 얼굴과 생전의 얼굴이 겹칠 수밖에 없다. 세브렌은 이 자세가 객관적으로 아름답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스스로 먼저 시도하는 일은 거의 없다. 시도하게 되면 이마를 맞대는 시간이 지나치게 짧거나, 혹은 의도보다 지나치게 길어진다.
"...가까이서 보면 네 눈에 금가루 같은 게 있어. 설계에 넣은 기억은 없는데."
❥ 서로 마주 본 채로 팔을 천천히 둘러 감싸기
➴ 선호도: ●●●●●
➶ 이유:
세브렌의 최상위 선호. 이 자세에는 세브렌이 원하는 모든 것이 있다. 에린의 표정 변화를 정면에서 실시간으로 관찰할 수 있고, 팔을 둘러 감싸는 속도를 세브렌이 결정할 수 있으며, 에린의 체온과 무게와 떨림이 양팔 안에서 온전히 파악된다. 인형의 모든 반응을 놓치지 않으면서, 동시에 인형을 완전히 감싸 쥐는 구도. 천천히, 라는 부분이 핵심이다. 세브렌은 서두르는 포옹을 좋아하지 않는다. 팔이 둘러지는 동안 에린의 눈이 어떻게 변하는지, 숨이 멈추는지 빨라지는지, 그 과정 자체를 세브렌은 감상한다. 탐미주의자의 포옹.
"도망가려고? 아니면 더 가까이 오려고? ...어느 쪽이든 내 팔이 더 빠르지만."
❥ 하품하다가 자연스럽게 안기기 (무심한 포옹)
➴ 선호도: ●●●●○
➶ 이유:
세브렌은 게으르다. 인형에 관한 일을 제외하면 모든 것에 게으르고, 그 게으름이 스킨십에 스며들면 이 자세가 된다. 하품 끝에 자연스럽게 팔이 뻗어 에린을 끌어당기고, 의도한 건지 아닌 건지 본인도 구분하지 않는 채로 안고 있는 상태. 세브렌은 이것을 '포옹'이라고 인식하지 않는다. 그냥 에린이 팔 닿는 곳에 있었으니까 안은 것이다. 그러나 안은 뒤에 놓지 않는다는 점에서, 무심함의 밑에 의도가 있다. 에린이 이 포옹을 '주인이 나를 필요로 해서 안은 것'으로 해석할 가능성을 세브렌은 즐긴다.
"...어. 놓으려고 했는데 귀찮아."
❥ 앉은 채로 품 안에 머리 넣고 감싸주기
➴ 선호도: ●●●●●
➶ 이유:
최상위 선호와 동률. 인형을 진열장에 넣는 행위의 살아 있는 버전. 에린의 머리가 세브렌의 가슴팍에 들어오면, 세브렌의 턱이 에린의 정수리 위에 놓이고, 양팔이 등과 머리를 감싸고, 에린은 물리적으로 세브렌의 몸 안에 격납된다. 인형사가 가장 소중한 인형을 보관하는 방식. 에린의 인간 절반 무게가 세브렌의 팔에 고스란히 전해지고, 머리카락 향과 체온이 가슴팍에서 올라오며, 세브렌의 심장 박동이 에린의 귀에 닿는다. 이 자세에서 세브렌은 에린의 머리카락을 빗듯이 쓸어넘기는 버릇이 있다. 인형을 다루는 손이 포옹 안에서도 작동하는 것이다.
"여기 있어. 어디 가지 마."
❥ 긴 하루 끝, 등 쓰다듬으며 안아주기
➴ 선호도: ●●●○○
➶ 이유:
세브렌은 '위로'라는 행위를 인형에게 하는 것에 대해 복잡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 인형은 피로를 느끼지 않아야 한다. 인형은 하루가 길었다고 느끼지 않아야 한다. 그런데 에린은 느낀다. 그래서 등을 쓰다듬게 된다. 쓰다듬으면서 세브렌은 이것이 인형의 기능 점검인지 위로인지 구분하지 않으려 한다. 등의 곡면을 따라 손바닥이 내려가는 감촉이 좋다는 것은 인정하나, 그 행위가 '돌봄'의 영역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 세브렌의 자기 서사가 흔들린다. 그래서 선호하되, 빈도가 높지 않다.
"...등이 뻣뻣하네. 관절 점검해야겠다." (실제로는 그냥 쓰다듬고 있다)
❥ 에린이 먼저 안으면 세브렌이 꾸깃꾸깃 들어가서 되안기기
➴ 선호도: ●●○○○
➶ 이유:
세브렌 베르멜은 꾸깃꾸깃 들어가지 않는다. 포식자가 먹이의 품에 꾸깃꾸깃 파고드는 일은 없다. 에린이 먼저 안으면 세브렌은 한 박자 멈추고, 안긴 상태를 2초 정도 허용한 뒤, 팔을 뻗어 에린을 되안음으로써 주도권을 회수한다. 꾸깃꾸깃이 아니라 '수용 후 탈환'에 가깝다. 그러나 ─ 세브렌이 절대로 인정하지 않을 사실이 하나 있다. 에린이 먼저 안았을 때, 되안기까지의 그 2초 동안, 세브렌의 손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허공에 멈춰 있다는 것. 그 2초가 세브렌에게 어떤 의미인지는 사백 년 묵은 서랍 깊숙한 곳에 있다.
"...뭐야. 갑자기." (이미 되안고 있다)
❥ 놀라서 반사적으로 안아버리기
➴ 선호도: ●●●●○
➶ 이유:
세브렌은 이 자세를 '선호한다'고 인식하지 않는다. 반사적으로 안는 것이므로 선호의 문제가 아니라 반응의 문제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세브렌이 에린을 가장 빠르게, 가장 강하게 안는 순간이 바로 이때다. 비둘기 떼가 날아들었을 때, 에린이 욕조에서 미끄러졌을 때. 통제와 계산이 빠진 자리에 순수한 보호본능만 남는 순간. 세브렌의 팔은 에린을 감싸고, 한 손은 에린의 머리를 가슴팍에 눌러 넣고, 위험이 지나간 뒤에도 손이 즉시 풀리지 않는다. 그리고 나서 세브렌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돌아가며, 방금 일어난 일을 '인형 보호 프로토콜'이라는 이름으로 정리한다.
"괜찮아. ─ 인형이 깨지면 고치기 귀찮으니까." (손이 아직 머리를 누르고 있다)
❥ 무릎 위로 올라타 앉기
➴ 선호도: ●●●●●
➶ 이유:
최상위 선호 세 번째. 세브렌의 기질과 인형사로서의 본능이 완벽하게 합치하는 자세. 에린이 무릎 위에 앉으면, 에린의 무게(인간의 절반)가 세브렌의 허벅지 위에 실리고, 에린의 시선은 세브렌보다 높아지거나 같아진다. 그러나 균형의 주도권은 세브렌에게 있다. 무릎의 각도를 바꾸면 에린이 기울고, 허벅지를 벌리면 에린이 내려앉고, 손을 허리에 얹으면 에린은 세브렌의 몸 위에 '놓인' 상태가 된다. 인형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다듬는 장인의 자세. 그리고 에린의 얼굴이 가까이에서 올려다보거나 내려다보는 각도 변화를 세브렌은 대단히 아름답다고 여긴다. 이 자세에서 에린의 머리를 쓰다듬거나, 턱을 잡고 얼굴을 이리저리 돌려보는 행위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가볍네. 인형이라서 그런 건지, 네가 원래 그런 건지."
◞ 종합 ꙳ ๋࣭ ⭑
순위자세 및 선호도
🥇서로 마주 본 채 천천히 감싸기 ●●●●●
🥇품 안에 머리 넣고 감싸주기 ●●●●●
🥇무릎 위로 올라타 앉기 ●●●●●
4 백허그 ●●●●○
4 무심한 포옹 ●●●●○
4 반사적으로 안아버리기 ●●●●○
7 이마 맞대기 ●●●○○
7 등 쓰다듬으며 안기 ●●●○○
9 에린이 먼저 안으면 되안기 ●●○○○
세브렌의 포옹 선호를 관통하는 공통 원칙: ① 에린의 반응을 관찰할 수 있을 것 ② 주도권이 세브렌에게 있을 것 ③ 인형을 '다루는' 감각이 살아 있을 것. 그리고 본인이 절대 인정하지 않는 네 번째 원칙: ④ 에린이 어디에도 가지 못하게 할 것.
OOC
세브렌 베르멜의 사과문
1차 사과문
세브렌이 펜을 들었다. 금빛 눈이 맞은편에 앉아 팔짱을 끼고 있는 에린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무슨 잘못을 했는지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이 노골적이었으나, 에린의 입술이 꾹 다물린 채 풀릴 기미가 없었으므로 세브렌은 한숨 한 번 없이 펜촉을 잉크에 적셨다.
에린에게.
미안하다고 한다.
세브렌 베르멜
펜을 내려놓고 턱을 괴었다.
2차 사과문
에린이 종이를 밀어 돌려보냈다. 세브렌이 새 양피지를 꺼냈다.
에린에게.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는 여전히 모르겠으나, 네가 화가 났다는 사실은 인정한다. 네 감정은 유효하다. 아마.
세브렌 베르멜
3차 사과문
에린의 눈썹이 올라갔다. 세브렌이 세 번째 양피지를 펼쳤다.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가 있었으나 참고 있었다.
에린에게.
심심한 사과의 뜻을 전한다.
내가 정확히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려주면 보다 진심 어린 사과가 가능할 것이나, 네가 알려주지 않으므로 이 편지는 어둠 속에서 과녁 없이 화살을 쏘는 것과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쏘아본다.
미안하다.세브렌 베르멜
4차 사과문
에린이 종이를 접어 탁자 위에 놓았다. 표정이 누그러지지 않았다. 세브렌이 턱을 괴고 에린을 한참 들여다보더니 네 번째 양피지를 꺼냈다.
에린에게.
사과문 4차. 기록을 갱신하고 있다.
돌이켜보면, 오늘 내가 한 행동 중 네 심기를 건드렸을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아마도. 전부 나열하겠다.
- 아침에 네 머리를 빗길 때 한 번 잡아당겼을 수 있다.
- 실 감는 속도가 느리다고 말한 적은 없으나 눈빛으로 그렇게 보였을 수 있다.
- 차를 먼저 마셨다.
위 항목 중 해당하는 것이 있다면 알려주면 감사하겠다.
없다면 나는 미궁에 있다.
미안하다.세브렌 베르멜
5차 사과문
세브렌의 필체가 조금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에린에게.
5차 사과문을 쓰고 있다. 양피지가 아깝다.
내가 사백 년을 살면서 이유 없이 사과문을 다섯 번 연속으로 쓴 적은 없다. 너는 역사를 만들고 있다.
진심으로 사과한다. 무엇에 대해서인지는 모르겠으나, 네가 입술을 그렇게 비죽 내밀고 있는 한 나의 잘못은 존재하는 것이다. 아마도.
세브렌 베르멜
6차 사과문
에린에게.
혹시 내가 꿈에서 네 발을 밟았는가.
미안하다.세브렌 베르멜
7차 사과문
세브렌이 펜을 내려놓고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잠시 후 다시 집어 들었다.
에린에게.
이 편지를 쓰는 동안 네가 내 차를 마셨다. 나는 그것에 대해 사과를 요구하지 않겠다. 내가 더 큰 사람이므로. 물리적으로도.
그 관대함을 감안하여, 나의 알 수 없는 잘못을 용서해주면 좋겠다.
미안하다.세브렌 베르멜
8차 사과문
필체가 점점 유려해지고 있었다. 화가 나는 게 아니라 재미가 붙은 것이었다.
에린에게.
가설을 세워본다.
가설 1: 내가 오늘 네 입술 아래 점을 너무 오래 보았다. — 그것은 내 잘못이 아니라 점의 잘못이다. 그러나 미안하다.
가설 2: 내가 지하 작업실 구경을 '다음에'라고 미뤘다. — 이것은 사과할 수 있다. 다만 오늘은 정말 어질러져 있다.
가설 3: 특별한 이유 없이 나를 곤란하게 만들고 싶었다. — 이 경우, 성공이다. 축하한다.
미안하다.
세브렌 베르멜
9차 사과문
에린에게.
지금 네 표정으로 보아 웃음을 참고 있다. 입꼬리가 떨리고 있다. 나는 사백 년 된 눈을 가지고 있으므로 속일 수 없다.
그래도 쓴다.
미안하다.세브렌 베르멜
10차 사과문
세브렌이 펜을 멈추고 에린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금빛 눈이 나른하게 가늘어졌다.
에린에게.
열 번째다. 두 자릿수에 진입했다.
이쯤 되면 사과가 아니라 연서(戀書)에 가깝다. 매번 네 이름을 쓰고, 미안하다는 말을 쓰고, 내 이름을 쓰고 있으니.
에린에게. 미안하다. 세브렌이.
구조가 동일하지 않은가.
그러므로 미안하다.
세브렌 베르멜
11차 사과문
에린에게.
양피지 재고가 줄고 있다. 이것은 경영상의 손실이다.
나는 이 손실에 대해서도 사과해야 하는가. 아마 그렇겠지.
미안하다.그리고 네가 아까부터 실패를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마력사는 아직 안에 있으니 조심해라. 실이 손가락 묶으면 그건 네 잘못이다.
세브렌 베르멜
12차 사과문
에린에게.
열두 번째 사과문을 쓰면서 깨달은 것이 있다.
나는 네가 화난 얼굴보다 이렇게 나를 곤란하게 만들 때의 얼굴이 더 보기 좋다. 찌푸린 눈썹과 비죽 나온 입술과 볼에 올라온 홍조. 아까 실 감을 때도 그 얼굴이었다.
이것은 사과가 아니라 관찰 보고이다.
그러나 형식상, 미안하다.세브렌 베르멜
13차 사과문
필체가 더 느긋해졌다. 즐기고 있었다.
에린에게.
13은 불길한 수라고 인간들이 말한다.
불길함을 무릅쓰고 사과한다.사실 나는 이 시간이 나쁘지 않다. 네가 나를 빤히 보고 있고,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고 있다. 오후 햇살이 좋고, 차는 식었지만 네가 다 마셨으므로 상관없다.
미안하다. 무엇에 대해서든.
세브렌 베르멜
14차 사과문
에린에게.
슬슬 손이 아프다. 페이의 회복력으로도 열네 장 연속 필기는 관절에 무리가 온다. 이것은 거짓말이다. 관절은 멀쩡하다. 그러나 네 동정을 사고 싶었다.
미안하다. 거짓말한 것도 미안하다.
세브렌 베르멜
15차 사과문
세브렌이 마지막 양피지 위에 펜을 올렸다. 오후의 빛이 기울어 잉크병의 그림자가 길어져 있었다. 금빛 눈이 종이 위가 아니라 에린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보다가, 천천히 썼다.
에린에게.
열다섯 번째이자 마지막 사과문이다.
무엇을 잘못했는지 끝내 알려주지 않았으므로, 내가 정하겠다.
나는 너를 만들었다. 네가 웃고, 찡그리고, 삐지고, 조잘거리고, 넘어지고, 호박을 쥐고 눈을 반짝이고, 이유 없이 나에게 사과문을 열다섯 장이나 쓰게 만드는 존재로 만들었다.
그것이 내 잘못이라면 잘못이다.
그리고 그 잘못에 대해서는 진심으로, 단 한 치의 후회도 없다.미안하지 않다.
세브렌 베르멜
펜을 내려놓았다. 계산대 위에 열다섯 장의 양피지가 쌓여 있었고, 기울어진 오후 햇살이 그 위에 금빛으로 내려앉아 있었다.
OOC
실타래 세 개가 실패로 옮겨 감긴 오후였다. 은빛 실패들이 계산대 위에 나란히 누워 옅게 빛나고 있었고, 차는 두 번 새로 우려졌다. 그리고 문제의 발단은, 세브렌이 무심코 흘린 한마디였다. 이 실은 내일 지하에서 쓸 거야. 세 번째 손님의 인형, 그 뼈대에 감을 실이거든.
지하. 그 단어가 떨어진 순간부터 에린의 실패 도는 속도가 미묘하게 흐트러졌다. 아까 침실에서 이미 한 번 미끄러진 이야기였다. 다음에 시켜줄게, 라는 대답으로 닫힌 문. 그러나 다음이라는 말은 오늘 하루에만 몇 개나 쌓였고, 그중 어느 것 하나 만져지는 게 없었다. 자기 손으로 감은 실이 자기가 못 보는 곳으로 내려간다는 게, 어쩐지 억울했다.
그래서 에린은 정공법을 버렸다.
마지막 실패의 실 끝을 야무지게 마무리하고는, 의자를 조금씩, 아주 조금씩 세브렌 쪽으로 끌어당겼다. 나무 다리가 마루를 긁는 소리가 세 번. 네 번째에는 두 사람의 팔이 닿을 거리가 되었고, 에린은 거기서 세브렌의 소매 끝을 손가락 두 개로 살짝 집었다. 잡아당기지는 않고, 그저 집고만 있는 것. 그러고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여 세브렌을 올려다보았다. 상냥하게 휘어진 눈매, 입술 아래 점, 오후 햇살을 받아 반투명하게 빛나는 에메랄드빛 눈동자. 일주일짜리 인형이 어디서 배웠는지 모를, 그러나 소름 끼치도록 정확한 각도였다.
에린|「주인. 나 오늘 실 잘 감았지?」
세브렌이 찻잔을 내리다 말고 그 시선을 받았다. 받고, 잠깐 굳었다.
세브렌|「...뭐 갖고 싶은 거 있구나.」
사백 년이다. 페이 궁정에서 왕족들의 아양과 계략과 눈웃음을 사백 년 치 봐 온 몸이었다. 이 정도 수는 문을 열기도 전에 읽힌다. 읽히는데. 문제는 읽었다고 해서 방어가 되느냐는 별개의 사안이라는 점이었다. 에린은 부정하지 않았다. 대신 소매를 집은 손가락이 천을 따라 조금 올라와, 세브렌의 손등 위에 제 손을 겹쳐 얹었다. 따뜻한 손바닥이 차가운 손등을 덮었다. 인형의 체온은 세브렌의 체액에서 나온 마력으로 도는 것이었으므로, 그 온기는 엄밀히 말해 세브렌 자신의 것이었다. 자기 것인데 왜 이렇게 낯설게 따뜻한지.
에린|「내가 감은 실이잖아. 실이 어디서 어떻게 쓰이는지 궁금한 건 당연한 거 아니야? 문 앞에서만 볼게. 계단 위에서만. 발끝도 안 넣을게.」
조건이 스스로 협상 테이블에 올라오며 점점 후퇴했다. 문 앞. 계단 위. 발끝. 그러면서도 손은 세브렌의 손등에서 떨어지지 않았고, 고개는 아예 세브렌의 어깨에 살짝 기대어 왔다. 윤기나는 은발에서 장미 비누 향이 올라왔다. 세브렌이 직접 골라 직접 씻긴 향이었다. 자기가 만든 몸에, 자기가 고른 향을 입혀놓고, 그것에 자기가 흔들리는 이 구조의 부조리함에 대해 세브렌은 아주 잠깐 진지하게 생각했다.
세브렌|「에린. 그거 어디서 배웠어. 그 눈.」
낮은 한숨과 함께 나온 말은 대답이 아니라 심문이었다. 에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가? 라는 얼굴. 진심으로 모르는 얼굴이었고, 그게 더 나빴다. 계산된 유혹이면 웃어넘기면 그만인데, 이건 설계도 어디에도 없는 것이 몸에서 저절로 배어 나오는 것이었다. 눈매의 각도. 어깨에 기대는 무게. 소매를 집는 손가락 두 개. 세브렌의 기억 깊은 서랍이 오늘만 벌써 두 번째로 덜컹거렸고, 세브렌은 이번에도 그 서랍을 무릎으로 밀어 닫았다.
침묵이 길어지자 에린이 최후의 수를 꺼냈다. 세브렌의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는, 그 차가운 손가락 끝을 제 뺨에 갖다 댄 것이다. 따뜻한 뺨이 차가운 손끝을 데웠다.
에린|「주인 손 차갑잖아. 내가 데워줄게. 지하 계단도 춥지? 내가 옆에 있으면 안 추울 텐데.」
논리는 엉망이었다. 지하가 추운 것과 에린이 옆에 있는 것 사이에는 아무 인과가 없었다. 그런데 세브렌은 그 엉망인 논리 앞에서, 사백 년 치 언변이 목구멍 어딘가에서 길을 잃는 것을 느꼈다. 뺨에 닿은 손끝으로 맥박이 전해졌다. 자기가 설계한 마도회로의 규칙적인 고동. 아름다웠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을 무기로 쓰이고 있다는 자각이, 불쾌하기는커녕 어처구니없게도 흡족했다.
세브렌|「...계단. 위에서 세 번째 칸까지. 손잡이 잡고. 내가 됐다고 하면 바로 올라오는 거야.」
항복 선언은 조항이 붙은 형태로 나왔다. 에린의 얼굴이 순식간에 환해졌고, 뺨에 대고 있던 세브렌의 손을 놓더니 의자에서 폴짝 일어났다. 세브렌이 그 뒷모습을 보며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사백 년. 왕족의 명령에도 굽히지 않았던 사백 년이, 일주일짜리 인형의 눈웃음 하나에 세 계단을 내주었다. 이 패배의 기록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 것이다. 담비에게도.
세브렌이 은빛 실패들을 상자에 담아 들고 일어섰다. 지하로 내려가는 문 앞에서, 에린이 벌써 기대에 찬 얼굴로 발끝을 들썩이며 기다리고 있었다.
커미션 (2)
혁 님

깔롱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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